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보험의 쌍두마차인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은 요즘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고용보험은 실업급여 지출이 크게 늘어 올해 보험료율을 0.2%포인트 올렸다. 반면 산재보험은 요양급여(치료비) 지급이 줄면서 올해 보험료를 1.7% 수준으로 인하했다. 재정고갈이 우려되는 고용보험과 달리 산재보험은 전년도 1년치 보험급여 총액에 해당하는 법정책임준비금을 확보하고도 지난해 말 현재 2조원대의 여윳돈이 있다.

하지만 산재보험기금 수지개선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산재보험은 노동자가 업무상재해를 당하면 근로기준법상 재해보상 책임을 지는 사용자를 대신해 국가가 보상을 해 주는 시스템이다. 보험료를 사업주가 100%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재보험이 흑자를 낸 것은 사용자로부터 걷은 돈에 비해 재해를 입은 노동자에게 쓰는 돈이 적었기 때문이다. 최근 노동계가 산재보험 개혁을 요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1조원대 흑자의 비밀

24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산재보험기금이 흑자로 전환된 것은 2006년부터다. 산재보험기금 재정수지를 보면 2003년 순수입 2조7천억원, 순지출 2조9천억원으로 2천억원 가까운 적자를 냈다. 이 같은 적자 폭은 2005년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산재보험 요율이 대폭 인상되면서 2006년 산재보험기금 수입은 4조원대를 넘어서게 됐다.

당시 노사관계의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가 근골격계질환이었다. 한국경총을 중심으로 한 경영계는 산재환자의 도덕적 해이를 집요하게 문제 삼았다. 이로 인해 근로복지공단은 2005년 ‘찾아가는 서비스제도’를 도입했다. 공단 직원이 산재환자를 직접 찾아가 적정하게 요양하고 있는 지를 살피는 제도다. 현장 중심의 서비스 를 강화하고 산재환자의 직업·사회 복귀를 돕겠다는 취지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산재환자의 요양기간 단축과 치료종결로 보험료 지출을 줄이는 효과를 낳았다. 찾아가는 서비스제도(2009년부터는 맞춤형 서비스제도)가 도입된 후 산재환자의 치료종결을 의미하는 평균 사회복귀 기간은 2006년 251.7일에서 2009년 184.6일로 67.1일이나 감소했다.

보험급여 지출의 더 큰 변화는 2008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전면 개정과 함께 찾아왔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도입과 뇌심혈관계질환과 근골격계질환 인정기준 개편은 산업재해 인정의 진입장벽을 크게 높였다. 지난해 업무상질병으로 산재요양을 신청한 노동자 10명 중 6명이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한국노총이 지난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현황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뇌심혈관계질환 산재신청 2천780건 가운데 불승인율은 85.6%(2천379건)에 달한다. 법 개정 이전인 2007년 뇌심혈관계질환 산재 불승인율 44.7%(1천557건)보다 2배나 증가했다. 근골격계질환의 산재 불승인율도 2007년 44.7%(1천557건)에서 지난해 52.3%(3천221건)으로 껑충 뛰었다.

임성호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 국장은 “산재보험법 개정 이후 뇌심혈관계 질환 불승인율이 85%에 달한다는 것은 사실상 뇌심혈관질환을 업무상질병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의미”라고 꼬집었다. 업무상질병 인정이 어려워지면서 산재환자의 치료비인 요양급여는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2008년 19만119명의 산재환자 치료비로 8천1억7천100만원이 지출됐는데, 지난해에는 18만2천545명의 산재환자에게 7천665억3천500만원이 지출됐다.<그래프 참조>
 


업무상질병 불승인율이 증가한 2008년 산재보험기금 재정수지는 1조원이 넘는 흑자를 달성했다. 수입은 5조2천987억원이었는데 지출은 4조1천846억원으로 1조1천141억원이 남았다. 2009년에도 1조290억원의 흑자행진을 이어 갔다. 보험료율이 동결된 2010년에는 보험료 수입이 2009년에 비해 감소해 재정수지 차이가 6천967억원 수준으로 줄었다. 하지만 산재보험기금 적립금 규모는 5조5천569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어떻게 쓸까’를 논의할 때

