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악산 단풍은 붉었다. 지난 일요일 백담사와 수렴동, 비선대는 붉게 물이 올랐다. 바로 어제였다. 지난 16일 산별노조에 관한 법률토론회가 대법원에서 있었다. 이날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설악산은 붉었다. 독일과 프랑스·미국 등을 비교하고, 우리의 산별노조에 관한 논의와 판례에 관해 토론을 했다. 김성수 판사는 산별노조의 지부·지회 등도 단체교섭과 조직형태 변경에서 단위노조처럼 그 지위를 인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냈다. 이철수 서울대 교수도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의 지부·지회 등으로 조직형태를 변경한 것처럼 다시 변경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고 발표했다.
산별노조 간부의 사업장 출입과 관련해서도, 조합원을 위한 노조 홍보 등을 위해 독일에서는 보장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제한하고 있다고 조용만 건국대 교수와 강성태 한양대 교수는 발제하고 토론했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 사업장 출입을 허용할 것인가에 관해서 토론이 있었다. 이날 필자는 우리 산별노조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과 판례에서 벗어나 어떻게 헌법상 노동기본권의 행사를 보장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문제를 파악해 발표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리고 토론회 다음날 필자는 설악산 마등령에 올랐다.

2. 설악산 마등령 정상에는 이미 단풍은 없었다. 토론회장에서 오갔던 말들도 없었다. 심각하게 산별노조 법리를 연구해 발표하고 토론했지만 설악산 계곡은 붉었고 정상은 이미 붉지 않았다. 심각하게 토론은 진행됐지만 정작 심각한 산별노조는 이날 토론회에 무관심했다. 모두가 중립을 자신의 신조로 해서 연구하고 발표했다. 심각한 토론이 심각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진행됐다. 중립으로 포장될수록 빛났으므로 모두가 중립의 신조로 말했다. 그리고 모두가 심각하지 않는 신조로 심각한 문제를 검토했다. 그러나 결코 외국의 산별노조와 같지 않은 우리의 산별노조 및 지부의 실체를 비판하고 그에 따라 법리적 주장을 전개했다. 그리고 중립을 무기로 산별노조는 재단되고 난자됐다. 핏물이 붉게 흘렀다. 그러나 중립의 색안경을 쓴 자에게는 붉은 핏물이 보이지 않는다. 연구의 대상이고 객체일 뿐이다.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산별노조는 수술대에 올랐다. 주관이 아닌 객관의 세계에서 우리의 산별노조는 비교될 수 없었다. 기업별노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별노조라고 이름 붙인 강보에 쌓인 아이를 두고 외국의 산별노조와 비교한다면 결과는 분명하다. ‘산별노조가 아니다.’ 이렇게 분명하다. 오직 우리의 산별노조는 이제 시작된 것이고 장차를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해하고 노동기본권의 행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살펴봐야 한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의 조직체의 하나로서 산별노조를 고민하는 자라면 이와 같이 봐야 한다. 산별노조를 수술대 위에 놓인 해부용 시체로 보지 않는 한 이와 같이 봐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산별노조가 이 나라 노동자들이 땀과 눈물로 조직한 핏물이 흐르는 단결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날 토론회에서 나는 중립의 가면을 쓰고 무색의 말을 던지지 못했다. 무색이 아닌 설악산 단풍의 붉은 색으로 말해야 했다.

