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정규직노조가 문제다. 언론은 현대자동차노조가 자녀 채용 특혜를 단협요구안에 포함시켰다고, 비정규직·청년실업을 외면한 정규직노조 이기주의라고 보도했다. 1면 톱기사로 뽑아 몇 개면에 걸쳐 다룬 신문도 있다. 엊그제 한겨레·경향·매일노동뉴스 등 진보언론에서 보도했고 이를 쫓아 보수언론이 달려들었다. 또 노조를 밟아 대나. 이런 생각이 확 들었다. 정규직노조 이기주의가 도를 넘었구나. 이런 생각이 아니라. 어찌하여 내 머리는 자꾸 이 나라 진보언론과도 다르게 돌아가는 걸까. 이것이 나를 괴롭혔다.

2. 이 기사들은 오늘 진보세력의 머릿속을 단층촬영해 보여 줬다. 진보언론은 진보세력을 대변한다. 진보세력은 그곳에서 사고하고 말한다. 도대체 그들에게 적과 우리를 가르는 경계는 어딜까. 그들의 머리가 궁금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그어져 있는 걸까. 이 진보언론이 야권연합을 외치고 민주당을 비판적 지지해 온 것을 보면 그런 거 같지 않다. 한나라당·재벌과 야권·중소기업 사이 어디에 그어져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어 왔다. 그런데 오늘은 전자의 초극좌파로 태도를 돌변했다. 재벌체제를 비판하다 보니 재벌기업 노동자도 비판하게 된 것일까. 사실 오래됐다. 노무현 정권 땐 대통령이 말을 하고 다녔다. 대기업 정규직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조합원 권리를 챙기려는 정규직노조의 교섭과 투쟁을 귀족노조의 이기주의로 마구 매도했다. 그리고 진보세력의 머리는 돌았다. 재벌기업 정규직은 약자가 아니고, 재벌기업과 한편 먹는 자다. 그러니 대기업 정규직노조의 행동을 지지하기 어렵다. 그들의 머리는 이렇게 돌아갔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후려친 것의 일부가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복지·고용보장에 사용된다. 그래서 정규직의 임금·복지·고용보장을 요구하고 챙기는 대기업노조는 문제다. 후려친 중소기업 납품단가로 중소기업 사장이 받는 고통도 알고 보면 제 밥그릇 챙기는 정규직노조에도 책임이 있다. 특히 비정규직 보호에 소극적인 그들은 이기주의자다. 이렇게 머리가 정리되자 그들은 정규직노조가 미웠다. 비정규직을 위한다고 말하는 자신들은 진정 진보다웠다. 정규직노조를 비판하는 것이 진보세력으로서 당당한 소임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양심상 대기업 정규직노조를 비난하는 조중동과 한경 등 경제지를 적극적으로 비판해 대기업 정규직노조를 옹호할 순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사회 불공정·부당한 불의목록에 대기업 정규직노조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세상은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후려치지 않는, 독점의 폐해, 즉 독점자의 싹쓸이가 없는 공정한 자본주의시장질서가 보장되는 세상이다. 그러니 대기업 정규직노조가 방해물로 보인다.
그러면 뭐가 되나. 나는.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정규직노조에게도 조합원권리 확보를 투쟁해야 한다고 외쳐 온 나는 정규직노조의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자가 되는 것인가. 공정한 시장질서를 방해하는 불공정한 자가 되는 것인가.

3. 노동편인 자들도 비난한다. 김영경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확대가 대기업노조 때문이라는 보수 주장에 더 이상 아니라고 대응할 수 없을 거라 하고, 윤애림 불안정고용철폐연대 정책위원은 대기업노조가 자기 이득 챙기기에만 매몰되면 노동운동은 대중에게서 철저히 외면을 거라 말했고, 이병훈 교수는 청년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서 자기들 조합원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기업노조의 실리주의가 노조에 대한 사회적 불신을 한층 더 심화시킨다고 전망했다.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확대가 대기업정규직노조 때문인가. 정규직노조가 청년을 채용하지 않고 비정규직을 고용해 왔는가. 우리는 노동자 고용은 자본가가 독점권을 갖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세상의 법은 그것을 전제로 세워졌다. 법원은 날마다 그렇다고 판결하고 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대기업 정규직노조의 이기주의를 말한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어서다. 대기업이 줄 수 있는 ‘파이’, 즉 정규직 고용과 처우를 위한 몫은 정해져 있다. 이 파이를 정규직에게 이미 다 줘 버렸기 때문에 대기업은 청년을 신규채용하거나 비정규직에게 나눠 줄 파이가 없다. 정규직이 양보해야만 신규채용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 정규직노조는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의 궁극적 원인은 정규직노조에 있다. 이런 생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아니다’라고 감히 대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물러서는 것이다. 자기 이득 챙기기에만 매몰돼 대중에게 외면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노조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한층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는 전망으로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의 요구안을 비난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과연 이 나라에서 ‘파이’가 청년을 실업자로 전락시키고 비정규직을 고용할 수밖에 없는 정도일까. 그러면 해마다 이뤄지는 자본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이익배당 등 분배는 어떻게 설명할까.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거대한 투자는 어떻게 설명할까. 회사의 생산물은 모두 자본의 몫이고 자본의 소유다. 결국 자본의 권리로서 노동에 대한 권력으로 재생산된다. 우리의 세상은 자본만이 소유자·권리자가 되고 결국 권력자로서 노동자를 복종시키며 세상의 주인이 된다. ‘파이’가 없다면 이 세상은 벌써 저세상이 됐다. 문제는 ‘파이’가 자본의 것으로만 귀속되는 세상이 날마다 재생된다는 것이다. 이 ‘파이’를 보지 않고서, 이 ‘파이’는 당연히 자본의 몫이고 권리라고 제외하고서 말한다면, 결국 정규직의 몫을 나눠 청년을 채용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할 수 있다고, 그러니 정규직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규직노조가 문제라고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정 불의로 이 세상을 사고하는 진보세력의 머릿속에서만 정당할 수 있는 비난이다. 임금교섭 때면 사용자가 해 왔던 주장이다. 자본이, 그 대변자들이, 그리고 그들의 언론이 파이를 말했고, 노무현은 그들을 대변했다. 그들은 귀족노조라고 노동운동을 철저히 고립시켰다. 대기업노조가 조합원의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고립시킨 것이다. 그런데도 정규직노조가 판단력을 상실하고 공공이익을 망각했다며 온통 이기주의가 문제라고 말해 댄다. 말은 정확히 해야 한다. 그 말에 대중이 녹는다. 만약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해서 대중과 사회여론으로부터 노조가, 노동운동이 고립된다면 그것은 그 대중과 사회여론을 주무르는 그들이 고립시킨 것이다. 노조가,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해서가 아니고.

