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들이 피고의 근로자 지위에 있음을 확인한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달 26일 오미선(31)씨를 비롯해 해고된 KTX 여승무원들이 한국철도공사를 상대로 “직접 고용한 근로자임을 밝혀 달라”며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받아들였다. 법정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판결이 내려지자, KTX 여승무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2006년 5월 해고된 이후 4년 넘게 외쳤던 ‘진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법원은 철도공사로 하여금 해고된 KTX 여승무원들이 복직할 때까지 월 180만원의 임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철도공사에 사용자 책임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책임져야 할 배후는 따로 있다. 바로 정부다.
 
공무원 증원 억제 위해 외주화 강요

철도공사는 애초에 승무업무를 외주화할 생각이 없었다. 외주화를 주문한 것은 당시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였다. 건교부는 2002년 12월 ‘고속철도 운영소요인력 재산정 검토지침’을 철도청(현 철도공사)에 통보했다.

정부의 공무원 정원 억제방침에 따라 고속철도 운영에 따른 철도청의 인력증원을 최대한 억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건교부는 “불필요한 운영인력의 축소와 아웃소싱 적용범위를 대폭 확대하라”며 매표·개집표·안내업무 중 최소 관리인력을 제외하고 모두 외주화하라고 요구했다. 당시는 여객업무의 경우 당초 편성당 4인1조 시스템이었는데, 여객전무(현 열차팀장)를 제외한 3명의 승무원을 모두 외주위탁하라는 것이었다.

건교부 산하 고속철도기획단은 민관 합동으로 운영인력 산정 실사팀을 구성했다. 이듬해 2월 최종 방침이 확정됐다. 편성당 3인1조로 바뀌었고, 이에 필요한 소요인력인 여객전무(117명)·차장(117명)은 기존 철도 인력에서 전환배치하고, 여승무원(117명)은 전원 외주화하기로 했다.

KTX 여승무원 소송을 맡았던 최성호 변호사(노동과 삶 법률사무소)는 “민관 합동 실사팀은 건교부와 철도청 소속 차량·시설·전기 분야 담당 관료들과 구조개혁·경영·회계법인 민간전문가 등 17명으로 구성됐다”며 “이 가운데 노동법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KTX 인력운영을 설계할 때 노동 관련 법·제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만 있었더라도 이후에 여승무원들이 이토록 오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건교부·노동부·철도청의 ‘불법 공모’

고용노동부 서울지방고용노동청(옛 노동부 서울지방노동청)은 KTX 여승무원 불법파견 논란과 관련해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철도공사가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3년 9월과 10월 철도청과 노동부가 주고받은 질의회신을 보자.
 
발신 : 철도청장
수신 : 노동부장관
시행일자 : 2003년 9월30일

노동자복지 향상을 위한 귀 부의 적극적인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청에서는 2004년 4월 고속철도 개통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고속철도 운영에 소요되는 인력은 정부 방침(행정자치부·건설교통부·철도청·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합동회의)에 의거, 공무원 정원의 증원 억제를 위해 외주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노동조합과의 마찰 및 운영상 시행착오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외주화(파견 또는 도급) 대상업무가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등 관련법령의 적용상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다음 사항을 질의하오니 검토·회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직명별 민법상의 도급방식에 의한 업무위탁 가능 여부
-  직명별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령에 의해 파견근로자를 활용할 수 있는지 여부
-  전항에 있어서 전부 또는 일부가 불가하다고 판단될 경우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방안
 
발신 : 노동부장관
수신 : 철도청장
시행일자 : 2003년 10월8일

고영91305-284(’03.9.30) 관련입니다. 귀 청에서 질의하신 내용은 매표, 개·집표, 안내업무와 열차승무원 중 안내원 업무에 파견법상 파견근로자를 사용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파견법은 제5조제1항에 의거 26개 업무를 대상(최장 2년)으로 하는 바, 귀 청에서 질의한 업무는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만, 출산·질병·부상 등 결원이 생긴 경우 일시적·간헐적으로 인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최장 6월의 기간을 한도로 파견근로자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도급에 의한 업무위탁으로 추진할 경우 계약서가 도급의 내용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 사업을 수행하는 형태도 실질적인 도급으로 운영돼야만 합법적인 도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노동부는 철도청이 KTX 승무업무 외주화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파견대상 업무가 아니다”고 밝혔고, “도급형태를 가장해 추진해도 파견법에 저촉된다”고 경고까지 했다. 철도청이 당시 작성한 ‘노동부 근로자파견업무 담당자 의견’이라는 문건에는 △철도청에서 추진하려는 외주는 완전도급형태여야 하며, 도급형태를 가장해 추진할 경우 파견법 저촉 △도급 추진시 독립적 업무수행이 가능한 범위(특실서비스)에 한해 가능 △철도청의 해당 업무는 그 성격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등의 내용이 명시돼 있다. 처음부터 노동부는 KTX 승무업무 외주화가 불법파견에 해당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철도청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철도청은 2003년 10월 말 ‘고속철도 운영인력 충원방안’을 수립하면서 승무업무 외주방안을 전면 재검토했다. 이에 따르면 여승무원의 경우 여객전무·차장 업무와 분리·수행이 가능한 특실서비스 업무만 독립시켜 도급위탁하는 방안이 제출됐다.

