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교육과정서 노동교육 배제 … 프랑스는 중학교부터 자세히 배워
 
지난 2009년 2월 졸업 뒤 2년째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윤소연(26·가명)씨는 표정이 밝았다. 시종 웃는 얼굴로 상대방의 눈을 맞추며 얘기하는 모습에서 자신감이 느껴진다. 윤씨는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 막바지에 갑자기 ‘자산관리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교수 추천으로 준비하던 일본유학을 포기했다. 졸업 뒤 1년을 꼬박 취업을 준비하는 데 썼고, 덕분에 올해 상반기에 취업에 성공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다고 했다.
 
2010년 9월 어느 날, 기자가 그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자산관리를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인가요?”
윤씨는 뜸을 들이면서 이렇게 답했다.
“노동자요? 글쎄요. 그냥 자산관리를 하고 싶은 거죠. 노동자가 되려는 것은 아닙니다. 네임밸류(명성)를 얻을 동안 일반 금융회사에 취업할 생각인데요. 나중에는 1인 투자회사에서 일할 거예요.”

“그럼 회사에 일하다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 사람(사장이나 상사) 나름의 비전이 있을 것이고, 회사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제가 틀어 버리면 (전체가) 안 되잖아요.”
“급여를 갑자기 줄이면 어떨 것 같아요?”
“그냥 받아들여야죠. 시너지 효과를 못 내서 그런 거겠죠.”
 
청년취업난이 심각하다. 올해 1~7월 평균 청년실업률은 8.6%다. 전체 실업률(4%)의 두 배를 웃돈다. 청년실업자도 38만명에 달해 전체 실업자의 40%에 이른다. 청년층 중에서도 특히 고졸 이하 실업률은 8.4%로, 대졸 이상 실업률(7.8%)보다 높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는 얘기는 윤씨에게 어쩌면 사치일 수 있다.

그렇다고 눈을 낮춰 취업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청년층의 상용직 비중은 고졸 이하가 42.9%, 대졸 이상이 68.4%였다. 80%가 100인 미만의 중소기업에 취직하고, 직장만족도는 5점 만점에 3.5점 이하다.

고용노동부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서부지청의 한 근로감독관은 “분쟁으로 찾아오는 청년층이 예상보다 많다”며 “대개는 돈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근로자는 근로기준법을 전혀 알지 못하고, 업체는 노동법에 무지하다”며 “법을 아무리 설명해도 사업주는 업계의 관행만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진로교육조차 안 하는 나라
 
노동부 서울서부고용센터 취업지원과에 근무하는 유희정 실무관은 지난 11년간 취업지원상담을 하고, 최근 2년간 청년층 상담을 전담하고 있는 베테랑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청년 구직자의 상당수는 상담을 시작하자마자 “취업해야 하는데, 뭘 하면 좋을까요”라고 질문한다고 한다. 목표가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전공을 살려 취업하고 싶은데, 무슨 일을 하면 되냐고 묻는 유형도 많다. 유 실무관은 “자기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구직자들은 어떤 것을 하는 게 좋을지 답을 구하려 한다”며 “진로를 결정하고 오는 사람은 20%도 안 된다”고 말했다.

진로교육조차 하지 않는 나라에서 제대로 된 노동교육은 먼 나라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을 위해서라도 철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학계의 주장은 곱씹을 만하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노동교육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한국에서 노동교육은 ‘불모지’나 다름없다. 사실 8차 교육과정에 맞춰 2007년 발표된 고등학교 1학년 인문·사회 교과 교육과정은 기존의 틀을 완전히 바꾼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2005년부터 교수와 교사, 학계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작품이었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도 2007년 1월 “학생들이 일과 노동의 중요성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교과과정을 개편해야 한다”는 권고문을 교육과학기술부에 보냈다.

당시 심의 과정에서 노동 분야의 단원 포함 요구가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교육과정이 △문화 △정의 △세계화 △인권 △삶의 질로 분류됐다. 정의에도, 세계화에도, 인권에도, 삶의 질에도 노동교육을 담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표출됐다.

그러나 3년 논의는 지난해 단 며칠 만에 뒤집어졌다. 전경련과 교육과학기술부가 “경제교육이 약화될 수 있다”며 반대한 것이다. 이에 따라 각 단원의 이름도 △사회변동과 문화 △정치과정과 참여 민주주의 △인권 및 사회정의와 법 △경제성장과 삶의 질 △국제경제와 세계화로 바뀌었다. 이는 ‘미래형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교육과정심의위원회에 제출됐다.

당시 심의위에 참여했던 김원태(53) 산본고 교사를 비롯한 위원들은 “암기식 수업으로 전락할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교육과정심의위는 지난해 2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앞서 2008년 4월 실업계고 학생들이 노동교육을 반드시 받도록 한 ‘현장실습 운영 정상화 방안’이 ‘학교 자율화 추진계획’에 따라 28개 지침과 함께 폐기됐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국가기관으로는 유일하게 민간을 대상으로 노동교육을 할 수 있었던 한국노동교육원이 폐지됐다. 한국에서 ‘노동교육’이 사라진 셈이다. 이제 노동교육은 전교조와 같은 일부 교육단체와 발기인대회를 앞둔 ‘노동교육기관’ 같은 곳에서나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가 돼 버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노동교육 하는 나라들
 
다른 나라는 어떨까. 프랑스의 중학교 4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살펴보자. 이들이 배우는 ‘시민교육’ 교과서의 3장 ‘정치적·사회적 시민권’ 단원의 내용이다.
책 오른쪽에는 98년 실업자들이 공공기관 건물에 난입해 각종 서류를 5층에서 아래로 뿌리는 사진이, 왼쪽에는 ‘실업자 운동’이라는 텍스트가 실려 있다. ‘1997년 12월~1998년 1월 실업자들이 움직이다’를 시작으로 ‘실업은 생활을 갉아먹는다’, ‘실업은 격리를 가져온다’, ‘부자 나라는 모든 국민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소제목이 이어진다.

