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런 상상을 했다. 세상에 사람이 있고, 사물이 있다. 그러면 어떨까. 당신은 뭐가 어떻다는 거야, 그게 세상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사람, 그리고 그 밖의 것은 사물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그게 세상의 전부지 뭔 소리냐고 말할 것이다. 내 말은 이 세상에 사람 그리고 사물이 그대로 그냥 있는 거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물의 관계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도 이 세상이 이 세상일 것이냐, 아니면 저 세상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선 사람의 사람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없다. 채권법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에 대한 사람의 지배는 없다. 노동계약도 없으니 자본과 노동의 관계도 계급도 없다. 그런 세상에선 사람의 사물에 대한 권리도 없다. 물권법질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물에 대한 어떠한 사람의 독점적 지배는 없다. 소유권도 없으니 생산수단을 전유한 자도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자도 없다. 또 무슨 엉뚱한 상상이냐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또는 평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을 상상하는 날 뭐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상상해 봤다. 그랬더니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상은 더 이상 이 세상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물만 존재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물의 관계도 사라진 그곳에선 사물 앞에 맨몸으로 서 있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곳에선 사람은 자신의 노동이 바로 사물에 닿는다. 노동만이 사물에 대한 사람의 관계가 된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노동으로 사람에 닿는다. 노동만이 사람에 대한 사람의 관계가 된다. 복종과 지배가 아닌 사람의 위한 노동, 그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세상이 사람과 사물 그 자체만 존재한다면 사람의 노동만이 세상의 질서가 된다. 이것이 세상의 법질서가 우리를 덮지 않았다면 존재했을 세상의 질서였다. 그런데 어찌된 것일까. 이 세상은. 뭐란 말인가. 무엇이 이 세상을 이렇게 존재하게 했을까.

2. 본래 사람은 사물과 맨몸으로 존재했다. 그곳에선 사람의 사람에 대한 지배는 없었다. 그런 세상에도 말은 있었다. 즉 태초에 말이 있었다. 제사장이 말했다. 제사장의 말은 사물에 대한 사람의 말이었다. 그러다 사람은 사람을 지배하고 어느 사람이 사물을 독점했다. 그리고 사물의 독점이 사람을 지배했다. 이렇게 사람을 지배하는 자, 즉 권력자가 탄생했다. 제사장은 권력자 옆에 붙었다. 권력자의 입이 돼서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제사장은 사람들에 대한 권력자의 지배질서를 말했다. 그것이 세상의 질서라고 선언했다.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하고 소멸했다. 그에 따라 수많은 제사장들이 나타났고 사라졌다. 그러나 제사장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사실 권력자는 언제나 단순했다. 무기가 그의 도구였다. 그러니 제사장은 무기의 질서를 말의 질서로 합리화해야 했다. 그렇게 세상에 제사장의 말은 체계화됐다. 처음에 종교였으나, 다음엔 철학, 그리고 정치학과 법학·경제학 등 사회이론으로 체계적으로 분화돼서 나타났다. 그에 따라 수많은 제사장들로 분화됐고 그들은 종합적으로 세상의 질서를 옹호했다. 지금 이 세상의 언어는 그렇게 탄생했고 발전해 왔다. 이 세상에서 자본과 권력의 질서는 이렇게 제사장의 언어로 체계적으로 옹호되고 있다. 이제 제사장은 종교지도자·교수·기자·연구원 등 더 이상 하나의 직함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들이 제사장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그것만 살피면 된다. 세상은 변했어도 이 세상은 여전히 권력자의 무기와 제사장의 말로 구성돼 있다.

