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0일이 넘었다. 금융노조 SC제일은행지부 파업투쟁이 40여일째다. 몇 차례 타결 직전까지 갔다 왔다. 그때 사측안의 문제점을 검토해 주고 합의안에 관한 의견을 지부에 주고 어떻게 타결했나 확인해 봤다. 아직 속초에서 숙식하며 파업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파업투쟁 중이다.

2. 개별성과급제·성과부진자퇴출 제도, SC제일은행 사용자는 이걸 도입하겠다고 요구하고 노조는 이걸 저지하겠다고 파업투쟁을 하고 있다. SC제일은행의 자본은 스탠다드차타드다. 영국에 그룹 본사가 있다.
 
본사가 파견한 영국인 SC제일은행장은 본사의 방침에 따라 경영하고 있다. 은행장은 근속에 따라 자동인상되는 한국의 연공급(호봉급) 임금제도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개별성과급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노조가 반대하는 게 이해할 수 없다고 성과부진자퇴출 제도를 올바른 것이라며 도입하겠다고 한다. 사용자는 근속에 따른 임금 및 인사 제도를 성과주의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영국처럼 하겠다고 한다. 어찌 보면 한국자본주의와 영국자본주의의 인사노무관리 제도가 지금 SC제일은행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 온 임금·인사 제도와 새로 선진적이라며 도입하려는 성과주의 제도가 낡은 제도와 새로운 제도로 취급돼 이 나라에서 충돌하고 있다. 사실 이미 성과주의는 수많은 사업장에서 도입됐다.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성과에 내몰렸고, 사업장에서 적법하게 퇴출됐다. 그동안 이 나라 노동자는 파업권 등 노동기본권 행사조차도 가로막는 후진적 인사노무관리로 고통 받아 왔다. 그런데 이제는 노동기본권 행사조차도 무력화하는 선진적 인사노무관리로부터도 고통 받게 됐다. 후진적인 제도 때문에 고통 받고, 선진적인 제도 때문에 고통 받는다. 도대체 성과주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찌된 일이기에 노동자에게는 이 선진적인 제도조차도 고통이란 말인가.

3. 성과주의 제도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개별 근로자의 성과에 따른 보수를 산정해 지급하고 인사관리를 하는 제도다. 그것은 개별 근로자를 상대로 업무를 평가하게 된다. 노조·단체교섭·단체협약이 노동자집단으로서 사용자와의 투쟁하고 교섭하고 협약을 체결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제도다.
 
만약 성과주의 제도 도입을 노조가 합의해 줬다면 그것은 노조로서 그동안 교섭하고 투쟁하고 협약을 체결해 왔던 사항을 포기하기로 합의해 준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해당 사업장은 노조 활동의 폐허지가 되고 만다. 성과주의 도입을 노조가 합의해 준 것이니까 그렇다. 영국식 또는 미국식으로 불리는 선진적 인사노무관리 제도란 무엇일까. 보다 많은 경영성과를 위한 노동자 관리를 위해 끊임없이 고안해 온 인사노무관리 제도를 말한다. 노동자들의 경쟁을 유도하고 개별 평가해서 보상하고, 성과부진자를 퇴출하는 제도가 경영성과·효율성을 높이는 인사노무관리 제도로 선진적인 제도다. 이걸 이 나라에서 도입하고자 한다.
 
이 제도에서 노동자는 성과의 도구다. 경영성과를 위한 기업의 생산요소로서 인적자원으로서 노동자만 존재할 뿐이다. 자본은 다른 생산요소와 마찬가지로 파악하고 산출에 대한 투입요소로서 노동자를 고려할 뿐이다. 보다 적은 비용을 투입하고서 보다 많은 산출을 뽑아낼 것이냐 하는 자본의 운동법칙에 따라 노동자라는 인적요소를 파악하고 인사노무관리 제도를 고안한 것이 선진적인 인사노무관리 제도라는 것이다.
 