3. 마등령에 오르던 중 만경대에서 설악산 단풍을 보았다. 노랗고 붉다고 말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샛노랗고 진붉다고 말해도 마찬가지다. 그저 색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 이렇다. 아무리 정확하게 실제를 묘사하려고 하지만 이론은 실제를 모두 정확히 담아낼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론은 회색일 뿐이지만 그 이론이 구축한 세계는 회색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를 조직하는 것은 이론이다. 노동의 세계는 이론으로 조직하는 세계다. 자본의 질서를 구축하는 이론들에 의해서 우리의 세계는 만들어졌다. 봉건제를 폐지하고자 나선 시민혁명 과정에서 수많은 이론이 제출됐고, 이 이론에 의해 근대자본주의사회의 질서는 구축됐다. 국가와 헌법, 사회와 민사법, 기업과 상법 등 이 세계의 모든 곳에서 법질서가 자본의 이론으로 구축됐다. 그렇게 우리는 이론이 조직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설악산 단풍은 이론이 구축한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론이 구축한 세계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에서 이론은 날마다 새롭게 구축돼 간다. 어제 토론회도 바로 이 새롭게 구축하는 이론의 과정이다. 이 세계가 이론에 의해 조직된 세계이므로 이론의 변화에 의해 변한다. 자본의 운동이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것처럼 우리의 세계에서 이론의 운동도 쉼이 없다. 우리의 세계에서 노동이 자본의 운동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자본을 위한 이론의 운동을 멈추도록 해야 한다. 노동을 위한 이론이 자본을 위한 이론의 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의 세계에서 이미 구축된 질서는 자본의 질서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중립적이고 무색적인 태도로 이 세계에 관해 말한다면 자본의 질서로 구축된 이 세계를 전제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이 아무리 중립적이고 무색한 태도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이 자본의 세계에서는 자본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물론 자신이 취한 중립으로 인해 자신의 노래는 이 세계에서 빛이 날 것이다. 중립의 가치 때문에. 그러나 그것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의 노래일 뿐이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어떠한 노래라도 마찬가지다. 노동과 자본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라면 곧바로 노동과 자본의 이해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 중립은 의심받을 수 있지만 이렇지 않은 것이라면 중립은 의심받지도 않는다. 중립적으로 교수는 논문을 발표하고 중립적으로 판사는 판결하게 된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는 교수와 판사는 중립으로 빛난다. 중립의 전문성으로 자본도 그들을 말하고 노동도 그들을 말한다. 나아가 이 세계에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중립으로 말하고 노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의 말과 노래에서 중립의 가면을 벗겨야 노동을 위해 노동의 말과 노래를 할 수 있다. 간혹 노동을 위한다면서 자본의 언어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 시민계급의 언어로 말하면서 사회여론의 주도층이라는 중간계급에 호소하기도 한다. 특히 신문과 방송에서 그렇다. 그러나 노동의 말로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노동의 노래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사안에 있어서는 호소받게 될지 몰라도 그것뿐이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호소가 받아들여지는 때다. 그 호소는 자본의 언어로, 중간계급에 행한 것이기 때문에 노동을 위한 것이 노동의 언어로 말할 수 없도록 하고 말았다. 노동을 위한 것이 노동계급이 아닌 중간계급에 호소함으로써 그들에 기대고 말았다. 그들의 언어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오히려 노동의 전진을 위해서는 오히려 유해한 것일 수 있다. 노동의 세계가 지금의 자본의 세계와 다른 것이라면 그것은 자본의 언어로는 구축될 수 없다.

4. 설악산 만경대에서 내려다본 가야동 계곡은 붉었다. 붉은 물이 바위계곡을 흘렀다. 노동과 노동운동에 관한 수많은 이론도 흘러갔다. 노동운동의 큰 계곡을 붉게 물들이며 흘러갔다. 그러나 설악산 단풍은 여전히 가야동을 물들이고 있는데 그 이론은 사라졌다. 수많은 이론이 나타났고 사라졌다. 오늘도 이론이 존재하지만 내일 그 이론은 사라질 것이다. 어제 토론회장에서 논의됐던 이론도 그렇다. 이미 사라진 이론들도 자신의 세계를 묘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묘사한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자 사라졌다. 또한 그 세계를 정확히 묘사했던 이론조차도 자신이 묘사했던 세계가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로 변화할 때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났고 그 이론은 세계를 변화시켰다. 오늘 자본의 세계에서 벗어나 노동이 이와 다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노동의 이론으로 자본의 이론을 폐기해야 한다. 처음에는 노동운동의 중심 부분에서 노동의 이론이 자본의 이론을 폐기해야 하고, 나중에는 모든 부분에서 폐기해야 한다. 이와 같은 노동의 이론은 설악산 가야동 계곡수처럼 당연히 상류에서 흘러나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세계가 구축될 때 그랬던 것처럼 노동을 위한 수많은 이론들이 나타나 이 세상을 붉게 물들여야 하고 결국 자본의 이론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노동의 이론을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노조 활동가만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이론의 장에서 직접 부딪쳐야 하고 맞서야 한다. 자본의 권리와 그 법질서에 맞서 노동의 권리를 주장하고 말해야 한다. 교수든, 변호사든, 기자든 당신이 누구든지 이 자본의 세계에서 노동의 노래를 부르고자 한다면 부딪치고 말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노동조합 등 노동자조직은 끊임없이 자본의 세계에 맞서 노동의 구호를 외쳐야 한다.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노동의 언어로 노래해야 한다. 우리의 세상이 노동의 노래로 흘러넘칠 때 노동의 세계는 벅찬 아름다움과 감동으로 올 것이다. 설악산 붉은 단풍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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