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물가 문제가 중요한 경제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행 발표에 의하면 올 상반기 물가인상률은 3% 후반대에 이를 전망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4%를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도 내놓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이 체감하는 생활물가는 이보다 더 크게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 기온으로 인한 농산물가격 폭등을 비롯해 석유가격이 국제적으로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정부도 이러한 물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13일 서민물가안정 종합대책을 내놓는가 하면, 공정위를 앞세워 몇몇 생필품의 가격 담합을 집중 조사하고 있다.

한편 경제신문들을 비롯해 전경련 등 재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구들은 물가안정을 위해 올해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 상승→제품 가격 전가→물가상승→임금인상→물가상승'이라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은 13일 총 네 면에 걸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두 자릿수 임금인상 요구로 인플레이션 악순환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정부는 3년째 동결됐던 공무원 임금을 5.1%, 공기업의 경우 4.1% 인상하기로 했으나, 임금차별이 큰 2009년 이후 입사자의 임금은 계속 현행 체계를 유지하고, 공기업 연봉 수준도 지속적으로 계속 낮춰 나갈 것이라고 밝히며, 공공부문 임금죄기를 계속해 나갈 뜻을 밝혔다.

그런데 경제신문들과 정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한 가지 헷갈리는 것이 있다. 임금정책의 목표가 노동자들의 생활개선이 아니라 물가안정인가라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물가안정이라는 것도 노동자들의 실질 구매력을 향상시키기 위함인데, 어느새 주객이 전도돼 물가 자체가 목표가 돼 버린 것이다.

사실 이러한 논리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경제이념의 핵심에 위치해 있다. 9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의 큰 틀을 마련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첫 번째 교리가 바로 물가안정이었다. 물가안정에 정부의 통화 재정 정책을 종속시키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교리는 한국의 경우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국은행법 개정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98년 개정된 한국은행법은 한국은행의 첫 번째 목표를 국민경제발전이라는 포괄적 목표에서 물가안정이라는 한 가지 목표로 바꾸었다. 한국의 통화정책은 오직 물가안정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물가안정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금융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다. 금융자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통화가치 하락(물가인상)으로 인해 자산가격이 하락하는 것이다. 실질금리 역시 낮아져 금융자본가들의 실질소득도 줄어든다.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시를 알린 신호탄은 물가안정을 목표로 79년 9월부터 80년 4월까지 기준금리를 8%포인트 이상 올린 금리인상 폭탄이었다. 한국의 경우 역시 IMF 시대의 시작을 알린 것은 97년 말부터 98년 초까지 물가안정을 명분으로 이자율이 두 배 가까이 인상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금융자본은 고금리 저물가로 인한 막대한 수익을 챙길 수 있었고, 이후 경제정책 전반을 금융자본의 수익성을 중심으로 재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노동자들의 경우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물가 안정을 위해 임금인상은 억제됐고, 저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금융권으로부터 빌린 대출이자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98년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신용불량자가 속출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현재 물가안정 논리 또한 예전과 비슷하다.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 물가안정이냐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무조건 물가안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만 나오기 때문이다. 진정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문제라면, 물가안정을 위해 임금인상을 자제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소한 물가인상만큼 임금을 올려야 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지난 2년간 하락한 실질임금까지 고려해 더욱 크게 임금인상을 해야 할 것이다. 전체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2007년 대비 1.4%가 하락했고, 비정규직의 경우 이보다 두 배 이상 하락했다. 얼마 전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명목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명목 임금상승률보다 7.8% 높다고 하니, 다시 이야기하면 자본이 가져간 몫에 비해 노동자가 가져간 몫은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나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혼란은 노동자에게도 좋을 리 없다. 노동자와 서민의 삶의 질 개선을 고려한다면 인플레이션 문제는 임금억제가 아니라 적극적 재분배정책으로 푸는 것이 옳다. 당장 재벌 대기업이 지금까지 원·하청 불공정거래를 통해 쌓아 놓은 이윤을 원·하청거래 개선을 통해 하청 노동자들에게 내놓는다면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인플레이션과 크게 상관이 없을 것이다. 정부가 자산가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공공부문 비정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에 사용한다면 이는 인플레이션과 하등 상관이 없다.

자본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물가안정이 아니라 노동자와 서민의 삶의 질을 개선시킬 노동자 전체의 임금인상과 적극적 재분배 정책이 연초 정부 경제정책의 화두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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