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철도노조 법규부장

통상 직위해제는 직무수행능력이 부족하거나 징계절차 진행 또는 형사기소된 노동자에게 바로 업무를 담당하지 못하게 하는 인사처분이다. 이러한 직위해제는 사용자가 기업질서 유지를 위해 행하는 징계와는 구분되는 인사처분이기 때문에 직위해제 대상이 되는 노동자에게 소명기회 등을 부여할 필요가 없이 사용자가 ‘손쉽고 신속하게’ 취할 수 있는 불이익 처분이다. 그만큼 사유를 판단하거나 절차를 진행하는 데 엄격함이 요구된다.

다른 사업장과 달리 한국철도공사는 유독 직위해제 처분을 철도노조 파업 때마다 이용해 왔다. 철도청 시절인 2003년 6월28일 철도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마자 조합간부를 중심으로 780여명을 직위해제했다. 이때 재미를 본 철도공사는 2006년 3월1일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마자 2천600여명을 대상으로 또다시 무차별적인 직위해제를 ‘남발’했다. 노조간부를 중심으로 한 직위해제는 사실상 업무복귀명령보다 더 큰 위압감을 갖게 된다. 철도공사 인사규정에 따른 직위해제의 불이익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파업참여에 대해 구체적인 처분을 바로 감행했다는 점에서 직위해제되지 않은 조합원들까지도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철도공사는 이 점을 노리고 2003년보다 훨씬 더 많은 노조간부와 열성(?) 조합원에 대해 파업에 돌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잡이로 직위해제를 한 것이다.

2006년 3월1일 직위해제에 대해 철도공사는 ‘불법’파업에 참여한 행위는 넓은 의미에서 "직무수행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직무수행능력에는 직무에 임하는 태도도 포함되는 것이고 ‘불법’파업에 참여하고 업무복귀명령에 불복한 것은 근무태도가 불량하다고 주장했으나, 중앙노동위원회와 행정법원·서울고등법원은 ‘불법’파업 참여와 직무수행능력과 관련한 문제로 볼 수 없다고 일축했다.

2009년 11월24일 철도공사의 단체협약 해지·교섭거부로 인해 예정돼 있던 파업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철도노조는 과연 이번에는 어떠한 사유를 가지고 몇 명이나 철도공사가 직위해제를 할 것인지를 주목하고 있었다. 파업 돌입 첫날 여지없이 철도공사는 직위해제를 남발했다.

공사는 3·1 파업 때와는 달리 ‘극도의 피로와 흥분’으로 인한 직무수행능력 부족을 직위해제 사유로 들었다. 다들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차라리 ‘공사의 위상저하’를 그 사유로 했으면 그나마 수긍했을지도 모르겠으나, 당시 파업의 불법성에 확신이 없던 철도공사가 이를 사유로 삼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철도공사는 노조간부들이 ‘파업준비’로 인한 극도의 피로와 흥분 때문에 정상적인 직무수행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함께 파업을 준비하면서 ‘극도의 피로와 흥분상태’에 있는 필수유지업무로 지명된 노조간부들은 직위해제를 하지 않았다. (노동위원회 심문회의에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필수유지업무자’로 지명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무지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 걸 이유라고 들이댄다. 그럼 ‘극도의’ 피로와 흥분의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당연히’ 노조간부면 열심히 파업준비를 했을 것이기 때문에 피로와 흥분상태임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이러한 철도공사의 주장은 초심 지노위 판정서에 모두 빠짐없이 인용됐는데 이는 전형적인 심리 미진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봐도 파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고 표면상으로 그 사유를 끼워 맞춘 이 어처구니없는 직위해제에 대해 행정법원은 “(원고들이) 피로와 흥분상태였다는 증거가 전혀 없고, 이를 확인조차 하지 아니했고, 파업 돌입 전날까지 정상적으로 근무했으므로 피로와 흥분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오히려 파업참여 여부가 직위해제 기준이 됐을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철도공사가 행한 직위해제는 파업을 저지하고 업무복귀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졌다”고 판시했다. 철도공사가 행한 직위해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확인시켜 준 것이다.

철도공사의 직위해제 사유에 대한 천박한 상상력과 그에 부화뇌동한 지방노동위원회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로 인해 한동안 파업에 참여한 철도노조 간부는 ‘극도의 피로와 흥분’으로 인해 직무수행능력이 부족한 자가 돼 버렸다. 다행히 중앙노동위원회와 행정법원이 정확한 심리와 판단으로 이를 바로 잡아 줘 다행이다(철도공사는 행정법원 4개 재판부에 배정된 직위해제 사건에 대해 대형로펌을 각각 선임해 소송을 진행했고 전부 패소하자 현재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아마 철도공사는 철도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려 할 때 이와 같은 직위해제를 또다시 남발할 가능성이 높다. 직위해제만큼 신속하게 심리적 압박을 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제 ‘불법파업 참여’, ‘극도의 피로와 흥분상태’ 모두가 정당한 직위해제 사유로 부정됐으니, 철도공사는 그 천박한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운 직위해제 사유를 만들어 낼 것이다. 설령 그 사유가 노동위원회나 법원에서 부정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철도공사는 파업참여를 최대한 저지하면 그만이고 그 후엔 대형로펌에서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