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적용 과정에서 투쟁 중심의 국내 노동운동과 노사관계 현실로 인해 자칫 특정세력이 이익달성을 위해 노동인권을 내세우면서 기업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20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기업의 인권에 관한 유엔 정책프레임워크 및 ISO26000 인권분야 심층분석’ 토론회에서 이형준 한국경총 노동정책본부장이 경계와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지난 6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승인된 ‘보호·존중·구제’ 프레임워크 이행과 촉진에 대한 특별대표의 이행지침(프레임워크 이행지침)을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논의하려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마련한 자리였다.

경총 “우리나라 노동인권 보호 우수” 강변

모두 31개 조항으로 이뤄진 프레임워크 이행지침은 국가의 인권보호 의무와 기업의 인권존중 책임, 구제책에 대한 접근성을 담고 있다. 이 중 기업의 인권존중 책임에는 노동자의 권리나 차별 문제 등 기업들에게 자사의 인권존중 상황을 파악해 청사진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이 본부장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이 본부장은 “협력업체가 생산 과정에서 인권을 침해한 경우 원청기업으로 하여금 취소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한 것은 실효성에 의문이 있다”고 했고, “기업활동이 인권을 침해할 상당한 위험성을 갖고 있는 경우 이해관계인들에게 정기적으로 공개·보고하도록 한 것은 기준이 모호해 남용의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협력업체의 인권침해를 걸러내는 것과 관련, 그는 협력업체의 규모가 영세해 실태파악이 거의 불가능하고 원청의 횡포나 불공정행위 등의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있어 원청기업들의 실천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 본부장은 이어 “우리나라의 비준 여부와 상관없이 국제노동기구(ILO) 8개 핵심협약상의 노동기본권을 존중하도록 하고 있는 점은 국내 법제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8개 중 결사의 자유 관련 2개, 강제근로 금지 관련 2개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그는 “국내 노동현실과 노사관계 현실을 고려한 정책적 판단이었는데도 이들 사항에까지 준수를 권고하는 것은 국내법질서와 정면 배치되는 것으로 사회적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가 노동인권 보호법령과 사법적 구제절차를 갖추고, 인권위나 노동위원회 같은 비사법적 구제절차를 구비하고 있어 노동인권 모범사례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뒤따랐다.

무노조 기업들 “등수 매기지 마라”

기업의 사회적책임(CSR)과 관련한 국제표준인 ISO26000 확정을 앞둔 2009년 국가인권위가 개발한 기업의 인권경영 자가진단도구도 기업들의 반발을 샀다. 자가진단지표에는 △균등한 기회와 차별금지에 대한 권리 △개인의 안전에 대한 권리 △노동자의 권리 △국가 거버넌스 및 인권존중 △소비자 보호의무 △환경 보호의무 등의 이슈에 따라 점수를 매기도록 돼 있다. 노동자의 권리는 결사 및 단체교섭의 자유·강제노동·아동노동 및 연소노동·산업안전보건·고용유지·적정보수·노동시간과 휴식·복리후생·교육훈련 등 세부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토론자로 나선 기업 관계자들은 강제가 아닌 자율적인 결정을 강조했다. 이정일 삼성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지나치게 많은 진단항목은 자칫 많은 부담을 야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수석연구원은 “각종 사회적 경영평가지표의 실천 여부에 대한 외부의 감시나 관심이 높아질수록 실제보다 성과가 과장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며 “부작용이나 데이터 왜곡·굴절 등을 최소화하고 예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이나 사회봉사활동 등 10여가지 사례를 들어 "삼성이 인권경영을 중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안윤기 포스코경영연구소 녹색성장연구실장은 “자가진단도구는 인권경영 또는 인권의 확산에 초점을 두고 등급화를 제외한 지침으로 활용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안 실장은 “인권은 주관적이고 정성적인 개념이고 경영은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정량적이라고 할 수 있다”며 “자가진단도구가 확산되려면 인권 또는 인권경영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 적용범위 등에 대한 합의 또는 협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토론회는 국가인권위와 한국생산성본부·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노동계 인사가 참석하지 않았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토론회에 초청받지 못했다"며 "기업인권을 얘기하는 데 노동계를 배제한 것은 현정부가 가지고 있는 인식 수준을 보여 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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