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박종철·이한열·이용석…. 노동·통일·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친숙한 이름들이다. 이들 모두는 사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싸운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민주노조와 노동해방을, 누군가는 민주주의와 조국통일 위해 헌신했다. 그러다 목숨까지 바쳤다. 국가권력과 사회폭력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죽었거나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들을 ‘열사’라고 부른다. 2010년 9월 현재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이승만 정권에서 시작해 70~80년대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열사가 생겨났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보장되지 않고 권력과 힘의 논리로 세상이 움직이던 시절. 사회 변화를 꿈꾼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다 자의로, 타의로 세상을 등졌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와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가 지난 53년부터 2005년 3월까지 파악한 열사의 수만 480명에 달한다. 출신별로 분류하면 노동자가 141명으로 가장 많았고, 사회·재야인사(82명), 학생(77명), 농민·빈민(23명), 군경·기타(27명) 순이었다. 장기수는 130명으로 집계됐다.

이들 단체는 부당한 권력과 사회폭력에 맞서 싸우다 숨진 이들이 자체 집계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숨지거나, 혹은 자료가 없거나 누락돼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용산망루에서 경찰력에 맞서 싸우다 철거민 5명이 숨지는 등 2005년 3월 이후에도 죽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김태환 전 한국노총 충주지역지부 의장은 2005년 6월 특수고용직인 레미콘노동자들의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싸우다 회사측이 대체투입한 레미콘 차량에 깔려 39세의 나이로 숨졌다. 2007년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반대한다며 몸을 불살랐던 택시노동자 허세욱(당시 55세)씨, 공무원노조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면서 2002년 노조 결성과 함께 초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2009년 지병으로 숨진 공무원노동자 차봉천(당시 63세)씨 등을 비롯해 2005년 이후 수십여 명이 노조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유명을 달리했다. 이들까지 포함하면 한국사회에서 열사로 분류되는 이들은 500여명을 훌쩍 넘어선다.
 
‘열사’란, ‘열사정신’이란
 
김명운 추모연대 공동의장은 “열사는 사회·역사적인 인식을 갖고 삶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고자 스스로 목숨을 바쳤거나 국가권력과 사회폭력에 의해 운명하신 분들”이라고 정의했다.

열사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결했거나 활동 과정에서 운명을 다해 숨졌거나, 국가권력이나 사회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당시 22세) 열사가 대표적이다.
추모연대 집계에 따르면 53년부터 2005년까지 파악된 열사 480명 중 분신·할복·투신·목맴·단식 등을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은 114명에 이른다.

사람의 생각까지 통제하려던 국가권력의 전향서 요구를 거부하고 비전향 장기수로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 사회·노동운동 과정에서 체력 약화로 병에 걸려 숨졌거나 자연사한 분들도 활동내용에 따라 종종 열사로 분류된다.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라는 구술 자서전으로 유명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도 올해 6월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인은 비전향 장기수로 36년간 감옥생활을 하다 91년 출소했다. 오랜 감옥생활에도 건강을 잃지 않았고, 출소한 뒤에는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노환으로 운명했다.
 
추모연대는 병을 얻거나 자연사한 사회·노동운동가 중 102명을 열사로 분류했다. 장기수였다가 감옥에서 죽거나 출옥한 뒤 운명한 이들만 130명에 이른다. 장기수의 경우 국가권력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 가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부당한 권력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는 점에서 사회적 타살로 분류된다.

직접적으로 국가권력이나 사회폭력 때문에 목숨을 잃은 열사들도 많다. “87년 1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 발표로 온 국민이 분노했던 박종철(당시 22세) 열사의 죽음과 같은해 7월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하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얼굴을 맞아 목숨을 잃은 이한열(당시 21세) 열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두 사건은 87년 범국민·노동자 대투쟁을 촉발했다. 이후 군사정권하에서 대통령 직선제 실시 등을 이끌어 내면서 우리 사회 민주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빨갱이·간첩이라는 오명 속에 재판을 받고 국가기관인 사법부에 의해 사형을 당한 이들도 있다. 국내 최초로 진보정당을 출범시키고 국회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당시 61세) 선생은 간첩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59년 7월 사형이 집행됐다. 62년 2월 ‘민족일보’를 창간했던 조용수씨도 같은해 12월 박정희 정권이 만든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과 ‘혁명재판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당시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김종태(당시 43세)·김질락(당시 39세) 열사와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구속된 권재혁(당시 45세) 열사는 모두 69년에 사형이 집행됐다.
 
