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남북 공동선언 11주년을 넘어간다.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연설은 피맺혔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강조한 그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남북관계를 좌초시키고 민주주의를 범죄로 만든 권력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고언은 오늘날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한반도의 현실은 이명박 정권이 만든 평화지수 제로 시계(視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대북 교역사업에 나선 이들의 손해가 평균 38억원이란다. 잘하고 있던 사업을 파산시켜 놓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비밀회담의 내용 공개까지 거론하고 있는 북의 자세 속에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혐오가 깔려 있다. 비밀회담까지 했다는 것은 나름의 대화의지를 밝힌 셈인데 그 과정과 이후가 이 모든 것을 마이너스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러는 사이에 미국과 중국은 북한과 좋은 분위기를 이뤄 가고 있다. 북으로서는 ‘꽃놀이패’다. 남쪽만 스스로 왕따 신세를 자초한 결과다. 두 개의 카드를 자유자재로 쥐고 있는 북과 그 카드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남의 처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누가 한반도 상황에 대해 여유 있게 대응하고 미래를 자기의지로 밀고나갈 수 있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은 이제 내리막길이다.

따라서 남북 관계를 푸는 책임은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고 있다. 한반도 상황이 풀리지 않는 것은 불만스럽지만, 이명박 정권의 손에 남북관계의 대업이 맡겨지지 않은 것은 도리어 다행이다. 평화의지가 있지도 않은 자들이 정략적 이용을 위한 도구로 뭘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현실적 실효성이 없다. 평화가 경제가 되는 것을 경험한 남북 접경지대의 주민들이 보이는 투표행위의 변화를 보라.

동아시아의 판도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일정한 정체, 그리고 이 사이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북한과 관망의 처지에 놓인 일본, 이런 모든 공간에서 무력해지고 있는 남한으로 요약된다. 사실 이러한 시기는 동아시아의 역사로 볼 때 남과 북이 자신의 여력을 최대한 활용해 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절호의 기회다.

미국이 한반도 상황을 압도하거나 중국이 일방적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시기도 아니며, 남이나 북이나 다 나름의 자율성을 가지고 국제관계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현실을 멀리 내다보면서 전망과 실력으로 다듬어 낼 의지와 자세가 있지 않은 권력의 존재에 있다. 시기도 놓치고 의지도 박약하고 사고도 굳어 있는 이명박 정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

6·15 남북 공동선언의 위력을 계속 진화시켜 왔다면 한반도 상황은 지금과는 당연히 달랐을 것이다. 평화로 이뤄지는 전쟁비용 감소와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여러 가지 가치는 우리 현실을 개선하는 데 막대한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당장에 반값 등록금 문제도 국방비 지출의 감소를 기초로 이뤄 낼 수 있는 정책대상이다. 금강산 관광도 국제화하면서 남북의 소득도 올라가고 개성 문제도 풀어내서 남북경제의 결속력과 공동번영을 이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좋은 대안을 외면한 채 북이 붕괴하기를 기다리는 식으로 남북관계를 대하니 뭐가 되겠는가. 상대에 대한 최대한 존중과 외교적 예를 갖추면서 현안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분단상황으로 인한 구조적 체제적 결손은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한 관심은 하나도 없는 권력이 임기가 끝나가면서 까지도 여전히 그런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하나 덧붙일 것은 진보진영 일부가 6·15 남북 공동선언의 의의나 가치에 대해 존중하지 않고 대북관계에 대한 인식의 혼란 상황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북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내세워야 진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민족의 처지에서 진보는 어떻게든 남과 북의 평화를 이뤄 내고 그걸 밑받침으로 해서 북의 내부적 모순도 해결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조건도 만들 생각이 없이 결과만 얻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보수정당조차도 대북 문제에 대한 발언과 정책은 대결주의적 자세가 아닌 쪽으로 가고 있는데 북에 대한 인식의 공개적 정책화를 진보의 미래에 관건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이명박 정권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이건 남북관계의 미래를 풀어 나가는 진보진영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6·15 남북 공동선언은 민족의 문제를 민족의 힘으로 풀자는 것이며, 이걸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함께 기울이자는 것이다. 남과 북은 서로 오해하고 엇갈리는 부분이 너무 많아 이를 해결하려면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잘해 나가면 그 열매는 풍성하고 달다. 이명박 정권은 곧 끝이 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이후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느냐다. 그걸 증명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진보진영의 결속부터 당장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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