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백혈병 사건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몇몇 국회의원들이 산업재해에 대한 입증책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기사를 봤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러한 내용은 이미 단병호 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실이 주축이 돼 법안으로 상정한 바 있다. 당시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고 호응을 해 준 국회의원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법안을 만들기 위해 필자를 포함한 변호사·노무사·학자·활동가 등 6명이 1년여의 토론과 검토를 거쳐 입법안을 만들었으나 지금까지 그런 법안이 상정됐다는 것을 기억하는 국회의원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노동자의 입증책임’이 명시돼 있지 않다. 판례상 “근로자의 업무와 위 질병 또는 위 질병에 따른 사망 간의 인과관계에 관하여는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 입증하여야 한다”(대법원 1997.2.28 선고 96누14883 판결, 대법원 2008.1.31 선고 2006두8204 판결 등 참조)라고 하여 판례 법리상 인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입증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2004년 하청노동자 뇌경색 불승인 사건을 담당한 바 있다. 소장만 접수되고 아무런 내용이 파악된 적이 없는지라 일단 정보공개신청 후 불승인 관련서류를 분석했다. 주위에 적절히 도와줄 수 있는 분(이 노동자의 경우에는 사위)을 찾아 시간과 비용을 최소하고자 3차례 질의서를 작성해서 메일로 보내 직접 사위가 아버지·동료 노동자를 면담하고 답변을 하도록 했다. 어찌 됐든 그 이후 당사자 면담은 기본이므로 비행기를 타고 광양으로 갔다. 피재 노동자는 52년생으로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인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 분의 사위께 동료 2명을 함께 만날 수 있도록 부탁을 하고 면담을 하러 내려갔다.

면담과 조사분석 결과 당해 노동자는 2002년 3월 전라남도 광양소재 포스코의 시설물의 보수·관리업무를 담당하는 하청업체의 재하청업체인 방수 등을 담당하는 모 개발공사에 입사했다. 이 노동자는 광양제철 내 공장바닥·배수로·벙커 등의 에폭시방수작업(내산작업)과 공장지붕의 방수작업 등을 담당했다. 공장의 바닥방수 작업을 할 때는 황산·염산 등의 물질에도 견딜 수 있는 에폭시를 사용해 코팅 등 방수작업을 했다.

소송전략을 짜고 몇 차례 준비서면을 통해 인과관계를 주장했다. 그리고 2명의 동료 노동자를 증인으로 신청하는 한편, 에폭시·시너 등의 유해위험성에 대해 산업의학의에 대한 감정신청을 했다. 증인 중 한사람이 후각마비증상으로 내원한 적이 있는 전남대병원에 대한 사실조회를 하고, 포스코와 하청업체에 대한 사실조회를 통해 원고의 작업내용·작업물질·작업도구 등에 대해 밝히려고 노력했다. 1차 준비기일에 판사는 에폭시라든지 시너에 대해 실제 사용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에폭시와 시너가 아닌 ‘프라이말’(이는 수용성으로 무해하다고 함)만 사용한 것으로 해 불승인했기 때문이다.

이후 증인신문·사실회신 등을 통해 원고가 단지 프라이말뿐만 아니라 에폭시·시너 등도 상시적으로 사용한 것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피고(근로복지공단) 또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감정촉탁을 통해 나타난 ‘에폭시 레진 시스템’의 유해 위험성· 심혈관계 질환과의 상관관계 등을 규명했다. 그러나 판사는 여전히 이것이 뇌경색을 유발할 정도의 독성을 가진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동료 2명의 증인신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일관했다. 결국 마지막 방법으로 직접 현장에 대한 검증신청을 했으나 판사가 거부했다. 에폭시·시너·프라이말 이 모든 것을 사 가지고 올 테니 직접 흡입만 해 보자라고 제의했으나 이마저도 채택되지 않았다. 준비서면 3차례, 증인신문 2명, 전남대병원에 대한 사실조회, 산업의학의에 대한 감정촉탁, 2곳의 회사에 대한 사실조회, 검증신청 등 산재에 대한 행정소송에 있어 해 볼 것은 거의 다 해 봤지만 판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결국 기각당했다.

산재사건은 의학적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는 물론이고 변호사·노무사들도 다수의 사건을 처리해 본 경험이 없으면 쟁송을 통해 제대로 다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판례에서는 산재에서 입증책임이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한 것은 아니라고 설시하고 있지만, 실제 소송과 산재신청 단계 모두 피재 노동자의 강한 입증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하청노동자가 뇌경색이 발병한 이 사건도 원청에 막혀 현장에 접근할 수도 없었고, 판사에게 가 보자고 해도 이에 대한 검증을 배척했다. 증인신문과 감정촉탁·사실조회 등 우호적 내용을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

최근 발암물질 관련 직업병에 있어 사실상 입증책임을 전환한 판결(서울고등법원 2009.12.2 선고 2009누8849판결, 대법원 2010.4.29 선고 2010두283 심리불속행 기각)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희소식이 있지만, 이러한 판결이 기존 노동자의 입증책임을 판단한 위 기존 판례를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판단이 현장의 실무에서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이고 발암물질 관련 직업병의 경우에 한해 법원에 가서야 그나마 인정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결국 산재에 있어 입증책임 전환은 법제화돼야 가능한 것이고, 그 길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반드시 이뤄 내야 할 과제임은 틀림없다. 그 문을 이미 두드린 적이 있기 때문에 거울삼아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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