4. 현대자동차지부는 “신규채용시 정년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자녀에 대해 채용규정상 적합한 경우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 단, 가점 부여 등 세부적인 사항은 별도로 정한다”고 협약안을 마련했다. 1만명의 사내하청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 안을 사측과 협약으로 체결했다면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정년까지, 25년 이상 근무해 온 조합원(생산직·영업직 등이다)은 교육받은 후 현대자동차에서 평생 일해 왔다. 생산직은 1일2교대로 이번주는 주간조, 다음주는 야간조로 매일 10시간 넘게 일해 왔다. 그들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밖에 모른다. 비난하는 자는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들여다봐야 한다. 비난하는 자들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이 세상은 그들을 철저히 일의 노예로 만들어 부려 왔다. 그들의 자식조차도 거의 대부분 노동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그들이 이제 노동력이 고갈됐기 때문에 세상에서 폐기된다. 가장 왕성하던 생명의 시간과 활력은 모두 회사에 바쳤다. 그것으로 회사는 성장했다. 그들의 노동의 생산물은 자본의 권리라며 자본의 몫으로 귀속됐다. 회사는 자본의 소유이고, 회사의 운영과 운명은 경영권이라고 해서 그들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25년 이전에 입사할 때 회사는 10에 불과했고 그것은 자본의 소유였다. 25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노동을 바쳐 회사는 1,000이 됐고 그것은 모두 자본의 소유다. 자본은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상속한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 법이라고 질서라고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한다. 그러니 노동자는 그냥 복종하며 폐기당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 그들의 생명의 활력을 모두 바쳐 세운 회사에 자식이 자신과 같은 공돌이·영맨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기주의라고 비난한다. 자동차생산라인에서 단순노동의 기계로 살아온 노동자가 자신의 자식을 자신처럼 기계로 살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자본은 채용권을 침해한다며 거부하더라도, 진보세력이라는 그들이 뭐라 해도 노동운동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 대를 이어 자식까지 바치겠다는 노예계약이 무슨 특혜란 말인가. 부끄러워할 요구가 아니다. 언론사에 익명의 노동계 관계자가 요구안의 문제점을 담은 의견서를 보냈다. 노조활동가라면 조합원의 권리 확보를 위한 요구를 제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노조에 왜 자본의 지분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 거냐고 해야 한다. 상승의 통로가 막힌 채 철저히 노예로 복종하며 조합원은 25년 이상 일해 왔다. 조합원을 위해 왜 자본의 소유와 권리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느냐고 지부에 요구해야 한다. 회사의 운영과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노동자에게도 달라고 하지 않느냐고 해야 한다. 지금 이 나라 노동운동은 조합원 권리를 더 확보하겠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대중과 사회여론의 눈치를 보며 지탄받는다며 조합원을 위한 요구안을 지탄하고 있는 게 문제다. 비정규직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부에 “회사는 … (중략) … 사내 비정규직의 차별을 철폐하며, 비정규직의 단계적 축소를 통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적극 노력한다”는 현재 요구안을 뭔 ‘적극 노력’, 그것도 협약이냐고 지적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보장할 요구안을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지부가 듣지 않는다면 의견서를 언론사에 보낼 수도 있다. 현대자동차의 활동가로서 특혜라며 요구안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은 비정규직 보호라는 대의를 말한 것이지만, 조합원의 권리 보호를 외면하는 자로 조합원에게 인식된다. 조합원을 외면하면 조합원은 결국 활동가를, 노동운동을 외면하게 된다. 조합원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활동가가 아닌 다른 자를 노조간부로 세울 수 있다. 심지어는 자본과 결탁한 자, 나아가 자신의 권리만 보장된다면 자본에 기대게 된다. 노동운동의 종말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조합원에게, 노동자에게 활동가가 자신의 권리를 외면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줘서는 안 된다. 이것을 무시하는 순간 어떠한 대의와 이념을 내세워도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당신의 무덤이 된다. 조합원에게, 노동자에게 활동가가 자신의 권리를 위한 자일 수 있어야 이 나라 노동운동이 살아날 수 있다.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투쟁을 승리로 이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와 자녀 채용가산점 부여 요구가 택일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것이 바로 지금 노동운동이 극복해야 할 지점이다. 그것을 넘어서야 이 나라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특혜’를 쟁취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자본의 ‘특혜’도 폐지할 수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