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정 성호 형.
늦게 시켜 먹은 자장면. 비닐도 뜯지 않고 급하게 단무지에 젓가락질하기. 길 가다 한 손에 잡은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다른 손으로 호주머니 뒤지며 “내 휴대폰 어디 갔지?”하며 낭패해하던 사오정.

10년 넘는 해고생활을 참 무던히도 버티면서 아침 출근투쟁하고 지역본부로 나오던 사람. 아침마다 김해공항에 가서 한진 계열사인 대한항공 김해지사 앞에 온 가족과 함께 장송곡 틀어놓고 출근투쟁하던 사람. 현장에서 급하게 요청하면 새벽 3시에 불러도 자다가 뛰어나오던 사람.

그런 형이 박창수 열사 만나 노동운동 하기 전엔 청바지에 도끼 빗 꽂고 음악다방 ‘죽돌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같은 남해가 고향인 고무공장 노동자와 만나 결혼해 쪽빛 바다 같은 딸, 아들 낳고 산다. 형, 언젠가 내가 말했죠? “예쁘고 슬기로운 예슬이, 슬기롭고 옹골찬 슬옹이 같은 아름다운 아이들 이름 지은 것도 다 노동운동 덕분”이라고.

지난 2월 크레인 밑에서 본 예슬이는 형만큼 키가 큰 숙녀로, 어릴 때 장난기 많아 사고도 많이 쳤던 슬옹인 얼마나 듬직한 사내로 자랐던지.

어쩌다 부산역에서 집회라도 있으면 아침 9시부터 노포동 부산지하철노조 창고에 보관한 무대 합판과 음향장비를 빼곡히 실어 1시간을 달려 갖다놓던 사람. 4단 아시바(비계·발판) 위에 대회 플래카드 붙이려 함께 올라가던 그 길이 참 좋았다. 집회 마치면 다시 장비 챙겨 1시간 넘게 지하철 창고로 가면서도 “그래도 장비를 넣어 둘 창고가 생긴 게 어디냐”고 기뻐하던 사람.

박창수·조수원·양봉수…. 90년대 유난히 많았던 열사투쟁에 늘 함께하는 바람에 우리는 안타까운 노동자의 죽음마다 “박성호 오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마라. 오면 다 다시 해야 하니까”라고 말하곤 했다. 지난해 23년 만에 치러진 창원의 고 정경식 열사 장례식 때도 20년 묶은 낡은 장례절차 파일을 옆에 끼고 어김없이 나타나 장지까지 따라가던 사람. 장(長) 자리라면 질식을 하면서도 부산경남울산합동추모사업회 회장은 군말 없이 받아들이던 사람.

박창수 위원장의 한을 풀겠다고, 김대중 정부가 만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올라와 뺀질한 서울내기들 틈에 끼여 몇 년을 보냈던 사람. 검찰과 국정원 파견자까지 뒤섞인 위원회에서도 늘 과장에게 “박 조사관만큼만 조사보고서 꼼꼼하게 작성하라”고 칭찬받던 사람. 사람의 지적능력이 가방 끈의 길이와 아무 상관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증명했던 사람.

서계동 금속노조 방에서 화투짝을 화장실 휴지통에 버리고, 자는 척 엎어져 활동가들에게 견결한 긴장감을 주던 사람. 2003년 입사 동기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을 강원도 출장 중에 듣고도 한달음에 달려와 빈소를 지키던 사람. 그 죽음으로 86년 김진숙·박영제·이진숙 등 잇단 해고에도 17년 동안 단 한 명의 복직도 허용하지 않았던 한진의 복직 문이 열렸을 때, 그 착잡한 심정을 속으로만 달래던 사람. 현장 복귀 후엔 전공을 살려 조선산업의 핵심인 선박엔진을 다루는 노동자라는 자부심으로 각종 사내제안도 하면서 정을 붙여 가던 사람.

그런 성호 형이 해고자 대표가 돼 85호 크레인 중간 턱에 올라섰다. 그 옆엔 김진숙 지도위원과 함께 해고된 뒤 지역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다가 복직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아 다시 해고된 박영제 형이 있다. 항상 어딜 가도 말 한마디 없이 앉았다가 경찰과 붙었을 땐 어느 틈에 맨 앞줄에서 싸우던 영제 형.

사오정 성호 형. 엊그제 전화에선 “용역들이 몰려올 때마다 사용할 무기가 없어 한쪽 구석에 밀어 뒀던 변을 유효한 무기로 사용한다”며 그 상황에서도 웃었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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