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삶에 지쳐 자신감과 의욕이 떨어질 때면 노량진 수산시장을 방문한다고 하지만 필자는 이 같은 욕구를 공단에서 풀곤 한다. 분주히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햇빛에 빛나는 순간, 그들 사이에 오가는 다소 거친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로부터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충전받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는 공단으로 출장을 나가면 시간을 내 한가로이 거리를 거닐곤 하는데, 몇 년 전부터는 공단에도 새로운 풍경들이 나타나고 있다. 시끄러운 기계음과 자동차 소리 사이로 알 수 없는 외국어들이 섞여 나오고 거리에는 검은 피부, 노란머리의 외국인들이 어우러져 흡사 외국의 거리에 서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단의 이국적인 풍경은 이제 새로운 이야깃거리도 아니다. 이주노동자의 수가 70만명을 넘어선 요즘에는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단에서 이와 같은 광경은 너무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이제 다양한 국적의 노동자들과 부대끼며 길을 걸어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을 정도다. 이처럼 이주노동자들은 어느 순간 우리의 삶에 자연스럽게 다가온 것이다. 이들 중에는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가정을 이룬 이들도 적지 않으며, 어떤 이들은 김치찌개나 삼겹살을 한국인들보다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들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주노동자들은 그저 한국의 부족한 노동력을 단기적으로 충당하는 ‘이방인’일 뿐이다. 정부 역시 경제적 논리에만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이들의 정주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만 힘을 기울일 뿐 이들이 한국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다가 돌아갈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고민하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몇 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였는데 자기 동생의 일로 상담을 원하고 있었다. 동생은 이제 갓 19살이 된 젊은이인데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도, 듣지도 못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바보가 됐다고 했다. 가뜩이나 서툰 한국어로, 흥분해 더듬거리는 그의 말을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참을 듣고 나서 필자는 그와 똑같이 더듬거리고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동생은 피아노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일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몸을 다쳤다. 여러 명이 피아노를 옮기고 트럭에 싣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피아노가 트럭에서 동생의 머리위로 떨어지면서 동생이 머리를 심하게 다친 것이다. 당시 동생은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피아노가 떨어지는 순간 어떤 한국인이 위험하다고 피하라고 외쳤다. 다른 한국인들은 이 소리를 듣고 모두 피했지만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 동생은 피아노에 그대로 깔렸다는 것이다. “옆으로 조금만 피했어도 다리나 팔만 다치고 말았을 텐데….” 어느새 그 불쌍한 형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소위 ‘3D 업종’이라 불리는 곳에서 한국인들이 싫다고 손을 놔 버린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기계조작법은 물론 한국어조차도 생소한 이들에게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일들은 ‘매우 더럽고, 매우 어렵고, 매우 위험한’ 일들로 변해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만지거나 흡입하지 마시오’라고 한국어(!)로 또렷이 쓰여 있는 화약약품들을 용감하게 맨손으로 만지다가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기도 하고, ‘정지’와 ‘작동’이라고 한국어(!)로 분명하게 쓰여 있는 스위치를 잘못 눌러 손가락이 잘리기도 한다. ‘위험 추락주의’라고 한국어(!)로 큼지막하게 써 있는 곳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다 떨어져 죽기도 하고, “위험해, 피해”라고 한국말(!)로 알려 준 동료들의 외침을 분명히 듣고도 피하지 않은 채 피아노에 깔려 식물인간이 된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이들에게는 목숨을 내놓고 견뎌야만 하는 힘든 나날인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주노동자들은 국내 기업에 취업하기에 앞서 반드시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고, 자국의 송출기관에서는 물론 입국해서도 취업과 관련한 교육을 받고 있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독자들도 예상하고 있듯이 그 시험과 교육이 실제 노동현실과 동떨어져 매우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에게는 한국의 수도가 서울이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나라라는 교육보다는 “위험해”라는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피하고 ‘추락’이라고 쓰인 곳으로는 가지 말라는 어찌 보면 단순한 교육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형형색색의 컬러판으로 출판되는 교육홍보 책자보다는 작업장에 붙어 있는 싸구려 안전스티커 한 장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다루는 물질이 어떤 물질이고 어떤 질병을 유발하는지 정도는 알고 일하자는 것이고. 최소한의 기계조작법이나 안전장치 정도는 알고 일하자는 것이고. ‘위험’이라고 써 있는 곳에서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일하자는 것이고. ‘위험하다’는 한국말이 들리면 피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일하자는 것이다. 필자는 거창한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변화를 위해 새로운 법률이나 제도를 만들고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의 제도 안에서도 정부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예산을 실질적으로 사용하려는 노력만 해도 가능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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