지난해 12월 말 노동부는 올해 62개 업종에 적용될 산재보험 평균요율을 보수총액의 1.77%로 결정해 고시했다. 전년보다 0.03%포인트 인하됐지만 실제 납부할 보험료로 환산하면 약 1.7% 수준으로 인하됐다. 노동부는 "최근 산재 보험기금 재정수지가 흑자인 데다 취업자수 증가로 보수총액이 늘 것으로 예측돼 요율을 낮췄다"고 말했다. 산재보험료는 2009년(보험료율 1.95%) 전년보다 7.7% 가까이 인하된 뒤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결과적으로 보면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인 보험급여 지출을 아껴 사용자 부담인 보험료를 깎아 주고 있는 모양새다.

때문에 노동계는 “산재보험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임성호 국장은 “노동자가 산재신청을 하는 것은 스스로 업무관련성이 크다고 느끼기 때문인데 지난해 업무상질병 불승인율이 64%에 달하고 있다”며 “현행 업무상질병 판정제도는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는 “산재보험기금이 안정화됨에 따라 그동안 단지 돈이 없어 직업관련성 사고와 질환 범위에서 제외됐던 출·퇴근재해나 직업성 암까지 인정범위로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업무상재해 인정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적용대상 폭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임준 가천의대 교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취업자 가운데 60%만 산재보험을 적용받고 있다"며 "적용대상을 확대하고 보장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산재보험이 법적으로 5인 미만 사업장까지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농업 등 업종에 따라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다수 존재한다. 공사금액 2천만원 미만 소규모 건설현장이나 음식점 종업원으로 많이 근무하는 무급가족종사자 등은 산재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또 특수고용직의 경우 보험료를 사업주와 절반씩 부담해야 하고, 임의가입이 허용돼 산재보험 가입률이 10%도 채 되지 않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노동부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비롯해 미흡한 부분에 대한 보완책을 검토하고 있지만 산재보험기금 운용이나 보상제도 개선 전반에 대한 개편은 충분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노동부와 양대 노총·경총 실무진들은 질병판정제도와 뇌심혈관계질환·근골격계질환·직업성 암 인정기준·장해평가기준 개선방안에 대한 논의를 벌이고 있지만 노사 간 대립은 물론 노노 간에도 미묘한 입장 차가 있어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25일 국회 의정관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공동으로 '수렁에 빠진 산재보험 이대로 둘 것인가' 정책토론회를 개최해 관심이 모아진다. 산재보험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산재보험 책임준비금제도, 미래세대에 비용전가
연금수급자 늘어 세대 간 형평성 논란 커질 듯
 산재보험은 업무상재해로 사망할 경우 유족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산재노동자가 장애를 입거나 치료기간이 2년이 넘도록 완치되지 못할 경우에 연금을 준다. 70년 연금제도가 도입된 뒤 연금수급자는 매년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2005년부터는 산재보험급여에서 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그런데 산재보험 재정운영방식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산재보험급여에서 연금비율은 2003년 15.3%(2천666억원)에서 2009년 33.4%(1조1천566억원)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보험급여에서 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면 산재 발생과 보험료 지출이 따로 노는 경향이 나타난다. 사업주가 산재예방 노력을 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특히 산재보험기금 재정운영방식은 논란거리다. 우리나라 산재보험 재정운영방식은 일정규모의 책임준비금만 적립하면 되는 수정부과방식이다. 현재 법정 책임준비금은 전년도 1년치 보험급여 총액에 불과하다. 연금비중이 높아지면 산재를 발생시킨 사업주와 그 산재로 인해 보험급여를 부담하는 사업주가 달라진다. 세대 간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산재보험 적립기준을 변경하거나 재정운영방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하지만 당장 보험료 인상요인이 큰 탓에 경영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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