왜 이것이 선진적이라는 것일까. 이 제도에서 노동자는 생산요소일 뿐 노동하는 인간은 없다. 이 제도에서는 노동자는 다른 생산요소와 마찬가지로 보다 낮은 비용이 투입돼야 할 요소이고 따라서 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하면 할수록 성과이고 선진적이다. 성과주의 제도는 바로 여기에 서 있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생산요소의 하나일 뿐이고 따라서 보다 낮은 비용이 투입될 대상일 뿐이다. 자본에게는 성과주의는 분명 보다 적은 비용의 투입으로 보다 많은 산출을 낼 수 있는 선진적인 인사노무관리 제도다.

4. 자본이 노동자를 생산요소의 하나로만 파악한다면 노동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과주의 도입에 노동자·노조가 합의해 준다면 이건 스스로 노동자를 생산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하는 인간이다. 노동하는 인간은 그저 말하는 생산요소가 아니다. 지금까지 노동자는 생산수단, 즉 고정자본에 결합시켜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요소로서 파악돼 왔다.
 
그래서 고정자본과 다른 생산요소는 아무것도 생산물을 산출할 수 없는데, 노동자의 노동으로 상품을 생산해 내니 새로운 가치를 산출해 내는 생산요소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건 자본의 눈으로 자본의 운동으로 이 세상의 생산과정을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는 자본의 운동법칙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세상은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확대재생산으로 파악되고 만다.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요소로서 대상으로서 노동자의 노동이 파악되고 만다.
 
그러나 노동자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자본의 눈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눈으로 봐야 한다. 노동자의 눈으로 이 세상의 생산과정은 생산요소를 노동하는 인간이 새로운 생산물로 창조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에게는 자본이야 말로 생산요소다. 자본이 생산요소로 변환되고 그 생산요소는 노동에 의해 생산물로 변환되고 생산물은 다시 자본으로 변환된다. 이건 자본의 운동법칙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과 반대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에게는 자본은 생산요소·생산물의 변환물이다.
 
자본이 노동자를 생산요소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처럼 이제 노동자는 자본을 생산요소로 파악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결국 이 세상에서 노동자의 투쟁은 생산요소의 취급을 둘러싼 투쟁이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나는 모른다.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노동자는 어떻게 봐야 할까만 말하겠다. 당연히 노동자는 자본이 생산요소, 생산물의 변환물 내지 변종일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 만약 노동자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건 스스로를 생산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진적인 인사노무관리 제도가 말하는 대로 노동자는 생산요소의 하나로, 경영성과·효율성의 대상으로 고려될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곳에서는 노동하는 인간은 없다.

5. 지금 SC제일은행에서 성과주의의 도입을 둘러싼 충돌은 이런 것이다. 노동자가 생산요소로 취급될 것이냐 아니냐. 생산요소의 하나로 파악하는 자본의 성과주의 논리에 맞서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파업투쟁으로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요소는 파업을 모른다. 생산요소는 (총)자본의 포로일 뿐이어서 이미 (총)자본에 전적으로 포박된 채 개별 자본의 필요시 그 지시에 따라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는 그저 복종하지 않는다. 파업을 하고 복종을 거부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는 그저 생산요소가 아니다. 아무리 자본이 생산요소로서 취급하더라도 노동자가 파업투쟁을 하는 한 노동자는 생산요소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니 성과주의 도입에 맞서고 있는 SC제일은행지부의 파업투쟁은 노동자가 생산요소가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이 아닌 인간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인사노무 제도도 노동과 자본의 이해가 대립하고 충돌한다. 이 대립과 충돌은 언제나 노동자를 노동하는 인간으로 주장하고 세우고자 하는 노동과 생산요소로 취급하는 자본 사이에 전개된다.
 
자본의 운동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노동자가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선언하는 것이 파업선언이고 노동하는 인간으로서의 주장이 파업투쟁이다. 자본주의 세상이 존속하는 한 이러한 선언과 주장은 계속될 것이다. 그 인간의 선언과 주장에 40여일째 전개되고 있는 SC제일은행지부의 파업투쟁이 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전개되고 있는 노동자의 파업투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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