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용의 단절이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씨는 작업복을 입음으로써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매일노동뉴스>가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작업복을 입고 있나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노동자들은 정규직이나 비정규직 모두 같은 작업복을 입고 일한다. 현대차에 직접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옷에는 현대차 로고가 찍혀 나오고, 사내 하청업체에 고용된 비정규 노동자들의 옷에는 하청업체 마크가 달려 나온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울산 시내에는 작업복 차림으로 활보하는 노동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현대차 울산4공장 소형트럭부에서 일하는 이익재(41)씨는 “울산 노동자들은 애경사를 챙길 때도 작업복 차림으로 갈 때가 많다”며 “대공장이 많은 울산지역의 독특한 문화”라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노사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피복위원회에서 작업복을 선정한다. 현대차가 하청업체에 지급하는 도급단가에도 피복비가 포함돼 있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현대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작업복은 달랐다. 디자인만 다른 게 아니라 소재부터 차이가 났다. 당시 정규직은 청색 면 작업복을, 비정규직은 남색 나일론 작업복을 입었다. 두 개의 작업복은 이원화된 노동시장을 암묵적으로 보여 줬다.
“한진중공업에 다닐 때, 아침 조회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소금꽃나무’의 저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눈에 비친 80년대 조선소 작업복의 이미지는 ‘서러움’이었다. 조선소의 억센 노동은 작업복을 누더기로 만들곤 했다. 용접 불똥이 튀어 구멍이 난 옷에 청테이프를 붙여 입어도 살갗은 빨갛게 벗겨졌다. 걸레 같은 작업복이 부끄러워 노동자들은 집이 아무리 가까워도 작업복을 입고 출근하지 않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친 후 가장 먼저 달라진 것도 작업복이었다. 1년에 한 벌만 지급되던 것이 두세 벌로 늘었다. 질도 좋아졌다. 김 지도위원은 “작업복을 부끄러워했던 공순이·공돌이들은 투쟁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했다”며 “87년 이후 작업복을 입고 외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 같은 인식의 변화는 누가 거저 준 게 아니었다. 투쟁의 성과였다.
“작업복은 노동자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요즘 대공장의 작업복이 현장권력의 상징이 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과가 비정규 노동자들에게도 골고루 돌아가면 좋을 텐데. 아직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작업복이 다른 사업장이 많아요.”
이중노동시장의 상징 ‘두 개의 작업복’
작업복은 제조업 노동자처럼 특정 사업장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서울 중랑우체국 집배원 김종현(34)씨도 사시사철 작업복을 입는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 덥거나 추운 날에도 밖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작업복의 질이 중요하다.
“작업복은 튼튼하고 질겨야 합니다. 집배원들은 주로 밖에서 일하잖아요.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잠깐씩 쉬기도 하는데, 지금의 옷은 금방 해지는 것 같아요. 품질 대비 가격이 비싼 편이라는데도 그래요.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해서 비싸다는 소문도 있고….” 김씨는 작업복을 입고 우체국을 나서면 바짝 긴장한다. 누구나 한눈에 집배원임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복장상태를 체크한다. 오토바이 무단횡단 같은 사소한 범법행위도 가급적 하지 않는다.
더운 여름엔 우체국으로부터 검정색 반발 티셔츠와 바지가 나온다. 그러나 김씨는 조금 덥더라도 정복을 고집하는 편이다. 그는 “요즘 들어 흉악범죄가 많아지고 있는데, 집배원들이 정복을 입고 있으면 민원인들이 안심하고 문을 열어 준다”고 설명했다.
정부기관이나 공기업 노동자들이 입는 작업복의 특징은 정부의 입김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철도공사가 추진 중인 ‘녹색 유니폼’이 대표적이다. 공사는 정부의 ‘녹색 철도’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작업복의 색깔과 디자인 변경을 추진 중이다. 빠르면 올 겨울부터 공사 직원들은 녹색 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노동자들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녹색 옷을 소화하기 어려운 데다, 옷 색깔만 바꾸면 자동으로 녹색철도가 되느냐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작업복 선정에 있어 노동자들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는 크지 않아 보인다. 백남희 철도노조 선전국장은 “작업복 업체를 선정할 때 노조도 참여하지만, 사전에 공사와 업체 간 물밑 의견조율이 된 상태라면 노조의 의결권은 큰 의미가 없다”며 “이러한 구조로 인해 가격에 비해 질이 떨어지는 저질 작업복이 납품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작업복을 입어야 진짜 ‘나’
여성 사업장의 작업복은 곧 죽어도 예쁘고 봐야 한다. 디자인이 우수한 유니폼을 입은 항공사 여승무원의 직무만족도가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러나 여승무원들은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거나 “염색은 안 된다”, “화려한 액세서리는 안 된다”, “머리는 올려 묶은 뒤 망을 씌워야 한다” 등 각종 규제에 시달린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화장품을 판매하는 김해원(31·가명)씨는 유니폼에 대한 불만보다는 마트 직영사원들의 태도 때문에 짜증이 난다. 김씨는 “마트마다 복장에 대한 규제와 규정이 다른데, 마트 직영사원들은 나 같은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명령하듯이 이건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며 “직영사원이 이래라 저래라 할 법적 권한은 없지만, 그런 요구를 무시하면 결국 협력업체들만 피해를 본다”고 털어놓았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최아무개(28)씨는 간호복을 비하하는 대중매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성인용 애니메이션에 종종 왜곡된 이미지의 간호복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최씨는 “간호사 복장에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간호사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 그런 모양의 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간호사 전체를 비하하는 것 같아 언짢다”고 말했다. 그는 “TV 드라마에 간호사가 환자의 사생활을 노출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환자의 상태에 대한 설명은 아무한테나 하지 않는다”고 속상해했다.
좋은 작업복을 찾아라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작업복과 유니폼을 입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부터다. 한때는 획일성을 강조하는 작업복 문화가 노동자들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좀 더 안전하고 기능적인 작업복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작업복이 좋은 작업복일까. 박혜원 창원대 교수(의류학과)는 “노동자들은 회사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하고 창의적인 작업복을 원하고 있다”며 “작업현장의 특성을 고려한 색깔과 소재를 사용한 작업복은 노동자들에게 심리적으로 도움이 되고, 작업 안전성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노동계도 회사와 작업복 논의를 할 때 이 같은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구은회·조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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