시대상 담긴 ‘열사정신’
 
열사는 시대상을 담고 있다. 그 시대에 가장 첨예했던 사회적 문제와 갈등 속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80년대는 유독 노조 민주화를 위해 스스로 분신·투신한 열사들이 많았다. 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후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80년대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정점으로 노조 민주화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기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유신체제가 무너졌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80년 5월 서울역광장에서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같은달 18일에는 전남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발발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 모두를 폭력으로 진압했다. 그는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80년대는 60~70년대에 걸쳐 진행했던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어느 정도 성장기에 들어선 시기였다. 자연스럽게 ‘노동자 계급’이 사회 중심세력으로 발돋움했다.

80년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독재권력에 항거했던 사람은 김종태(당시 22세) 열사였다. 그는 80년 6월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에서 “노동3권을 보장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고 외쳤다. 실업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녔던 청년 김종태는 유서에 “내 작은 몸뚱이를 불질러 국민 몇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저는 몸을 던지겠습니다 …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과분한 말은 가까이 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힘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고 썼다.

택시노동자로 일하다 회사측의 노조탄압에 맞서 84년 분신했던 박종만(당시 36세)씨와 86년 같은 이유로 분신했던 변형진(당시 38세)씨. 노조 민주화 운동을 벌이면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고 외치며 86년 분신했던 박영진(당시 26세)씨. 87년 죽음(분신)으로 동지들에게 노조 사수를 호소했던 김수배(당시 28세)씨. 노조 민주화 외에도 호헌철폐·독재타도·조국통일 등 사회 민주화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목숨을 잃은 열사들이 80년대에만 140명에 달한다.

김명운 추모연대 공동의장은 “열사 정신은 죽음을 불사하고 뜻을 이루고자 했던 강인한 정신과 동지에 대한 믿음이고, 사회·역사적으로 넘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시대상황을 뛰어넘고자 했던 의지”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이어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꿈을 살아남은 자들이 이뤄 줄 것이라는 동지들에 대한 강한 믿음이 없었다면 목숨을 바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살아남은 자들이 열사를 추모하고 그의 정신을 기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사회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은 “우리 사회와 노조 민주화는 앞서 가신 수많은 열사의 피와 눈물로 피어난 꽃과 같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고 정경식씨의 장례식이 민주노총 주관으로 23년 만에 열렸다. 고인은 마산에 위치한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에서 84년부터 노조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그러다 87년 갑자기 실종됐고, 이듬해 경남 창원 불모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정씨는 지난 8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숨진 채 발견된 지 23년 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가 사회 민주화를 위해 공헌했다는 점을 정부기관이 인정한 것이다.

지난 8일 열린 고인의 장례식에는 유가족과 관련 단체들, 민주노총 조합원과 고인의 동료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이날 장례식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사람들이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더 새겼다면 이렇게 초라하게 그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우리는 기억이라는 투쟁에서도 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고인이 활동했던 마산·창원지역은 80년대 민주노동운동이 발발했던 핵심지역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노력에 의해 87년 12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이 설립됐고, 그 힘을 바탕으로 90년 1월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됐다. 전노협은 전국적이며 다양한 업종을 포괄하는 전국노조연합단체로 95년 11월 출범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전신이었다.

그래도 추모는 계속된다
 
민주노총에서 ‘열사전문가’로 통하는 박석민 교육국장은 “열사를 기리고 그의 정신을 실천하려 했던 유가족들과 동료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열사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로 70년 12월 청계피복노조를 만들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탄압받는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아들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로 20여년 넘게 유가족들과 함께 활동했던 배은심 어머니. 정경식 열사의 어머니로 23년 만에 장례를 치를 때까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김을선 어머니….

