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오랜만에 대중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희망버스를 두고 보수세력과 일부 개혁세력이 같은 입장을 보이니 말이다. 영미식 기업 중심 사회를 이상향으로 삼고 있는 보수세력과 유럽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개혁진영 일부의 공통분모는, 기업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정리해고는 정당하며 영도조선소는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 경쟁력에 관한 논의에서는 이들 사이에 큰 분별점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3자 개입이니, 영도구민들이 희망버스를 반대한다느니 따위의 저질비난을 제외하면, 희망버스에 대한 보수세력의 비판은 하나다.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는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유럽 조선소들이 한국의 조선산업 성장으로 구조조정을 겪었듯이 한국 역시 중국 조선산업의 성장으로 구조조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희망버스 비판에 동참하고 나선 개혁진영의 일부 지식인들의 주장도 비슷하다.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 소장은 영도조선소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며,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대한 반대는 진보진영의 희망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참여연대에서 재벌개혁 운동을 해 온 김기원 방통대 교수 역시 필리핀에서 번 돈으로 일이 없는 영도 노동자들을 먹여 살릴 수는 없으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나 가능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개별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피해는 국가적·산업적 차원의 복지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기업 경쟁력을 이야기하며 마치 기업의 주체는 조남호 일가와 경영진이고, 노동자들은 경쟁을 위해 내다 버려도 되는 존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보지 못한 것은 지금의 한진중공업과 조남호 일가의 부는 수십 년간 수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 쌓아 올린 것이라는 사실이다.

“변변한 안전장비도 없이 배를 만들며 수십 명의 동료를 산업재해로 잃었고, 반인간적 작업환경으로 현재 노동자들 대부분이 각종 질병을 앓고 있는 이곳에서, 19살에 들어와 30년간 죽도록 배를 만들었던 우리들이 왜 해고돼야 합니까?”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3차 희망버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진중공업은 조남호만의 것이 아니다. 기업 경쟁력을 위한 정리해고의 불가피성을 말하려면 왜 모든 부는 조남호 회장의 것이고, 모든 위기는 노동자가 책임져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먼저 답해야 한다. 왜 30년이 넘게 지금의 한진중공업을 만든 노동자는 기업에서 쫓겨나야 하고, 수십 억원의 배당금과 수억 원의 임원보수로 배를 불린 조남호 회장은 구조조정의 주체가 돼야 하는지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김대원 소장이나 김기원 교수는 기업 차원의 목숨을 건 정리해고 투쟁 대신에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 진보진영의 방향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옥쇄파업, 현대자동차 비정규 노동자들의 공장점거파업, 지엠대우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공농성,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 등이 있었기 때문에 해고 문제도, 비정규직 문제도 사회의제가 될 수 있었다. 복지국가는 전후 유럽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 끝에 얻어 낸 성과이지, 그럴싸한 정책과 적당한 타협을 목표로 한 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 진보 역시 대부분은 노동자들이 끈질긴 투쟁 끝에 쟁취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진보’의 수준은 멋진 의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얼마만큼 단결할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노동자들이 싸워서 이기는 만큼이 진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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