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금속노조 / 금속노조가 입수해 공개한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업체 관리자의 수첩
현대자동차가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지휘·감독한 정황이 담긴 각종 자료를 은폐하거나 폐기해 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현대차는 사내하청업체 중간관리자들을 동원해 작업표준서나 사양식별표 등에 들어가는 현대차 회사로고를 하청업체 로고로 교체하도록 지시하고, 노동위원회 등 사법기관에서 회사측에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만한 자료의 폐기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은 18일 금속노조(위원장 박유기)가 입수해 공개한 현대차 아산공장 의장부 A하청업체 B총무의 업무수첩에 상세히 담겨 있다. 수첩에는 지난해 12월6일부터 이달 5일까지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진행된 각종 업무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불법파견 여부에 대해 사내하청노조와 쟁송 중인 현대차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만한 각종 서류의 형식을 바꾸거나, 아예 관련 자료의 폐기를 추진한 부분이다.



◇하청업체에 업무서류 교체 지시=수첩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현대차 아산공장 의장부 관리자는 올해 2월8일 오후 의장부 내 사내하청업체 총무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열어 “작업표준서를 일부 수정하고, 사양식별표 (사내하청)업체 것으로 변경해 작성하라”고 지시하고 “월·주·일 단위 관리대장도 업체 것으로 변경하라”고 주문했다.

작업표준서나 사양식별표는 차량의 생산계획이나 각종 옵션 등을 명기한 업무지시서다. 원청업체인 현대차의 생산계획에 따라 그때그때 명기되는 내용이 달라진다. 현대차 정규직은 물론, 사내하청노동자들도 이 서류에 적힌 내용대로 일을 한다. 그런데 현대차는 이들 서류에 개별 하청업체의 로고가 들어가도록 디자인 변경을 주문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여러 차례 이뤄졌다. 현대차 협력지원팀 관계자는 2월9일 사내하청업체 총무들에게 △사양식별표 양식을 참조해 작성할 것 △회사 창립일을 기준으로 날짜를 확인할 것 △원본을 취합해 한 업체에 일괄 발송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A업체는 작업표준서 업체명을 변경하고, 현대차로부터 사양식별표 원본을 USB로 받아 업체명을 수정한 뒤 이를 현대차 의장부 관리자들에게 제출했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법원과 노동위원회에 ‘근로자지위 확인소송’과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한 가운데 증거자료에 대한 사전검열과 폐기도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올해 5월9일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천안지청이 A업체에 출석요구서를 보내자 A업체는 이를 현대차 아산공장 협력지원팀 관계자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협력지원팀은 A업체에 안전협의회 회의록·시말서·안전보건 합동점검 추진 계획서·안전보건 관리업무 계획서·안전화 귀마개 피복 신청서 및 지급대장·안전보건 계약서·일일 안전점검 순찰표·DR TRIM 발생현황과 월 이종·미장착 관리표, 토크 관리대장·키퍼일지·업무 분담표(총무·소장·반장·조장) 등을 작성하도록 했다.

또 수첩에는 7월28일자로 "지노위 관련 각종-폐기서류 확인 및 정리함"이라고 적혀 있다. 원청업체인 현대차가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되는 자료를 없애 불법파견 의혹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가 지속됐다고 해석되는 대목이다.

현행법상 증거 인멸행위나, 증거 인멸을 교사한 행위는 형사처벌 대상이다. 김태욱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최근 현대차와 기아차의 작업표준서 등이 일제히 교체되고 있는데, 기존의 증거를 없애고 없던 증거를 만들어 내는 행위 그 자체도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며 “해당 수첩을 법원 등에 증거자료로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청노동자 징계까지 직접 지휘=수첩에는 현대차가 하청업체의 노조활동에 개입해 노조탈퇴를 강요한 정황도 다수 담겨 있다. 협력지원팀의 지시에 따라 하청업체가 하청노동자를 해고하거나 징계하고, 파업에 참가한 사내하청노동자 중 통장 가압류 대상까지 현대차가 직접 지목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차는 지난해 12월 사내하청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이 끝난 뒤 각 하청업체에 “파업 대비 여유인원을 12월15일자로 정리하라”고 지시했고, 지난해 연말에는 하청업체 사장들에게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조합원들과 회식하라”며 해당 비용은 현대차가 하청업체에 주는 기성금으로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달 15일 충남지방노동위원회는 현대차 아산공장에 대해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충남지노위는 금속노조 현대차아산사내하청지회 조합원 중 파업 가담을 이유로 정직 이상의 징계를 당한 조합원 193명이 낸 부당해고 구제신청 심판회의에서 188명에 대한 부당징계를 인정했다. 현대차의 사내하도급 고용관행이 ‘도급’이 아닌 ‘파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하청업체가 아닌 현대차에 징계의 책임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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