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한 척을 만드는 과정은 마치 옷 한 벌을 만들어 내는 과정과 비슷하다. 배를 만들기 위한 각종 자재가 입고되면, 옷감을 재단하듯이 배가 들어설 자리에 도안을 그리는 ‘심출’작업이 이어진다.
 
다음으로 ‘취부’작업이 진행된다. 배를 완성하기 전에 임시용접으로 틀을 만드는 것으로, 내부 부품 등을 장착하는 의장작업도 함께 이뤄진다. 옷을 완성하기 전에 미리 시침질해 보는 가봉 과정과 비슷하다. 배의 기본적인 골격이 형성되면 본격적인 ‘용접’이 시작된다. 배짓기 기술의 꽃으로 불리는 용접은 옷 만들기의 재봉질과 같다.
 
이렇게 '입고→심출→취부→용접'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배는 표면을 매끄럽게 연마하는 그라인더 작업을 거쳐 완성된다.

‘쇠장이’들의 눈물

5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후행처리파트 2직 현장휴게실에서 만난 박진봉(56)씨는 심출 전문가다. 77년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지난 99년 코리아타코마가 한진중으로 합병되면서 한진 소속이 됐다.
 
박씨는 34년 동안 배 만드는 일만 했다. 아시아 최대 수송함인 독도함, 첫 국내 국적 쇄빙선인 아라온호, 천안함과 같은 종류의 해군 초계함인 PKM과 PKX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인 한진중의 족적은 함께 늙어 온 노동자들의 삶의 자취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최초’가 많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도 자랑거리다.

정년퇴직을 2년 앞둔 박씨는 지난달 31일부로 희망퇴직 처리됐다. 말이 좋아 희망퇴직이지, 자신보다 어린 동료들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물러난 것이다. 만감이 교차한다고 했다. 자신이 사용하던 공구를 반납하기 위해 이날 조선소에 다시 찾아온 박씨는 “2년만 있으면 정년인데. ‘수고했다’는 인사 받으며 떠나고 싶었는데. 마치 산업폐기물이 된 것처럼 비참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어 “희망퇴직 안 했어도 어차피 나이가 많아 정리해고 1순위였다”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며칠 놀아 봤더니 후회가 든다”고 했다. 그에게 희망퇴직은 그에게 불명예 퇴직이었다.
 

올해로 73년째 운영되고 있는 한진중공업은 국내 열한 번째 장수기업이자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이다. 지난해 부산지역에서 르노삼성자동차가 매출액 3조6천억여원으로 1위에 올랐고, 한진중은 매출 3조2천억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부산을 대표하는 제조업체로 볼 수 있다.

한진중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인력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해고 대상은 생산직 400명. 회사는 필리핀 현지법인(HHIC-PHIL)인 수빅만 조선소에 비해 월등히 높은 비용 때문에 지난 2년간 영도조선소에서 단 한 척의 선박 수주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정리해고 사유로 들었다.

희망퇴직으로 형님을 떠나보내는 동료 박무학(53)씨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88년 입사한 무학씨는 용접공이다. 그는 요즘 정리해고 반대 파업에 참여하며 몇 날 며칠을 공장과 길거리에서 먹고 잤다. 그는 “회사가 쇠장이들의 마음을 너무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20~30년씩 배를 만들어 어느 경지에 오른 노동자들을 ‘쇠장이’라고 부릅니다. 쇠장이라는 말에는 장인으로 인정한다는 존경의 뜻이 담겨 있어요. 그런데 회사는 임금이 높다는 이유로 쇠장이들을 쫓아내고 있어요.”

그는 비용절감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건설업체 방식의 경영전략이 확산되면서 쇠장이들의 입지가 좁아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룹 내 임원 인사 때마다 조선부문 출신이 밀려나고 건설 출신이 자리를 메우면서 조선소에 건설업계의 운영방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용절감을 위한 최저가 낙찰제나 중간 이윤을 남기기 위한 다단계 하도급 방식처럼 건설업계에서 선호된는 운영방식이 도입되더니, 급기야 “고비용 때문에 사람들 해고해야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무학씨의 생각이다.

