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 사실 필자는 이 꼭지에서 판결문을 골라잡는 원칙이 있었다. 근데 이게 엉뚱한 곳에서 터지는 바람에, 김샜다. ‘보온병’과 ‘자연산’의 원칙. 따끈따끈하되 포탄인지 보온병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아리까리한 사건. 최종 3차 가공된 대법원 판례보다 자연산 활어 마냥 1심 청정수에서 퍼덕거리고 독자들이 많이 찾는 사건.

언론 - 보온병과 자연산 원칙에 따라 선택한 판례들. 양념소스 살짝 발라 얘기하면 법과 법감정이 견우직녀 상태이거나 세계관 대립이 오세훈씨와 서울시의회의 긴장 정도 돼야 한다는 말씀. 따라서 이런 판결문, 대부분 언론에 보도된 것들이 많다. 허나 기자들, 저들 쓰고 싶은 것만 쓰니 사실관계, 왜곡 다반사다. 특히 보수언론들. 사실관계, 정확히 보여 주냐, 아님 뒤트느냐에 따라 독자 망막에 비늘을 벗겨 주기도 하지만, 독자들의 두 동공이 콧대에서 상봉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기사 - “국내 모 항공사 소속 항공기 기장 A씨(54)는 평소 괄괄하고 행동에도 거침이 없는 성격이었다.”
이 사건, 징계해고를 보도한 언론들의 첫 문장이 이렇다. 그것도 필자가 찾아본 몇 개 신문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원본 기사에서 ‘ctrl+C’와 ‘ctrl+V’를 해서 보도했다. 원본기사는 하나일 테니 당연히 항공기 기장을 만난 기자도 한 명일게다. 사실 안 만났을 거라는 심증은 있으나.
여튼 징계해고 사건의 본질은 ‘회사가 왜 직원을 해고했는가’에서 출발한다. 왜? 회사가 짤랐으니까. 근데 기사는, 아무개씨의 평소 괄괄하고 거침없는 성격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떤 뉘앙스를 느꼈는가. 괄괄, 거침없음. 일단 ‘짤릴만 하네’로 시작되는 음흉한 복선이 느껴지지 않는가.

입장 -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사실 할 말이 닳고 닳으면 은장도처럼 꺼내드는 역지사지 카드. 허나 입장 바꿔도 누구 입장에, 어떤 입장에 서는지는 그 개인의 인격완성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를 넘어서는 세계관의 문제다. 지난해 배춧값 오르면서 서민들이 반찬걱정에 시름하고 있을 때, 어르신 그랬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본다는 게 양배추로 김치 담가 먹으란다. 양배추 가격도 천정부지로 뛴 상태였지만, 군대 갔다온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 못한 어르신의 그 말씀. 전 너무나 싫어요. 양배추 김치. 차라리 그냥 과메기를 사먹으라고 하지.
여하간 해고사건, 양측이 주장하는 사실의 진위를 대칭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사건을 대리한 입장이 아닌 한 독자, 제3자가 양측 모두의 입장에 서 보게끔해야 한다. 그런데 해고사건들은 ‘내가 사장이라면’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적지 않다. 이 사건에선 ‘승객입장’이라는 옵션까지 슬며시 끼어든다. 그러다 보니 사건의 본질 보다 개인의 잘못이 원심에 놓이게 되고 모든 힘이 가운데로 쏠릴 수밖에 없게 된다. 비행기의 양쪽 날개를 대칭해 볼 수 있는 ‘객관’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는 비행기 몸통까지 샅샅이 훑어 줘야 한다. 그래서 사실관계, 정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한쪽의 사실관계 - 징계해고된 기장. 사측의 이유. 기장이면서도 비행근무시 조종사 모자와 재킷을 미착용한 점, 5분 늦게 탑승한 승객 3명에 대해 객실사무장에게 “늦게 오면서 웃으면서 들어왔다”는 이유로 “사무장! 지금 들어오는 세 사람한테는 음료서비스 하지 마!”라고 한 점, 부사무장에게 인격모독과 성희롱 소지의 발언을 했다는 점. 결정타. 비행근무시 개그맨 김아무개씨를 ‘조종실’에 탑승시킨 채 항공기 운항을 한 점. 사측, 권고사직. 한 달 내 권고사직 안할 경우 징계해고. 결국 징계해고. 여기까지가 반쪽짜리 사실관계.

