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1주년이었다. 1886년 5월 미국 노동자들이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분노했다. 2011년 5월1일 이 나라 노동자들은 한국노총은 서울 여의도광장, 민주노총은 서울시청 광장, 그리고 전국의 주요 광장에서 분노했다. 헤이마켓 분노의 날로부터 125년이 지났다. 그 시간. 자본주의의 미국과 봉건의 조선 사이 장벽은 무너졌다. 이 나라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세상에 복속됐다. 이제 미국 노동자들이 125년 전 분노했던 자본의 세상에서 이 나라 노동자들은 살아가고 있다.
이제 이 나라 노동자들은 125년 전 미국 노동자들의 분노를 계승한다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광장에서 분노한다. 이 나라 노동자들은 미국 노동자들을 기념하고 분노한다. 그럼 이 나라 노동자들은 그들과 같이 분노하는 것일까. 지난 5월1일 서울의 여의도·시청 광장은 헤이마켓 광장과 같은 분노를 했던 것인가.

2. 1886년 5월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총파업하고 시위를 했다. 그런데 오늘 이 나라 노동자들은 무엇을 요구하며 광장에 서 있었는가. 노조법 개정. 그리고 최저임금 인상, 물가인상 정부대책 촉구 등을 붙였다. 전임자급여 지급·복수노조 자율교섭 보장이 노조법 개정 요구고, 민주노총은 여기에 산별교섭·단협해지 제한·손배가압류 제한·원청사용자성·필수공익사업 폐지를 추가했다.
미국 노동자들은 125년 전 세계 최초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 총파업하고 광장에서 분노했다. 그러나 이 나라 노동자들은 오늘 세계 최저의 노조법을 개정하기 위해 광장에서 분노했다. 미국 노동자들의 분노는 세계노동자들이 자신을 위해 지켜봤다. 그들의 권리가 쟁취되기를 바라며 그들의 분노를 지지하고 자신을 위해 희망했다. 그래서 국제노동운동은 1889년 그들의 투쟁을 세계노동자의 투쟁으로서 기념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90년 5월1일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투쟁을 기념하는 노동자의 날이었으므로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함으로써 이 분노의 날을 진정으로 기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 나라 노동자들의 분노는 어떤가. 세계 노동자들은 자신을 위해 이 나라 노동자들의 분노가 쟁취되기를 지켜보지 않았다. 이 나라 노동자들의 분노는 세계 노동자들이 자신을 위해 지지하지 않았다. 세계 최저의 노조법 개정을 위한 투쟁은 그들의 투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 오늘 이 나라 노동자들의 투쟁을 세계 노동자들은 기념할 수가 없다. 1886년 5월 미국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고 그것은 세계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일 수 있었다. 2011년 5월1일 이 나라 노동자들은 노조법 개정을 위해 투쟁했고 그것은 세계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일 순 없었다.

3. 1886년 5월 미국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자의 권리확보를 위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은 투쟁했다. 그 투쟁 앞에 미국의 노동자들은 단결해 분노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요구였으므로. 어떠한 미국의 노동자라도 8시간 노동제는 자신의 욕망이었고 그것이 권리로 쟁취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들은 총파업했고 그들의 분노는 광장에서 폭발했다.
전임자급여 지급. 복수노조 자율교섭 보장. 이 나라 노동운동의 요구로 될 순 있다. 그러나 이 나라 전체 노동자들이 총파업하고 노동자들을 광장에서 폭발하게 할 수 있는 요구일까. 산별교섭 법제화·단협해지 제한도 마찬가지다. 최저임금 인상, 원청사용자성, 필수공익사업 폐지도 전체 노동자의 요구는 아니다. 최저임금 수준의 노동자·사내하청 비정규직·필수공익사업장을 위한 요구다. 물가인상 정부의 서민대책 촉구는 서민생활을 위한 요구로 끼워 넣었다. 이렇게 오늘 이 나라 노동운동에서는 이 나라 전체 노동자의 권리확보를 위한 직접적인 요구는 없다. 그래서 이 나라 노동자는 자신들의 권리확보를 위한 요구가 아니라도 투쟁해야 한다고 하니 수동적으로 투쟁한다. 노동운동가는 노동조합 조합원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교육했다. 자신보다 열악한 노동자를 위해 연대하기 위해 단결해 분노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분노한다. 노동운동가는 노동운동은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이 나라 노동자들은 광장에 동원되고 의무로서 참석한다. 이렇게 요구가 이 나라 노동자에게 노동운동은 의무고 동원이 되도록 했다. 1886년 5월 전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미국노동자들은 분노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1년 5월1일 그들을 기념해서 전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이 나라 노동자들은 분노할 순 없었다.

