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진보진영의 화두는 단결과 연대다. 대표적인 흐름이 진보정당 통합과 새로운 상설연대체 건설이다.
위로는 정당 간 통합이, 아래로는 대중조직 간 연대가 논의되고 있다. 진보정당 통합은 말은 무성하지만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대중조직률은 두 차례에 걸쳐 제단체 대표자들이 만나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노동전문가들은 상설연대체 건설논의에 주목하고 있다. 앞으로 진행될 진보정당 통합의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 상설연대체 필요성 공감
 
새로운 상설연대체 건설논의는 지난달 1일 민주노총이 제단체 대표자 간담회를 소집하고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민주노총과 진보단체들은 이 간담회에 이어 이달 18일 1차 대표자회의를 열고 다음달 18일 전국민중대회를 개최하고 상설연대체 준비위원회(가칭)를 올해 안에 출범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표자 간담회에서 상설연대체 건설에 대한 우려가 여러 차례 제기됐던 것에 비하면 논의가 상당 부분 진전됐다. 민주노총과 각 조직은 이 과정에서 한 차례의 대토론회와 다섯 차례의 집행책임자회의를 거치며 의견을 조율했다.

상설연대체 건설논의가 급진전한 것은 진보진영이 공동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와 인권·노동권 등 국민의 제반 권리가 약화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정희성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반노동·반민중·반통일 정책으로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위축되고 남북의 군사적 긴장감을 높아지고 있다”며 “이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안은 진보진영이 단결해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설연대체 건설에 우려를 표명했던 사회진보연대·노동전선·다함께와 같은 의견그룹(대중정치그룹)도 공동투쟁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을 달지 않았다. 최영준 다함께 운영위원은 최근 열린 토론회에서 “진보진영의 광범위한 단결과 투쟁의 필요성에 비춰 볼 때 민주노총 지도부가 상설연대체 건설에 발 벗고 나선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평가했고, 정지영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은 “진보운동진영이 이명박 정권에 맞서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신의 벽’ 어떻게 극복할까
 
이러한 가시적 성과에도 상설연대체를 건설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무엇보다 진보진영 내 다양한 단체·의견그룹 간 상호불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이자 걸림돌로 남아 있다.

진보진영은 80년대부터 노동자운동 중심인 평등파(범PD)와 반미·통일운동 중심인 자주파(범NL)로 양분돼 왔다. 이들은 정치·사상적 지향점을 달리하면서 오랫동안 경쟁과 대립, 협력과 연대를 반복했다. 최근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평등파도 통일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주파도 노동운동에 적극 나서면서 정치·사상적 교류지반이 예전에 비해 넓어졌다.

그러나 2007년 9월 한국진보연대 출범 과정에서 진보진영은 조직구성·운영방식을 두고 크게 분열했다. 곧이어 2008년 2월 민주노동당이 분당(진보신당 창당)하면서 두 세력 사이에 쉽게 넘지 못할 불신의 벽이 생겼다.

진보연대 건설논의는 2006년 초부터 시작됐다. 당시 존재했던 두 개의 상설연대체인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2001년 3월 출범)와 ‘신자유주의 반대와 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한 전국민중연대’(2001년 2월 출범)를 하나로 묶어 단일한 연대체를 만들자는 것이 핵심 취지였다.

진보연대 건설은 쉽지 않았다. 이른바 ‘패권주의-분파주의’ 논쟁이 불거졌다. 한쪽에선 “다수 세력이 진보연대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려 한다”고 비판했고, 다른 한쪽에선 “소소한 차이를 부각시켜 분열을 일으키는 세력이 있다”고 맞받았다. 논란 끝에 민중연대에 속해 있던 상당수 단체가 진보연대 가입을 거부했다. 진보연대는 애초 목표와는 달리 반쪽짜리 단체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패권주의 없을 것”
 
민주노총도 똑같은 내부 논란에 휩싸였다. 진보연대 가입을 추진했던 민주노총은 결국 대의원대회에서 관련 안건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최근 상설연대체 건설을 주도하면서 “특정세력의 패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지 않겠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김 위원장의 이러한 발언은 특정세력을 비판한다기보다는 진보진영 내 여러 조직 간 신뢰회복을 강조한 뜻으로 풀이된다. 과거 패권주의-분파주의 논쟁으로 진보진영이 갈라서고 민주노총도 똑같은 논란에 휩싸였던 사태를 방지하자는 반성적 의미도 깃들어 있다.

김 위원장은 “다양한 정치의견을 가진 진보단체들이 폭넓게 연대해 공동투쟁할 때만이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 대안세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며 “우리에게는 어떤 전략·전술을 만들어 내고 합의할 것인가보다는 내부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상설연대체 건설논의가 급진전하는 이유도 △진보단체들의 연대·단결을 통한 공동투쟁의 필요성이 높아졌고 △가장 많은 대중과 영향력을 확보한 민주노총이 논의를 주도하고 있으며 △몇 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상호간 불신을 조금씩 걷어 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열렸던 ‘새 상설연대체 건설·평가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과거 연대운동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각 조직 간 격한 논의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공개석상에서 차이를 드러내면서 논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쟁점과 차이가 드러나면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선명해지는 이점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현안 중심 공동투쟁, 조직 틀’은 합의
 
상설연대체 건설논의는 불과 두 달여 만에 몇 가지 주요한 고비를 넘겼다. 2007년 9월 출범한 진보연대는 민중연대와 통일연대의 통합만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정치적 지향성을 갖는 단체들이 공동투쟁을 벌이는 상설연대체’를 넘어 ‘단일한 정치지향과 목표를 정하고 독자적인 의결기구를 갖는 단일조직체’(진보진영은 이를 보통 ‘전선체’라고 표현한다) 건설을 목표로 했다.

