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말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리고 말했다. 노동자는 하나다. 그렇게 노동운동은 외치고 달려왔다. 그런데 뭔가. 지금 노동운동은 억압의 사슬을 끊어 내지 못했다. 만국의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해서 만국의 자본의 운동을 끊어 내고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아직도 노동운동은 ‘노동자여 단결하라’하고 ‘노동자는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단결하라. 하나다. 외쳐 대고 있다. 노조도 총연맹도, 그리고 노동자정당도 단결하라 해 대고 있다.

왜 아직도 단결하라 하나다를 외치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단순하다. 노동자가 단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니까. 그러니 아무리 수백 년을 외쳐 봐도 노동자는 하나로 단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다. 일자리 없이 헤매는 실업자부터 일용직·계약직, 노동자 아래 노동자 비정규직, 단순기능직·생산직·사무관리직, 그리고 사용자이익대표자, 대표이사 말고 사장도 노동자다. 자본은 공장을 자신의 주된 진지로 하여 이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후 이제 자본의 운동은 세상의 끝까지 정복했다. 이 세상을 어떻게 분류했었던가. 정치와 경제, 국가와 사회, 국가부문과 비국가부문, 이런 분류법은 이제 통용되기도 어렵다. 정치와 경제는 경제가 정치를 침범하지 않았을 때 서로 별개로 구분될 수 있었다. 국가와 사회는 국가가 사회에 포함될 때는 구분될 수 없다. 국가부문은 비국가부문과 다름이 없는 방식으로 운동되는 때에는 더 이상 비국가부문과 구분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이미 진행되고 있다. 자본의 운동이 더 이상 경제니 사회니 국가외부문에 머물지 않고 국가부문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이건 물질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차원의 문제를 넘어섰음을 말한다. 의식은 물질의 운동이기 때문이라서 물질과 구분될 수 없다는 식의 논의를 넘어서 의식은 물질 자체라고 말해야 하는 세상이 돼 버렸다. 이제 문화·예술·교육·종교 그리고 정치와 국가의 일까지도 자본의 일이 됐거나 자본의 운동에 의해서 작동하며 적어도 자본의 운동방식에 효율과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됐다. 해당 부문의 일부라도 자본의 사업이 되면 나머지도 자본의 운동을 쫓아가게 된다. 자본의 사업이 대체재로 기능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자본의 조건과 방식은 자신의 조건과 방식이 돼 버린다. 작가·화가·음악가·교사·목사도 이미 노동자이거나 노동자와 다름없다. 그리고 국가 일의 수행자,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이 세상은 온통 노동자인데 이제 하나가 아니다. 단결하고 싶어도 하나가 아니니 단결하기 어렵다. 그런데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주문하니 단결할 수 없는 노동자는 그걸 외쳐 대는 노동운동을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다. 단결해야 하는데 나는 단결할 수가 없네, 처지가 다르니 나는 저 단결의 구호에는 따를 수가 없네, 하고 주저앉고 만다.