4. 노동자의 행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욕망을 권리로 내걸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 노동자가 생존의 위협을 무릅쓰고 복종을 거부하고 투쟁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자신이 쟁취할 권리목록을 노동운동은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1886년 미국 노동운동은 자본과 권력에 맞서 노동자들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노동운동의 위대한 역사가 됐다. 노동운동가들은 8시간 노동제가 정치투쟁이 아니라고 폄하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이 나라 노동운동에서는 전체 노동자의 권리목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 놓고 노동운동가는 노동자들에게 투쟁하라고 한다. 자신들의 권리가 아닌 노동조합과 일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쳐다보며 살아간다.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때 가장 용감할 수 있다. 그때 노동자는 노예가 아닌 전사가 된다.
1886년 5월의 투쟁을 8시간 노동제는 숙련노동자의 요구라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비숙련노동자가 12시간 내지 16시간 혹사당하는 조건에서 그것은 그들에겐 꿈일 뿐이라고 말하며 10시간 노동제부터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며 그것을 이기주의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노동자에겐 보다 높은 수준의 요구야말로 보다 많은 노동자의 요구일 수 있고, 그것이 모든 노동자를 묶어 주는 요구다. 그래서 1886년 그들은 8시간 노동제 앞에 하나로 투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2011년 5월 이 나라 노동자들은 보다 낮은 수준의 요구가 노동운동의 대의라고 이것을 위해 투쟁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보다 낮은 수준의 요구만이 보다 많은 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이 될 수 있다고 온통 착각하고 있다. 비정규직·최저임금의 요구만 올바른 노동운동의 요구로 조합원에게 강요되고 있다. 엊그제 이 나라 노동운동의 광장에서 외쳤던 구호는 노조활동 보장이라는 노조의 권리와 비정규직, 최저임금 노동자의 권리 요구만 있었다. 이 나라 노동운동의 주력이라는 정규직 노동자의 행동을 촉구하는 그들의 권리요구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노동절이니 참석했고 동원됐으니 위원장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쳤을 뿐이다. 이런 그들이 어떤 분노로 총파업하고 광장에서 폭발시킬 수 있을까. 자신들의 어떠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가. 철저히 학습되고 훈련된 활동가는 언제든지 분노하고 폭발할 수 있지 모른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그 활동가만으로 전개될 수 없다. 노동자들을 행동하게 해야 한다. 당연히 노동자 자신의 권리확보를 요구로 내걸어야 노동자를 행동하게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은 보다 높은 수준의 요구를 내걸수록 많은 노동자를 그 쟁취를 위한 투쟁에 나서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쟁취할 수 없는 요구를 무턱대고 내걸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 시기에 쟁취할 수 있는, 보다 높은 수준의 요구로 전체 노동자를 투쟁에 나설 수 있게 해야 하고 그때 노동자는 하나일 수 있다. 노동운동이 일부 열악한 노동자에 해당하는, 보다 낮은 수준의 요구를 내걸면 내걸수록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에서 이탈시키고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노동자는 하나일 수 없게 된다. 사회적 약자타령하며 최하위 노동자들의 권리보호에 머물게 되면 노동운동은 사회적 약자가 아닌 노동자들은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그들에게 노동운동은 연대하라, 지원하라고 자꾸만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의식 있는 노동자는 그나마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이니까 노동운동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노동운동은 자꾸 자신들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평등이 노동운동을 가치라고 내세워 자꾸 그들의 욕망을 억누르게 되고, 그것이 노동운동에 무관심하게 하고 결국 노동운동에서 이탈하게 한다. 평등은 노동자의 욕망이 권리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전체 노동자의 권리확보로 제기돼야 하는 것이지 다른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으로 제기될 것이 아니다. 1886년 5월 미국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자의 욕망을 권리로 요구했고 그것을 위해 미국노동자들은 투쟁할 수 있었다. 2011년 5월1일 이 나라 노동운동은 이 나라 노동자 전체의 욕망을 노동자의 권리로 요구하지 못했고 그것을 위해 투쟁할 수 없었다.

5. 지금 이 나라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욕망을 깨워 노동자를 투쟁에 나서게 해야 한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이 나라 노동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없다. 당장 노동자의 욕망을 권리로 요구하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에 노동자를 깨워야 한다. 노동운동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노동자, 사회약자를 위한 사회 문제를 주된 목적으로 내걸고 전개된다면 그 노동운동은 그 사회의 대의를 위해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시민사회운동이 내거는 가치다. 노동운동이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그들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서 말할 순 있다. 만약 노동운동가가 그 가치가 진정 노동운동의 가치라고 여기고 있다면 시민사회활동가와 노동운동가는 뒤섞이고 그래서 어제는 시민운동가였다고 오늘은 노동운동가로서 활동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그들에겐 노동운동은 부분운동의 하나일 뿐이다. 노동운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약을 내건 정당과 연합하거나 연대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연합 또는 연대를 위해서 노동자의 권리 요구를 낮추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운동을 분열시킨다. 노동자의 권리를 시민사회운동이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인 일부 노동자의 것으로 요구함으로써 나머지 노동자를 배제하고 이들을 노동운동에서 이탈시켜 노동운동을 전체 노동자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지금 이 나라 노동운동과 1886년 5월 미국 노동운동을 가르고 있다. 이것이 이 나라 노동운동이 메이데이를 기념하면서도 진정 노동자의 투쟁으로서 분노의 날로서 기념하지 못하게 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