추모연대나 유가족협의회를 비롯한 단체들은 매년 특정일을 정해 범국민 합동추모제를 열고 있다. 90년대 초반에 시작된 합동문화제는 벌써 2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노동계에서도 함께 싸우다 숨진 열사를 추모·기념하는 사업회를 결성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벌이는 곳이 적지 않다. 2003년 10월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집회 도중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던 근로복지공단 계약직노동자 고 이용석씨. 그를 추모하는 ‘이용석열사정신계승사업회’는 열사가 숨졌던 10월26일을 전후로 해마다 추모기간을 정하고 그를 기리고 있다. 또 이용석 가요제와 이용석 노동자상을 제정해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활동도 벌이고 있다.

운수노조는 “한미 FTA 반대”를 외치며 분신했던 허세욱 열사 정신계승사업회와 화물연대 조합원이었던 박종태 열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매년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11월 열사 400여명의 영정과 활동기록을 담은 ‘열사 추모 홈페이지’(yolsa.nodong.org)를 제작했다.

박석민 교육국장은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각 열사가 왜 죽었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널리 알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한국노총도 ‘김태환열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해 5년째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다. 한국노총은 매년 일일주점 등 후원회를 열어 생활이 어려운 유가족을 보살피는 사업을 진행한다.
 
이름조차 잊힌 열사들
 
추모연대와 유가족협의회·민주노총은 이들 열사의 기록을 모아 2005년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자료집 ‘끝내 살리라’ 1·2권을 발간했다. 책 속에는 480여명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표적 열사묘역인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과 광주 망월동공원, 경남 양산 솥발산공원에 묻힌 열사들의 무덤을 지도로 그린 ‘열사묘역지도’도 실려 있다.
2010년은 전태일 열사 40주기다. 열사들의 활동기록을 담은 책과 묘역지도를 들고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열사들을 다시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열사들은 홀로 돌아가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고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든 넘어서고 싶을 때 죽음을 택하곤 하니까요. 다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꿈, 그 열망을 동지들이 이뤄 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없었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김명운(51·사진)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공동의장은 ‘우리가 열사를 추모하고 정신을 기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함께 싸우지 못했던 책임, 열사들이 살아남은 자에게 남긴 굳은 믿음을 지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김 의장이 열사정신 계승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함께 활동했던 후배 박영진 열사가 86년 당시 26세의 나이로 (주)신흥정밀에서 노조를 만들면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뒤 그의 추모기념사업회 대표간사를 맡으면서부터다. 그와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의 뜻을 이어 가겠다는 생각이 그를 추모기념사업회로 이끌었다.
“너무 거창하고 어렵나요”라고 반문하던 그는 “지난해 1월 용산참사 때 돌아가셨던 열사들의 마음을 느껴보라”며 설명을 이어 갔다.
“철거 반대와 민중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망루를 쌓았어요. 그런데 경찰과 용역은 밑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용산참사 당시 숨진 철거민들을 어떤 이들은 열사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사고로 숨진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김 의장은 “그들은 열사”라고 강조했다.
“두렵고 무서웠겠죠. 개인적 이득을 취하고 살려고 했다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목적의식에서 출발했는지, 이해관계에서 비롯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지키려 했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김 의장은 “열사들의 기록을 살펴보다 보면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지만 너무나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며 “그들 모두는 어떠한 폭력이나 마음속 두려움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왜 열사를 기억해야 하고, 열사정신을 기려야 하냐고. 그의 대답은 간명했다.
“<매일노동뉴스>에 ‘노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잖아요. 그런데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국가권력의 탄압을 받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노동이라는 단어를 계속 써야지요. 그걸 위해서라도 열사를 기억하고, 열사정신을 기려야 합니다.”
김 의장은 2000년대 들어 열사가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 “한국 사회가 여전히 민중을 적대시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길이 차단돼 있는 데다, 앞서간 열사들의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올해가 전태일 열사 40주기입니다. 지금이라도 전태일 열사가 썼던 일기를 한번 읽어보세요.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김봉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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