진보연대 운영위원회는 2007년 자체 발간한 ‘10문10답’ 자료집에서 “진보연대는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공동의 목표를 갖는 전선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며 “전국대표자회의와 전국확대대표자회의(노조 대의원대회 성격)를 구성하고 진보진영을 대표해 의사를 결정하는 구조”라고 밝혔다. 진보연대의 이러한 조직구성은 패권주의와 그것에 반대해 등장한 분파주의 논란을 일으켰던 주요 배경이었다.

이견이 없진 않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논란은 다소 사그라졌다. 각 조직은 1차 대표자회의에서 “앞으로 건설할 조직은 단일조직체가 아닌 여러 진보·민중단체들이 현안을 중심으로 공동투쟁하는 상설연대체로 한다”는 데 합의했다.

대표자들은 나아가 △노동자·농민·빈민 등 민중생존권과 기본적인 권리 쟁취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민주주의·사회공공성 확대 △한반도 평화와 통일 실현을 상설연대체가 추구할 목표로 정했다.

이러한 성과는 과거 경험과 반성에 기초한 것이다. 이재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은 “예전에도 상설연대체는 많았지만 당위적인 연대로 조직운영이 느슨해지는 등 문제가 적지 않았고 수명이 오래가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조직의 한 대표자는 “민중연대·통일연대·진보연대 식으로 이름만 바꿔 가는 연대운동은 지양해야 한다”며 “연대를 통해 조직의 위상과 역할을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해소되지 않은 논란, 문제는 신뢰회복
 
몇 가지 쟁점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우선 상설연대체 건설 완료시점에 관한 이견이 존재한다. 민주노총은 애초 올해 내에 상설연대체 출범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시작했으나 최근에는 한발 물러섰다. 올해 내 본 조직인 아닌 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한 배경이다.

그러나 준비위를 거쳐 내년 언제쯤 건설을 완료할지에 대해서는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한쪽에선 “연대와 공동투쟁이 시급한 만큼 하루 빨리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선 “여러 쟁점을 충분히 논의하고 공동투쟁을 하면서 상설연대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상설연대체로 조직 틀을 구성하기로 합의했지만 조직을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영훈 위원장은 “의사결정 구조를 일반 민주주의(다수결의 원리)로 정할 경우 패권주의 문제가, 만장일치제로 할 경우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며 “불가피하게 표결이 필요하다면 특별결의 정족수인 3분의 2 찬성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김태연 노동전선 집행위원장은 “일상적 의제를 두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표결로 이어지는 안건들은 결과에 따라 조직이 와해될 수도 있는 핵심적인 사안이 대부분”이라며 표결제도 도입 자체에 우려를 표했다.

두 쟁점의 기저에는 아직까지는 진보진영 내부에 깔려 있는 상호불신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상설연대체를 먼저 만들어 공동투쟁을 하자”와 “공동투쟁을 거쳐 상설연대체를 만들자”는 논쟁은 단순히 선후나 시점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핵심은 각 조직이 어느 정도의 상호 신뢰를 쌓고 상설연대체를 건설할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정지영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은 “연대의 기본인 상호존중과 신뢰가 무너진 상태에서 또다시 갈등과 불신이 증폭된다면 연대운동 필요성에 대한 최소한의 토대마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직 운영방식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진보진영은 신속하지 못한 의사결정구조로 인해 급변하는 현안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특별결의 표결제도를 비민주적이라거나 현실적이지 않다라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 반면에 다수 세력이 표결이라는 형식을 빌려 각종 사안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것이라는 불신이 사라지지 않은 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다. 불신 해소와 신뢰 회복이 두 쟁점을 푸는 핵심 열쇠인 것이다.
 
민주대연합 vs 진보대연합
 
메가톤급 쟁점은 오히려 외부에 있다. 진보정당을 제외한 민주당·국민참여당·창조한국당과 같은 야권과의 연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관점의 문제다. 향후 진보정당 간 통합 과정에서도 ‘민주대연합’이냐, ‘진보대연합(통합)’이냐를 두고 논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영대 국민참여당 최고위원은 지난달 열린 상설연대체 대표자 간담회에서 “상설연대체 건설에 동의한다”며 “가능하다면 참관단체 형식이라도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민주당도 노동위원회를 상설화하고 비정규직특별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노동계 연대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민주당·국민참여당·창조한국당은 최근 구미 KEC 사태 등 노동현안 해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상설연대체 논의 안건에도 야권연대 문제가 포함돼 있다. 아직 본격적인 논의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다양한 형태로 논쟁은 번지고 있다. ‘10·4 선언과 6·15 공동선언 이행’을 상설연대체의 현안 과제로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논쟁이 대표적이다.

최영준 다함께 운영위원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 실현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신자유주의 세력(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던 10·4 선언이나 6·15 공동선언 이행을 과제로 넣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반면 김장호 전국회의 기획위원장은 “상설연대체는 현안을 중심으로 투쟁하는 조직이고, 두 선언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구체적 의제인 만큼 포함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야권연대라는 본론이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논쟁은 가열되기 시작했다.

각 조직마다 민주당·국민참여당·창조한국당 등 야권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한 세력이라는 의미에서 이들 모두를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칭하거나 한나라당과 다르지 않은 ‘보수정당’이라고 표현하는 조직도 있다. 상대적으로 진보라는 의미에서 ‘자유주의 개혁세력’이라거나 한나라당과 구분해 ‘범민주세력’이라고 지칭하는 조직도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중반기를 넘어선 데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이 2년도 남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사회 권력재편기를 앞두고 이러한 논쟁은 더욱 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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