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업체는 도급계약에서 정한 도급업무 세부명세서 등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고, 완성한 작업량 등에 따라 월 말에 도급액을 수령했다. 작업현장에는 협력업체의 대표 또는 그 현장관리인이 작업현장에 상주하면서 자신의 소속 근로자들에게 작업지시를 하고, 참가인의 관리자가 협력업체의 근로자들에게 별도로 작업지시를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비춰 보면 원고들과 이사건 협력업체들과 참가인(현대자동차)과의 관계가 이사건 협력업체들이 원고(사내하청 노동자)들을 고용해 참가인의 지휘·명령을 받아 참가인을 위한 근로에 종사하게 하는 근로자 파견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지난 2008년 2월 서울고등법원이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항소심에서 ‘파견근로 관계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관한 판단’에 대해 내린 판결 내용이다. 그러나 이 판결은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의 판결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법리에 비춰 보면 원고들(사내하청 노동자)은 사내협력업체에 고용된 후 참가인(현대차)의 사업장에 파견돼 참가인으로부터 직접 노무지휘를 받는 근로자 파견 관계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같은 사실, 다른 판결=서울고법과 대법원이 이 소송과 관련해 공통적으로 인정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우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의장공정에 종사했고, 정규직 근로자와 혼재해 배치돼 각종 작업지시서 등에 의해 단순·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했다. 사내협력업체의 고유기술이나 자본은 투입되지 않았다. 현대차가 사내협력업체 노동자에 대한 일반적인 작업배치권과 결정권을 갖고 있었고, 작업량과 작업방법·작업순서를 결정했다. 현대차는 사내협력업체 현장관리인을 통해 원고들에게 구체적인 작업지시를 했다. 현장관리인이 하청노동자에게 지휘명령권을 행사했다. 현대차가 시업과 종업·휴게시간·작업속도 등을 결정했다.

판결문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결론을 다르게 내린 이유는 '작업현장에서 협력업체 관리자가 있을 경우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해 판단이 달랐기 때문이다. 서울고법은 사내하청회사의 현장관리자가 작업에 개입하면 합법도급이라고 봤고, 대법원은 현장관리자가 구체적인 지휘명령권을 행사했더라도 현대차가 결정한 사항을 전달하거나 도급인에 의해 통제돼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봤다.

대법원이 대규모 제조업체들이 불법파견 혐의를 벗기 위해 중간관리자를 세워 합법도급인 것처럼 파견노동자를 활용하고 노동부가 이를 묵인하는 관행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지침이 변하니?=31일 고용노동부는 본지가 보도한 기사<31일자 1면 ‘철 지난 치침·기준으로 대법원 판결 반영 한 해’ 참조> 기사와 관련해 해명자료를 냈다. 노동부가 "대법원의 현대차 관련 판결 뒤 실태를 파악하겠다"며 지난해 말 벌인 실태점검이 정작 판결내용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본지의 지적에 대해 "대법원 판결 기준도 포함해 실태점검표를 마련해 점검을 실시했다"는 내용이다.

노동부는 해명자료에서 컨베이어벨트 좌우에 원·하청근로자가 혼재해 작업했는지 여부, 원청의 작업량·작업순서·작업방법 결정 여부, 교대제 여부를 포함했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대법원이 원청의 지휘·감독 없이 하청 사업주 또는 현장관리자가 직접 작업지시·배치 및 근태관리를 하며 혼재작업 및 교대제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파견 여부를 판결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간 관행을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한 셈이다.

하지만 실태점검에 참여한 3개의 자동차 완성업체는 노동부의 덕을 봤다. 기아자동차는 작업배치와 변경과 관련해 하청(회사)별로 현장관리자를 선임해 운영하고, 근태관리와 작업지시를 진행했다. 노동부는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정규직이 컨베이어벨트 전후로 작업하고 있어 혼재배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GM대우차는 원청업체가 생산량을 담은 표준작업서를 제시하고, 제품 불량 때 하청업체 현장대리인에게 통보했다. 컨베이어벨트 작업공정 전후로 원·하청라인이 배치돼 있고, 작업내용도 상이했다. 르노삼성의 경우 원청이 생산계획에 따라 하도급업체가 작업계획을 수립했고, 작업형태 변경 때도 원청과 의논해 결정했다. 컨베이어시스템 작업공정에서 도급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2개사가 원청과 유사한 업무를 했지만 작업구역과 작업내용이 구분돼 사실상 혼재작업이 없다고 판단했다.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컨베이어라인에서는 어쩔 수 없이 원청이 관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노동부처럼 혼재배치 여부를 판단하면, 현대자동차처럼 공정을 세분화하면 빠져 나갈 수 있다”며 “부품에 따라 공정을 나누면 수천개에 달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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