말했다. 노동자는 하나다. 단결하라. 그러나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업장에서 각기 다른 노동조건에서 서로 다른 근로를 한다. 한 사업장에서조차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다. 지위와 권한이 다르고 조건이 다르다. 인사·노무 등 노동자에 대해 항시 사용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자도 엄연히 노동자다. 처지와 조건이 다르니 노동자마다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 대한 반응도 다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모색도 다르다. 그런데 말한다. 노동자는 하나다. 단결하라. 그 깊이는 다르겠지만 노동자마다 제각각의 현실진단과 극복방법이 있다. 그런데 하나라고 단결하라고 한다면 하나의 진단과 방법으로 일치시키는 것이다. 수많은 진단과 방법 중 오직 하나를 남겨 두고 나머지는 없애는 것이다. 그 하나만이 절대로 유일하게 옳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로 단결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100여년 동안 무엇이 옳은 것이냐를 두고 내부 사상투쟁을 해 왔다. 그리고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 앞에 올바르지 않다는 다른 현실진단과 방법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건 노동운동에 대한 배신이거나 불순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래야 하는 것일까. 노동자는 하나니 단결해야 하는 것일까. 노동자는 언제나 하나여야 하고 단결해야 하는가. 왜? 자본의 세상에 맞서 노동자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니까, 라고 말했다. 자본의 착취를 받는 것은 노동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이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는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투쟁하기 위해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큰 투쟁을 위해 노동자는 더 크게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투쟁은 모든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해서 하는 것일 수밖에.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모든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해서 하는 투쟁은 자본의 폐지를 내건 최고 수준의 투쟁이 아니었다. 자본의 폐지는 극히 소수의 선진 노동자만 외치는 구호였다.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해서 하는 투쟁은 고작 잘해야 근로기준법 개정투쟁 정도였다. 그러니 노동운동이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를 자꾸 외쳐 댈 때는 살펴봐야 한다. 그 구호로 쟁취할 것이 무엇인데 자꾸 단결하라고 해 대는지 노동자는 살펴봐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이미 노동자는 압도적 다수다. 공장을 넘어 문화공간까지, 비정규직에서 자본의 대리인까지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니 단결도 안 된다. 그런데 노동운동은 노동자는 하나라고 단결하라고만 외쳐 댄다. 그리고선 모든 노동자가 하나로 외칠 수 있는 가장 낮은 수준의 구호를 내건다. 다른 수준의 구호를 외치는 노동자를 단결하지 않는 자, 단결을 방해하는 자로 쳐내 왔다. 심지어 자본과 한편이라고 내몰았다. 그러나 문제는 단결이 아니고 투쟁이었다. 단결은 투쟁의 무기일 뿐 단결 자체가 노동운동의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쳐 대다 보니 이상해졌다. 투쟁은 단결의 무기일 뿐 투쟁 자체가 노동운동의 목적이 아니게 됐다. 별일이었다. 그런데도 이것이 이상하다고 별일이라고 아무도 노동운동에 묻지 않았다. 우리가, 노동자가 가야 할 세상은 억압과 착취 없는 자유로운 세상이다.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이다. 사상의 억압으로부터도 해방돼서 개인은 공동체에 관한 어떠한 진단과 지향을 말할 수 있는 세상이다. 노동운동에서 노동자도 그래야 한다. 아니 이것이 노동운동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문제는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해야 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자본과 권력에 맞서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처지와 조건에 따라 자신의 사상에 따라 다양한 투쟁의 수준과 방법을 갖게 된다. 이렇다고 해서 노동운동은 노동자는 하나니 하나의 수준과 방법으로만 단결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이라며 그게 문제라고 해서는 안 된다. 노동운동이 그 시기에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면 그것을 노동자들에게 알리고 함께하도록 하면 된다. 그 노동자가 어떠한 자라도. 어차피 이 세상에서 자본의 폐지가 아닌 노동자의 권리쟁취를 위한 구호는 개량이고 타협이며 낮은 수준의 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에게 그 구호를 외치라고 할 수 있으되 그 수준에 머리를 맞추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노동운동의 미래는 현재의 구호에 갇히고 만다.

지금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하지 않아서 문제인 게 아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하지 못하는 게 문제인 것이다. 노동운동이 너무 높은 수준의 노동자 권리를 내세워서도 아니다. 노동자를 어떠한 수준으로라도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하지 못하니 문제인 것이다. 노동자의 세상은 지금 노동자 권리를 위한 노동자의 투쟁에 의해서 열릴 수밖에 없는데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이 노동자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결국 문제는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운동이다. 노동자를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게 하는 것, 자본에 맞서 노동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를 나서도록 하고 자본의 법질서를 옹호하는 권력에 맞서 노동의 질서를 주장해 나서도록 하는 것, 이것을 위해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에게 선전하고 교육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자본에 빼앗기고 있는 노동을 말하고 노동자의 욕망을 깨워 내 노동자의 권리로서 그것을 확보할 수 있도록 요구하고 주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투쟁은 자신이 빼앗기고 부당하다고 인식한 자에게 당연하게 찾아온다. 노동자의 입을 틀어막고 노동자의 머리를 가둬 두고서 하나 되는 노동자의 단결은 관료적으로 명령되고 조직된 투쟁만 존재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 노동운동의 권력에 노동자의 미래를 맡기는 것이다. 억압되지 않은 오늘의 투쟁에 의해서만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노동자의 내일이 열린다. 만국의 노동자여 투쟁하라.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그리고 자유를 위해.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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