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3년부터 대형 조선소에서 도장작업을 했던 박아무개(55)씨의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은 96년부터였다. 청력이 떨어지고, 시력이 나빠졌다. 그해 받은 특수건강검진에서는 중등도 인지기능 장애로 독성뇌병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평상시 몸을 혹사하지도 않았다. 담배는 어렸을 때 1~2년 피우다 말았고, 술을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었다.

유기용제를 덜 쓰는 도장부서에서 안전개선부로 작업장을 옮긴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러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듬해 작업 도중에 추락사고를 당하면서 몸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손발이 저리고 숨이 가빠졌다. 어지럼증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고, 기억력이 눈에 띄게 감퇴됐다. 그러더니 2002년부터는 가만히 있어도 왼손이 떨렸다. 파킨슨병 증상이었다.

도장부서에서 박씨가 했던 작업은 일명 ‘파워작업’으로 불리는 선체 내 표면처리와 붓 도장작업이었다. 표면처리는 용접부위를 평평하고 매끄럽게 정리한 뒤 마지막에 시너를 이용해 세척하는 작업이고, 붓 도장작업은 스프레이 도장작업 뒤 페인트의 건조상태를 확인해 두툼하게 덧칠하는 작업이다. 박씨는 “수개월 동안 스프레이 도장작업도 했다”며 “송기마스크를 착용하지만 작업이 20~30분 정도로 짧거나 폐쇄공간이 아닌 경우 방독마스크만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도장부서에서 일할 당시 유기용제에 과다노출됐고, 결국 이 때문에 파킨슨병 증상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게 박씨의 생각이었다.

지난해 6월 발간된 대한산업의학회는 학회지에 실린 ‘유기용제에 노출된 조선소 도장작업자에서 발생한 파킨슨증후군’에서 박씨의 사례를 다루며 “유기용제 지연독성으로 뇌의 도파민 계통이 손상돼 발생한 파킨슨증후군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파킨슨 증상이 유기용제 노출 중단 8년 뒤에 나타났고, 여러 질환이 겹쳐 있으며, (노화로 인한) 파킨슨병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불충분해 작업관련성을 판단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어려움도 고백했다. 그러나 박씨는 끝내 업무상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

 


유기용제 직업병 판정은 하늘의 별따기

박씨처럼 명확하게 질병이 직업과 연관됐을 개연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업무상 연관성을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다. 공단은 박씨와 유사한 공정에서 일을 했던 노동자에 대해 "파킨슨병 증상은 망간 노출보다는 자연경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업무연관성이 낮은 것으로 판단했다. 타이어공장에서 14년 동안 ‘몰드 관리’ 업무를 했다가 역시 파킨슨병을 진단받은 또 다른 박아무개씨는 업무연관성이 낮다는 판정을 받았다.

타이어 제조에서 몰드는 고온의 가류기 안에서 타이어의 외벽 틀을 만드는 금속부품인데, 박씨는 몰드 수리작업과 몰드 청소업무를 했다. 역시 유기용제에 노출돼 있는 작업이다. 업무연관성이 없다는 복지공단의 설명은 이렇다.

“파킨슨병은 기존에 수행된 문헌 검토상 직업환경성 위험요인이 발병에 작용할 가능성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몰드 수리업무에서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중급속과 유기용제 노출 가능성이 덜어지고, 청소작업에서도 명백한 유해물질 노출이 파악되지 못했다.”

삼성반도체를 비롯해 반도체 공정에서 발생하는 유기용제로 인한 사고 역시 비슷한 이유로 업무연관성이 낮다는 판정이 나온다. 지난해 말 발간된 산업안전보건공단의 ‘2008년 직업병 진단사례집’을 보면 유기용제로 인한 업무상질병을 얼마나 보수적으로 판단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2004년 입사해 2007년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은 A씨(당시 20세) 사례에서 공단은 “백혈병을 일으킬 수준으로 벤젠과 전리방사선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매우 낮고, 비정상적인 상황에 의한 방사선 노출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노출수준이 낮을 것이며, 그 정도의 사고성 노출이라면 다른 임상적 증상이 나타났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다른 물질들이 혼합돼 생성되는 발암물질이 근로자에게 노출돼 백혈병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낮으며, 전체 반도체 업종에 대한 역학조사에서 반도체 근로자의 백혈병 발생이 높다는 증거가 충분치 않았다”고 덧붙였다. 공단은 마지막으로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 반도체 업종과 백혈병의 원인적 연관성이 밝혀진 바 없다”고 주장했다.

질병판정위원회 보수적 성격도 한몫

공단의 이런 보수적인 결정은 여러 비판을 낳고 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직업병 여부를 결정하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이미경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올해 질병판정위원회의 유기용제 중독으로 인한 업무상 재해 승인율은 0%였다. 2008년 질병판정위원회가 도입된 뒤 승인율 하락이 두드러졌다. 유기용제 중독으로 인한 업무상재해 승인율은 2007년 65.5%, 2008년 75%였다. 그러다 질병판정위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난해 20%로 급락하더니, 올해는 단 한 건도 산재판정을 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화학물질에 노출되거나 접촉해 피해를 당한 노동자들의 산재 승인율도 비슷했다. 2007년 78.5%에서 올해 6월 현재 27.3%로 급락했다. 뇌·심혈관계질환도 43.7%에서 20.9%로 하락했다. 신청건수도 급락했는데 이를 두고 임상혁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장은 산업안전보건연구소가 발간하는 안전연구동향 10월호에서 “사업장의 노동조건이 좋아져서 나타난 결과라면 좋겠지만 낮은 승인율 때문에 산재자들이 자기검열을 통해 신청하지 않은 것이 주된 이유”라고 지적했다. 그는 질병판정위에 대해 “산재 환자들은 도덕적이지 못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의사들의 태도나 산재보험을 운용하는 근로복지공단 내에 판정위가 속한 구조적인 한계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비판했다.

작업환경 열악할수록 질병노출 가능성 높아

문제는 작업환경이 열악한 노동자들일수록 유기용제 중독을 비롯한 직업병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것이다. 2008년 11월 발표된 산업안전보건공단의 ‘근로환경 표본조사’에 따르면 2006년 6~9월 전국에서 표본추출한 경제활동인구 1만43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를 해 보니, 유기용제에 항시적으로 노출된 이들이 전체의 3.2%인 3천213명에 달했다. 이 비율은 사업체 규모가 작을수록 높았고,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많았다. 질병판정위의 보수적인 직업병 판정이 계속될수록 산재보험의 사각지대가 넓어지고, 노동자에게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는 비판이 헛말이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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