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무개씨는 서울의 한 전자회사 대표이사(사장)였다. 하씨가 이 전자회사와 인연은 맺은 것은 지난 95년이다. 차장을 시작으로 계열회사로 자리를 옮겨 부장으로 진급했고 5년 만인 2002년 말에 상무로, 다시 이듬해 2월에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그리고는 2008년 모회사인 전자회사가 하씨가 대표이사로 있던 계열회사를 합병하면서, 새로 출범한 회사의 대표이사가 됐다.

하지만 하씨의 승승장구 일대기는 2009년 마감했다. 2009년 10개월여의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것. 불행은 겹쳐 왔다. 퇴직 후 하씨는 간암이 발병해 결국 목숨을 다했다. 유족들은 하씨가 업무상재해로 사망했으니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해 달라고 근로복지공단에 요청했다.

산재보험 신청한 대표이사 유족

유족의 얘기는 이 회사에 근무하면서 하씨가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그 때문에 퇴사 뒤 간암이 발병해 사망했다는 것이다. 업무 관련성이 있으니 업무상재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공단은 유족급여 등의 지급을 거부했다. ‘망인은 주식회사의 대표이사로서 근로기준법상 사용자에 해당하고 산재보상보험법에 따른 보호대상인 근로자가 아니다’는 이유였다.

다툼은 법정으로 번졌다. 서울행정법원(재판장 이진만)이 인정한 사실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하씨는 분명히 이 회사 대표이사로 근무하다 퇴직했지만 하씨가 근무했던 모든 회사의 실제 소유주는 박아무개씨다. 하씨가 대표이사로 취임한 것도 소유주인 박씨의 요청 때문이었다. 박씨의 회사 지분은 69.71%였고, 나머지 지분도 동생과 자녀 등 특수관계인이 모두 소유해 하씨의 지분은 전혀 없었다.

하씨는 다른 직원처럼 오전 8시30분까지 출근했고, 거래처 접대가 잦아 퇴근시간도 일정하지 않고 토요일에도 출근했다. 박씨는 일주일에 3~4회 회장실로 출근했고, 회장이 업무를 지시하거나 보고를 받았다. 하씨는 반드시 회장의 결재를 받았고, 월 1회 업무와 실적 보고회의에서도 그는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했다. 회사의 자금은 박씨의 조카가 관리했는데, 하씨는 전혀 관여할 수 없었다. 하씨는 경영성과나 업무성적에 따른 보수를 별도로 받는 대신 급여를 받았고, 4대 사회보험료도 원청징수됐다. 퇴직할 때는 직원처럼 퇴직금도 받았다. 사실상 ‘바지사장’이었던 것이다.

종속 관계에서 근로제공 여부가 핵심

법원은 이런 사실을 근거로 하씨가 산재보상보험법으로 보호받아야 할 ‘근로자’라고 판단했다. 대표이사로서의 지위는 형식적·명목적인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실질 경영자인 박씨에게 근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일정한 보수를 지급받아 왔다는 것이다.

법원은 “근로자 해당 여부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하여야 할 것”이라며 “법인등기부에 임원으로 등기되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할 것은 아니다”고 판결했다. “산재보험급여 대상자로서 근로자인지 여부는 오로지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난다”며 내린 결론이다.

법원은 이어 “주식회사의 대표이사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라면서도 “대표이사로 등기되어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대표이사로서의 지위가 형식적·명목적인 것에 불과해 의사결정권자인 실제 경영자가 따로 있고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으로 보수를 지급받았다면 예외적으로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련 판례]
서울행정법원 2010구합24944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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