3. 제사장은 말했다. 하늘이 뭐라 말하는지를 인민이 알 수 없었을 때에는 권력자는 하늘의 소명을 받은 자라고 말했다. 그 뒤 인민이 하늘은 뭐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제사장은 이젠 권력자는 인민의 소명을 받은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민이 언제 자신들이 권력자에게 소명을 줬는가 하고 반발하자 투표함을 가져와서 선출했으니 인민의 권력이라고 말했다. 제사장의 말은 결론은 언제나 동일했다. 인민은 권력자의 지배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인민이 자신들이 권력자에게 권력을 준 것이니 이제 더 이상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제사장은 권력자에게 저들을 반역자이니 무기로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제사장은 인민에게 수시로 말해 왔다. 권력을 탐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불행의 원천이다. 온갖 종교의 언어로, 그 뒤 교양의 언어로 욕심을 버린 무욕의 상태에서 진정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욕심을 버려라. 끝도 없이 계속해서 제사장들은 지금까지 말해 왔다. 욕심을 버린 정신적으로 최고로 고양된 상태가 사람의 꼭짓점이라고 설교해 왔다. 세상의 사물, 무엇보다도 노동의 산물은 지배자·권력자의 것이 돼야 했으므로 노동하는 인민은 욕심을 버려야 했다. 그래야 권력자는 인민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인민의 욕망은 권력자를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인민이 욕망을 꿈꾸게 되면 권력자는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없게 되고 노동하는 인민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 인민이 욕망을 찾아 나서면 노동하는 인민의 노동을 빼앗는 이 세상의 지배질서는 그 추악함이 적나라하게 인민 앞에 드러난다. 윤리·도덕·공동선이니 사회적 가치니 뭐라 하는 이 세상에서 고상하다는 가치질서가 송두리째 거짓이라고 폭로되고 만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지금까지 그 언어는 달랐지만 언제나 노동하는 인민에게는 하나의 말만 했다. 욕심을 버려라. 욕망이 만악의 근원이다. 그러나 제사장은 권력자에게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인민의 노동을 빼앗는 그 욕심을 버려라. 그것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4. 지금 이 세상은 노동과 자본의 세상이다. 근로계약을 통해 노동자의 노동을 자신의 사업에 사용하고 그것으로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소유로 귀속시키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날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빼앗긴다. 이 세상에서 온갖 제사장들은 말한다. 노동자에게 욕심을 버려라, 욕망은 노동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니다. 이기주의를 버려라. 그리고 역사 이래 수많은 제사장들의 말까지 발췌해서 체계적으로 매일 신간도서로 발간하고 노동자에게 배포한다. 그래서 그들의 말들은 학교에서 교육되고 언론에서 보도된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날마다 자신의 노동이 빼앗기지만 욕심을 버린다고 난리다. 노동자는 욕망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신부 앞에서가 아니라도 가족·친구에게라도 날마다 뭘 변명하고 고해성사를 해 댄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빼앗기면서도 빼앗기는 것에 저항하지 않는 무욕의 사람이다. 도둑당하는데도 그냥 지켜보는 사람보다 더 무욕인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이미 그 심성은 너무 고귀하다. 그러니 간혹 노동자가 아닌 자가 그 심성에 감복해서 노동자의 길에 함께 하는 자들도 생긴다. 그런데도 날마다 제사장들은 계속해서 집요하게 떠들어 댄다. 욕심을 버려라. 그런데 자신들은 노동자만큼만 욕심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들의 욕심은 노동자의 것보다 훨씬 크다. 그럼에도 그들은 떠든다. 그러면서 그들은 노동자의 노동을 빼앗는 자본의 욕심, 자본의 질서에 대해는 자본가에게 그것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본의 욕심이 세상의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말은 제사장의 말들로 넘쳐나고 그 말들의 홍수 속에서 노동자와 활동가조차도 그 말들에 기댄다. 그래서 오늘 이 나라에서 노동활동가야 말로 제사장들이 말한 고상한 무욕의 가치의 실현자로 보인다. 공공이익·사회복지·환경·시민권·사회적 차별금지·사회적 약자 보호 등의 가치에 누구보다 쉽게 동조한다. 그러니 그들이 지배하는 노동운동은 이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권리를 획득한 노동자들이 자꾸 기득권자로 보이고 기득권을 버리는 것이 운동의 대의로서 추구한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이 세상의 질서에 맞서 노동의 질서를 세우는 운동이다. 그것은 노동자의 노동을 빼앗는 자본에 맞서 노동자의 욕망을 권리로 확보하기 위한 운동이다. 단체협약을 통해 그 권리를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해서 멈춰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에 맞서 노동자가 권리를 획득해야 하는 그 단위에서 자본의 몫으로 귀속되는 노동의 산물을 노동의 권리로서 확보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더구나 이 세상은 제사장의 말로 노동자의 권리가 확보될 수 있도록 질서가 구축돼 있지 않다. 노동자에게는 투쟁해서 욕망을 권리로 쟁취하도록 이 세상의 법질서가 구축돼 있을 뿐이다. 그러니 노동운동은 끊임없이 노동자를 욕망의 불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 만약 일정한 노동자에게 기득권을 양보하라, 그만 멈추라고 말한다면 그건 제사장의 말이지 노동운동가로서의 말이 아니다. 지금 이 나라 노동운동에서 필요한 것은 노동자의 욕망을 억누르는 제사장의 말이 아니다. 노동자의 욕망을 권리로서 확보하는 대로 나서게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노동운동가는 그 권리를 쟁취하는 단위가 어디냐를 불문하고 노동자의 욕망을 들춰내야 한다. 아무리 고상한 말이라도 제사장의 말은 노동운동을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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