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날 그는 사라졌다. 30년간 이집트를 군림하던 왕은 달아났다. 이집트 민중으로부터 버림받는 순간 ‘파라오’는 더 이상 대통령일 수 없었다. 이날 법위에 군림하던 자가 법의 심판을 받게 될지 모르는 범죄자로 추락했다. 더 이상 무바라크는 중동전쟁의 영웅이 아니었다. 말로를 알 수 없는 추악한 독재자로 이날 이집트의 역사에 새겨졌다. 이날은 이집트의 2011년 2월11일이었다.

2. 2011년 1월25일 이후 세상의 광장은 타흐리르였다. 세계의 역사는 타흐리르에서 흘러갔다. 이집트의 타흐리르는 1789년, 1948년, 1871년 프랑스의 바스티유였다. 1905년, 1917년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그리고 1960년 대한민국의 광화문과 경무대 앞 광장이었고, 1987년 시청광장이었다. 그날 이후 2011년 2월11일까지는 세상 어느 광장도 타흐리르만큼 뜨겁지 않았다. 그 기간에는 오직 타흐리르만이 세계 역사의 첫 번째 광장일 수 있었다. 이집트 민중은 타흐리르에서 분노했고, 세계는 그들의 투쟁을 지켜봐야 했다. 이집트 민중은 타흐리르에서 꿈꿨고, 세계는 그들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마침내 타흐리르에서 그들의 분노는 이집트의 분노가 됐고, 타흐리르에서 그들의 꿈은 이집트의 꿈이 됐다.

3. 18일 동안 범죄자는 해방자가 됐다. 법 집행자는 범죄자로 됐다. 타흐리르에서의 민중의 폭력과 불법은 이집트에 존재하는 모든 법을 뛰어넘어 위대한 시민행동이 됐다. 타흐리르에서의 민중의 폭력과 불법은 법집행자 경찰을 범죄자로 또는 범죄자의 공범자로 만들었다. 타흐리르에서 한 사람일 때 그의 행동은 불법과 범죄였다. 열 사람일 때 그들의 행동은 더 이상 불법과 범죄일 수 없었다. 백 사람일 때 그들의 행동은 위대한 역사가 됐다. 언제나 그랬다. 프랑스의 파리에서도,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에서도, 대한민국의 서울에서도 그랬다. 그렇게 민중의 분노는 범죄에서 역사로 됐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청소가 시작됐다. 이미 이집트의 광장에서 민중의 피는 지워지고 돌맹이는 치워지고 있다. 1960년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독재자가 물러가자 광장은 텅비어가고 있다. 돌맹이가 사라진 ‘해방’의 광장은 노래와 춤으로 승리를 자축하는 ‘축제’의 광장으로 변했다. 이제 어제 민중의 불법을 질타하던 권력과 언론은 민중의 행동이 위대했다고 떠들어대고 이집트의 평화와 안정, 번영을 말할 것이다. 그래서 타흐리르는 서울광장처럼 무심한 관광객들로 채워질 것이다. 타흐리르는 질서와 안정, 번영의 선전 구호가 나부끼는 서울광장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 타흐리르의 운명이다. 타흐리르의 미래다.

4. 무바라크가 사라진 타흐리르 광장에서 이집트의 거리에서 민중은 꿈을 꾸지 않는다. 이집트 민중은 타흐리르에서 오직 무바라크 타도를 꿈꿨다. 독재자는 물러났고 이집트 민중은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지금 이집트에서 타흐리르 광장에서 민중이 또 다른 꿈을 꿀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아직도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집트에서 노동운동이 어떠했고 그래서 이번 항쟁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으며 무바라크가 물러난 이집트가 노동의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자신의 꿈속에서 이집트를 보고 있는 자임이 분명하다. 타흐리르에서 이집트 민중은 노동의 꿈을 꾸지 않았다. 현대의 파라오를 쫓아낼 꿈을 꾸었을 뿐이다. 그래서 무바르크가 도주하자 그들은 꿈이 실현된 것을 자축하면서 돌맹이를 내려놓고 광장을 청소했다. 바로 이것이 이집트고 바로 오늘의 우리 세계다. 민중은 노동의 꿈을 꾸지 않는다. 물론 이집트에서 이번 항쟁을 계기로 노동자의 투쟁이 거세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임금인상을 위한 것이지 노동의 꿈을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 투쟁의 대상은 이 세계에서 꾸는 꿈이지 이 세계를 넘어서는 노동의 꿈이 아니다.