‘시민교육’ 교과서에는 ‘최저편입임금’이라고 써 붙인 창구 앞에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가 없는 사람 6명이 줄지어 서 있는 삽화와 털모자를 쓴 여성이 피켓을 들고 시위대 속에 서 있는 사진도 삽입돼 있다. 피켓에는 “모든 사람은 사회로부터 적절한 존재수단을 얻을 권리가 있다”는 프랑스 헌법 전문 구절이 적혀 있다.

프랑스의 학제는 초등학교가 5년, 중등학교가 4년이다. ‘시민교육’ 교과서는 우리나라 중학교 사회교과서쯤으로 보면 된다. 특히 교과서 3장은 노동법과 노동조합에 관해 3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사회생활과 법질서’라는 절에 단 4줄만 서술돼 있는 우리나라 중2 사회교과서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시민교육’ 교과서에는 모의 졸업시험 주제로 ‘실업 및 사회로부터의 격리에 대한 대책’, ‘노조 대표와 노동시간에 대한 협상’이 제시돼 있다. 프랑스는 ‘시민교육’ 교과서를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매년 1권씩 소화한다. 학년이 오를수록 수준도 높고, 양도 많다.
프랑스뿐만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첨병으로 불리는 미국도 중학교 ‘시민론’ 교과서를 통해 노동조합의 형성과 노사관계, 정부의 조치, 오늘날의 노동조합을 주제로 공부한다. 영국은 ‘시민교육’, 일본은 ‘공민’, 독일은 ‘실제정치’라는 이름의 교과서로 노동교육을 하고 있다.

하인호 인천여상 교사는 “학교에 다닐 때부터 노동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 교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는 학생들은 임금과 산업안전 사각지대에 곧바로 들어간다”며 “일반계 고등학생들은 그 시간이 잠시 뒤로 미뤄진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전에 노동에 대해 체험하지 못하다 보니 노사가 서로를 오해하게 되고 과격해지는 것”이라며 “학교에서 체계적인 노동교육을 실시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극단으로 치닫는 것도 노동교육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프랑스 경제사회 통합교과서’라는 책이 국내에 출판됐다. 프랑스의 사회경제계열 고등학교 2~3학년 학생들이 주당 5~6시간씩 1년 동안 배우는 정규 교과서다. 교과서는 ‘통합적인 시선’에 방점을 찍고 있다. 경제 주제를 다룰 때도 불평등·계급·저개발·연대·사회규범·사회정치적 조직·민주주의를 함께 설명하고 있다.
김원태(53·사진) 산본고 교사는 이 책을 내는 산파역을 맡았다.
“우리나라는 교과서에 사회갈등이 나오지 않아요. 대부분의 사회갈등은 노동이죠. 그런데 (프랑스 교과서에는) 삽화와 사진이 나오고 실업·파업·노사갈등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요. 우리나라 교과서도 그래야 합니다. 어차피 삶 자체가 노동이지 않습니까.”
김 교사는 문화적 충격과 함께 우리나라 교육계의 답답함이 책을 내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2005년 사회 분야 교육과정심의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노동교육이 교육과정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왜 우리나라에서 노동은 강조가 안 될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은 사회학적 개념의 노동이 아니에요. 근로죠. 노동은 천하고 기득권 세력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노동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래서 노동기준법이 아니고 근로기준법이잖아요. 교육과정평가심의위 회의에서 제가 그랬어요. 우리나라에 노동부도 있는데, 중단원 하나라도 노동으로 하자고…. 그랬더니 교수들이 반대하더군요. 그래도 △문화 △정의 △세계화 △인권 △삶의 질로 분류한 것은 성과였어요. 노동 얘기를 할 수 있으니까. 당시에는 ‘이 정도 따낸 것도 대단한 진보다. 교과서만 제발 나와라’ 하면서 넘어갔죠.”
그러나 교육과정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폭 바뀌었다. 지난해 2월 개정된 내용을 보면 문화는 사회변동과 문화로, 정의와 인권은 인권 및 사회정의와 법으로, 삶의 질은 경제성장과 삶의 질로, 세계화는 국제경제와 세계화로 바뀌었다. 이전 교육과정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김 교사는 ‘프랑스 경제사회 통합교과서’가 성과를 내기를 바라고 있다. 정말 출판하고 싶은 책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프랑스 고등학교 3학년 경제사회학 교과서다.
“사실 출판사에서는 3학년 교과서를 먼저 출간하자고 했어요. 논술 주제로 좋으니까. 그런데 주제가 민감해서 한국 교사들이 다루지 않으려고 할 것 같았죠. 그래서 우선 2학년 교과서부터 출간한 겁니다. 우리나라 교과서 목차랑 비슷하거든요. 고2 교과서가 좋은 반응을 보이면 곧바로 고3 교과서를 출간해야죠.”
프랑스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의 주제들은 △노동과 고용 △투자·자본과 기술의 발달 △국제화와 세계화 △사회변화와 연대 △사회변화와 갈등 △사회변화와 불평등 △공공권력의 경제사회적 역할 등이다. 교과서의 결론을 다룬 부분의 제목은 ‘새로운 분배를 위하여’다.
김 교사는 “매일매일이 노동에 관련된 삶이고, 모든 것이 노동조건에 속한다”며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노동교육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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