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약품 운반선에서 화학물질 등을 관리하던 선원에게 두드러기가 발병했다면 직무상 질병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비록 두드러기와 선원의 직무 사이의 인과관계를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할 수는 없어도 화학물질 접촉 외에 질병을 일으킬 만한 다른 원인이 없다면 직무와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정아무개씨(45)는 지난 2008년 8월 화학약품 운반선 1등 항해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정씨는 배를 타고 중동지역과 인도 등을 오가며 항해했다. 정씨는 화물전담 항해사로 화물창에 적재된 화학물질과 세정제를 점검하고 상태 등을 조사해 선장에게 보고하는 관리직이다.

정씨는 승선 후 30일이 지났을 때부터 온몸이 따끔거리는 증상이 나타나, 발병부위를 해수로 씻고 드라이기로 건조시키는 등 자가 치료를 하며 업무를 계속했다.



선원 “화학물질 관리가 두드러기 유발시켜”



그 후 온몸에 두드러기가 심하게 나타나 선내에 비치된 구급약품을 복용했으나, 증상이 더 심해져 결국 2009년 1월 하선했다.

정씨는 만성 두드러기 등의 진단을 받아 현재까지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 다른 선원들 중 물탱크 청소작업을 같이 한 김아무개씨에게도 피부가 따끔거리고 가려운 증상이 생겼으나, 곧 가라앉아 치료를 받지는 않았다. 그 외 세 명의 선원이 피부 이상증으로 약물을 복용했으나, 병원치료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앞서 정씨는 지난 2007년부터 2008년 5월까지 병이 발병한 선박과 유사한 다른 화학약품 운반선에 승선해 항해사로 일했다. 당시 정씨는 항해사가 통상 맡는 선장의 항해 보조를 맡았을 뿐 화학약품을 취급하지는 않았다.

두드러기 등 기타 질병도 발병하지 않았다. 이후 정씨는 같은해 8월 사건이 발생한 화학약품 운반선을 타기 위해 부산의 한 병원에서 승선 전 신체검사를 받았고, 모든 항목에서 정상으로 진단이 나왔다.



회사 “승선 전 유사질병 발병 가능성 있어”



정씨는 지난 2005년 알레르기성 접촉피부염 진단을 받은 적이 있으나, 이는 은행나무 열매와 접촉함에 따라 발병한 것이었다. 이후 정씨는 병이 발병한 화물선을 탈 때까지 피부질환으로 치료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씨는 “화학약품 관리, 화물탱크 청소 등의 업무가 두드러기를 초래해 해외취업 선원 재해보상에 관한 규정에 따른 직무상 질병”이라며,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회사는 정씨가 배에 승선하기 전부터 이미 유사한 질병이 발병했을 가능성이 있고, 정씨가 선박에서 수행한 업무 내용상 신체가 화학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맞섰다.



법원 “화학물질 외 두드러기 일으킬 만한 다른 사정없어”



법원은 정씨의 손을 들어줬다. 부산지법 민사합의9부(오경미 부장판사)는 최근 정씨가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회사는 정씨에게 1억1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만성 두드러기의 발생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이 사건 질병과 정씨의 직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하기는 어렵다”며 “정씨가 화학물질을 가까이서 취급하였다는 점 이외에 승선 중 두드러기를 일으킬 만한 다른 사정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화학물질 접촉이 정씨의 체질이나 유전적 특성과 결합해 질병이 나타났거나 증상이 악화됐다고 볼 여지가 많다”고 판단했다.



또 “회사가 주장한대로 정씨가 승선 전부터 유사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정씨가 수행한 작업내용을 따져 봐도 정씨가 작업 중 화학약품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유독성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