5. 오늘은 꿈이 없다. 오늘 노동자는 노동의 꿈이 없다. 노동자는 꿀 수 있는 꿈이 없다. 이미 실패한 노동의 꿈은 더 이상 노동자의 꿈일 수 없다. 너무도 생생한 실패의 기억이 오늘 이 세상에서 노동자가 꿈꿀 수 없게 한다. 노동자의 꿈은 노동의 이름으로 철저히 짓밟혔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기억들이 노동의 역사에 추악하게 새겨졌다. 노동자의 민주주의는 ‘위대한’ 권력자의 이름으로 더렵혀졌다. 그래서 지금 노동자의 기억에는 노동의 꿈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노동자가 오늘 노동의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인가. 1848년과 1871년 프랑스에선 노동자는 노동의 꿈을, 노동의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당시 그 꿈은 학살당했다. 하지만 노동의 꿈으로 노동자에게 남았다. 그래서 마침내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자는 노동의 꿈을 꿀 수 있었다. 1918년 독일에서 노동자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수많은 나라에서 세계 곳곳에서 노동의 꿈을 위해 노동자는 투쟁할 수 있었다. 자본이 없는 노동의 세상이냐 자본과 공존하는 노동의 세상이냐를 둘러싸고 그 꿈의 구체적인 모습이 다르고 그 꿈의 구체적인 실현 방법은 달랐다. 그렇지만 노동자는 노동의 꿈을 꾸었다.

그래서 20세기 세계의 역사는 노동의 꿈과 그 꿈을 위한 노동자의 투쟁으로 쓰였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아닌 어떠한 운동이라도 노동운동으로 전개됐다. 식민지 민족운동도, 민주화 운동도 모두 노동자의 운동으로 노동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노동의 꿈을 위한 과정일 수 있었다. 노동의 꿈을 꾸는 노동자의 투쟁이었으므로 다른 어떠한 운동이라도 노동자는 노동의 꿈을 위해서는 연대하고 개입해야 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노동자의 투쟁이, 노동의 꿈이 새겨졌다. 이 세상에선 그곳이 어디라도 노동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곳은 없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떠한 것이라도 노동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것은 없었다. 자본의 권리에도 노동의 이름은 새겨졌다. 자본의 소유와 권리는 노동에 의해 제한됐다. 그것이 법질서로서 이 세상의 법전에 새겨졌다. 지금 노동자의 권리는, 노동기본권은 그렇게 이 세상의 질서가 됐다.

노동의 꿈을 꾸는 노동자의 투쟁에 의해서 노동자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꿈은 깨져버렸다. 노동의 이름으로 짓밟혔다. 그리고 이 세상에선 노동자의 권리를, 노동기본권을 제한하고 침해하기 위한 반동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때로는 교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반동의 이론과 행동이 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무슨 새로운 것인 것처럼 포장해서 낡은 것을 떠들고 받들며 설쳐대고 있다. 자본을 위해서 노동의 권리를 약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의 권리는 아직 개정하지 않은 법전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법원의 판결로 종종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과거 그랬던 것처럼 민주화 운동에서 노동의 꿈을 찾을 수는 없다. 비록 민주화 운동에 노동자가 참여하고 있다고 해도 거기서 노동의 꿈을 찾을 수는 없다. 노동조합이 총파업으로 무바라크를 몰아내는데 합세했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의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가 노동의 세상을 노래하고 있는지, 노동자가 노동의 꿈을 외치고 있는지, 아니면 노동의 세상과 꿈이 없이 독재 타도를 외치고 민주주의를 노래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민주화 운동에는 노동의 꿈이 없다. 오늘은 노동자에게 꿈이 없다.

6. 노동의 꿈이 박탈된 상태에서 민주화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이미 우리는 4·19를 통해서 알고 있다. 노동이 없는 민주화 운동의 결과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대한민국이 모든 것을 보여줬다. 아직도 노동운동이 야권과 권력의 언저리에서 그 연대의 도구로, 집권의 도구로 전락한 현실이 처참하게 보여주고 있다. 노동의 꿈을 위한 노동자의 투쟁에 의해서 민주화 운동을 위한 연대로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꿈도 노동자의 투쟁도 없이 그들의 집권을 위한 도구로서 노동자가, 노동자의 조직이 농락당하고 있다. 그래서 타흐리르 광장에서 분노하던 이집트 민중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이미 민중의 행진은 군대의 열병식으로, 민중의 노래는 군대의 군가로, 민중의 구호는 장군의 명령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민중은 광장을 떠났고 무장은 해제됐다. 노동의 꿈이 없는 민중의 승리가 환멸과 절망으로 변해가는 것이 자꾸만 떠오른다. 타흐리르의 승리가 장군과 권력, 자본의 승리로 귀결될 수 있기에 그저 축하할 수만 없다. 부디 이집트에선 타흐리르 광장의 꿈이 노동의 꿈으로 살아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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