꺼지지 않는 정리해고 불씨

당초 한진중은 이날 정리해고 대상자를 선정해 해고예고를 통보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날 노사교섭이 재개되면서 해고 통보는 유보됐다. 희망퇴직인원 규모를 감안하면 추후 해고 대상자는 350명 내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석 달여 만에 재개된 노사교섭에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지회장 채길용)는 해고 철회와 물량 확보를 핵심 요구로 내걸었다. 지회는 특히 지난해 11월 수빅조선소에 수주된 컨테이너선 8척을 영도조선소에서 건조할 수 있도록 물량을 보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최우영 지회 사무장은 “영도조선소에서 만들어지던 배가 선형개조를 거쳐 수빅에서 최종 건조된 선례도 있기 때문에 수빅의 물량을 영도로 가져오는 데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며 “오히려 배를 맡긴 선주들은 높은 기술력을 가진 한국의 노동자들이 배를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수빅조선소는 153만6천CGT(69척)의 수주잔량을 보유하고 있다. 3년치 일감에 해당한다. 반면 영도조선소의 수주잔량은 수빅의 3분의 1 수준인 58만2천CGT(22척)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오는 5월께면 일감이 다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는 ‘정리해고’를 노조는 ‘물량 나누기’를 각자의 해법으로 내놓은 상태다.

“회사는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문제라고 하지만 금융감독원에 보고된 국내 대형 조선소의 임금 현황에 따르면 영도조선소의 임금은 외려 낮은 편에 속합니다. 회사의 주장처럼 수빅조선소와 단순 비교시 수익의 격차가 발생한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영도조선소에서 배를 만들더라도 적자가 나는 구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흑자가 발생하는 조선소에 물량을 들여와 배를 만들자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그렇게 과도한 겁니까.”
최 사무장은 “영도조선소에서 번 돈을 해외공장에 쏟아부으면서, 정작 국내 노동자들을 해고하겠다는 회사의 행태가 ‘먹튀’와 다른 게 뭐냐”며 울분을 토로했다.

무너지는 향토기업

부산 지역사회도 한진중의 정리해고 사태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향토기업의 몰락을 예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량 해고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방법은 있어요. 회사가 물량을 수빅으로 돌리지 않으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수빅을 핵심거점으로 선택하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온 한진중이 이제 와서 경영전략을 원점으로 돌릴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허민영 경상대 외래교수(경제학부)의 진단이다. 하지만 그는 회사의 경영전략이 도덕적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37년부터 운영된 한진중은 70년 넘게 국내에서 벌어들인 돈을 모조리 끌어다가 수빅에 올인했습니다. 이런 행위는 국가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어렵죠. 부산 지역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 정리해고가 추진되면 지역 내 노동력이 사장되고 실업자가 대량 발생할 텐데, 실업에 대한 사회적 비용은 누가 감당합니까. 결국 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야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헛구호에 그치고 마는 거죠.”

지역 차원의 심각한 실업대란이 눈앞에 닥쳐왔지만 부산시는 그야말로 ‘강 건너 불 구경’이다. 영도조선소의 수주 경쟁력이 저하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대량해고 자체를 피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부산시 고용정책과 관계자는 “강제로 해고하는 것보다는 희망퇴직 인원을 늘리고 그만큼 해고인원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라며 “회사가 희망퇴직자에 대한 보상수위를 높일 수 있도록 부산시가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부산시가 지난해 최우수 일자리 창출 지방자치단체에 선정됐다.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같은 결과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차진구 부산경실련 사무처장은 “부산시의 고용정책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백화점이나 컨텍센터 유치 등을 통해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며 “한진중의 경우도 수주경쟁력 탓만 할 게 아니라 지자체와 정치권이 고도화된 첨단 제조업을 육성하는 차원에서 한진중을 살리고 일자리를 유지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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