다른 한쪽의 사실관계 - 유니폼 미착용. 운항일반교범에는 조종사 모자와 재킷을 착용하도록 하고 있단다. 법원도 이 시건 기장이 ‘모자’를 착용하지 않은 것은 징계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조종사 ‘재킷’의 경우에는 판단이 달랐다. 회사가 꼭 재킷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와이셔츠만 입어도 된다’고 하는 사실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징계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음료 서비스. 이륙시간보다 5분 늦게 탄 승객에 대해 객실사무장에게 음료서비스를 하지 말라고 한 사실. 실제 그 승객들이 들었을 가능성이 낮았고, 3명의 승객에 대해선 대승적(?)으로 ‘음료서비스는 제공됐다’는 점 등을 들어 징계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인격모독 및 성희롱 발언. 여승무원에게 “얼굴이 너무 못생겼다”라고 한 발언이 모욕감을 준 것은 사실이나 성희롱 발언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성희롱을 당한 적이 없다’고 이 사건 기장에게 문자를 보낸 적이 있어 사실상 징계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허나 이 세 가지는 통큰 치킨의 양념소스에 불과하다.

무단출입 - 조종실에 개그맨을 무단출입하게 사실. 언론과 독자가 주목하는 부분이다. 사건의 노른자위이기도 하고. 만약 필자가 조종사 뒤로 가 조종사의 두 눈을 가리고 다정하게 ‘누구게?’라고 하며 이쁜 짓을 했다 치자. 이게 비행기 내에서 가능하다면 비행기 탈 사람 없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조종실에 웃기는 사람을 출입하게 한 자체는 웃을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법원도 다른 회사의 사례를 들어, 대한항공이 기장의 어머니를 탑승시켜 정직 1개월의 징계를, 아시아나항공이 비인가자를 조종실에 무단탑승 시킨 것에 대해 정직 3개월의 징계처분을 했다는 점을 들었다. 여기까지는 필자도, 독자들도 징계가 불가피하다는 것에 고개를 아래위로 끄떡일 테고. 다음부터는 판단의 문제다.

해고무효 - 기장님의 해고가 과하다는 것이 법원 판단이다. 왜? 괄괄하고 행동에 거침이 없는 성격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해고가 부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개그맨 무단출입이 한 번의 우발적 행동인데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괄괄하지 않고 되레 사측에 선처를 호소했다는 점을 들었다. 여기서 필자와 독자들의 입장이 나뉠 수 있다.
법원은 당시 54세였던 이 기장님이 사측에 창의적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안해 ‘특별공로상’을 받은 바 있고, 그 전에는 징계처분을 받은 바도 없으며, 회사의 절반에 못 미치는 125명의 직원들이 탄원서까지 제출해 줬다는 점을 참작해 줬다.
물론 그건 그거고, 잘못은 일벌백계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해고가 부당하다는 걸 판단하는 기준이 해고자의 성격을 뜯어 고쳐 개전의 정이 얼마나 감정이입 되는가의 여부는 아니다. 이 사건과 같이 징계의 대상이 되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지를 정확히 저울에 올려 가늠하는 판단의 섬세함이 필요하다. 그 섬세함은 법이란 바늘귀에 사건이라는 실을 꿰는 일과도 같아야 한다.
가까운 절에 가 보라. 명부전(冥府殿)이 있다. 영(靈)의 법원이라고 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 명부전 가운데 지장보살이 있고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 양 옆에는 10명의 심판관이 있단다. 자기업(業)에 따라 지옥과 극락이 결정되는데 그 결정까지 무려 10번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판결에 실수가 없도록 하여 다음 생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란다.
저승의 일도 이렇게 신중히 결정하는데 하물며 개똥밭에 굴러도 좋은 이승에서 그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승의 판결문에는 ‘더 이상 근로관계를 지속시키기 어렵다’는 말을 쓴다. 뒤집어 근로관계를 지속시킬 만한 이유가 있다면, 10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만큼의 섬세함과 신중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초에 만난 판결이 많을 걸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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