그럼에도 철도청은 그해 12월 ‘고속열차승무원 운영방안 및 외주화 추진방안’을 통해 안전에 관련된 승무업무와 승객서비스업무를 분리했고, 당초 계획보다 두 배나 많은 인력을 외주화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건교부와 행자부가 끝내 증원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철도청은 여객전무 117명만 기존 철도 인력에서 전환배치했고, 차장(117명, 이후 승객서비스업무로 전환한 뒤 여승무원에 포함)·여승무원(117명) 등 351명은 홍익회에 위탁했다. 이때 여객전무의 명칭이 ‘열차팀장’으로 바뀌었다. 여객취급업무가 외주화됐기 때문에 ‘여객’이 들어가는 직명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불법파견을 감추기 위해 안전업무는 정규직인 열차팀장이 맡고, 승객서비스업무는 외주업체인 홍익회가 담당하는 형태가 갖춰진 것이다. 일용계약직 채용은 ‘비정규직 사용’에 대한 노조의 강한 반발이 예상될뿐더러 노련한 서비스 품질을 기대하기 어렵고, 전문업체로부터의 파견근로자 사용은 관련법상 제약으로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게 철도청의 판단이었다. 철도청도 문건에서 “이러한 방식의 도급위탁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최선의 대안’은 불과 2년여 만에 최악의 결말을 낳았다. 철도공사의 정규직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351명의 KTX 여승무원들은 또 다른 외주업체인 ‘KTX관광레저로 전적하라’는 데 반발해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이번 법원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1천500여일간을 싸워야 했다.
 
다시 불어 닥친 외주위탁, 타깃은 ‘정규직’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을 계기로 KTX 여승무원 사태는 종착점을 향해 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번 사건이 앞으로 전개될 철도공사 업무 외주화의 워밍업에 불과하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철도공사는 내년 1월1일부터 △일산선 차장업무 △의왕지구(철도화물기지) 구내입환 △차량정비단 간접업무 및 화차 정비 △경춘선 시설 및 전기유지보수 등 4개 업무를 조건부로 위탁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를 위해 공사는 다음달부터 정규직을 대상으로 외주업체 전적동의서를 받을 예정이다. 공사는 우선 600여명을 전적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입수한 공사의 ‘조건부 위탁 추진계획(안)’에 따르면 공사는 정원 5천115명의 일괄 감축으로 발생하는 초과현원을 해결해야 한다. 올 1월 기준으로 공사에 근무하고 있는 현원은 3만586명. 연말이 되면 정년퇴직자가 발생해 2만9천928명으로 줄지만, 여전히 정원(2만7천255명)보다 많다. 연말 기준으로 초과현원이 2천673명 발생한다.

이에 따라 공사는 일상적·반복적 업무를 전적에 동의하는 직원과 함께 분리시켜 독립된 기업에 외주화하는 방식의 ‘조건부 위탁’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공사는 조건부 위탁시 수탁회사의 지배구조나 출자방식은 종업원지주회사부터 민간회사나 계열사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구성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 불법파견이나 위장도급을 피하기 위해 수탁회사의 경영과 인사노무에 대해서는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자율경영권을 부여할 예정이다.
 
포장만 바꾼 ‘조건부 위탁’

그러나 조건부 위탁이라 하더라도 철도공사가 불법고용의 의혹을 완벽하게 해소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철도라는 네트워크 사업장에서 일부 업무의 완전한 분리·독립 운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실체도 없는 용역업체의 근로조건을 공사가 미리 정해 놓고 있다는 점에서 위장도급 같은 불법고용 논란이 되풀이될 수 있다.

공사가 직원들을 대상으로 제작해 배포할 예정인 ‘정년연장과 생애소득증가를 보장하는 조건부위탁’이라는 홍보물을 보면, 보수와 정년·근무형태까지 자세히 나와 있다. 예컨대 경춘선 시설의 유지·보수를 맡는 용역업체를 보자. 물론 아직 설립되지도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공사는 근무형태가 일근 또는 숙박 2조2교대로 운영되고, 연봉은 6천만원에서 6천600만원 수준이 보장된다고 홍보하고 있다. 정년도 최대 3년 연장된다. 공사를 퇴직하고 용역업체로 옮기면 명예퇴직금과 퇴직금, 정년연장에 따른 소득보장 등으로 소득증가율이 최대 50.9%에 달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보장이 가능할까. 공사의 ‘조건부 위탁 추진계획(안)’을 보면 위탁회사인지, 공사의 일개 부서인지 헷갈릴 정도다. 공사는 조건부 위탁의 추진목표가 ‘초과현원 해소’에 있는 만큼 2012년 이후 정년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전적 대상자를 선정하겠다는 방침이다. 또 수탁회사가 변경되거나 위탁이 중단되면 새로운 수탁회사로 고용을 승계하고, 고용승계가 불가능하면 공사가 재고용하겠다고 밝혔다. 위탁계약서상에 전적인원이 일정비율 이상 유지될 수 있도록 명시하겠다는 내용도 있다.

심지어 공사가 임금피크제나 정년연장을 시행할 경우 수탁업체로 전적한 직원들에게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년과 보수수준을 조정한다는 내용도 추진계획에 명시돼 있다. 공사가 조건부 위탁회사의 인사·노무관리를 책임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공사는 “KTX 여승무원 사건의 학습효과 때문에 (위장도급 같은) 불법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방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진행형인 ‘KTX 여승무원 사건’

철도노조는 공사의 조건부 위탁방안에 불법 여지가 많다고 보고 법률검토에 착수한 상태다. 노조는 “지난해 공공기관 선진화계획에 따라 5천115명의 정원감축을 강행한 뒤 공사측이 초과현원은 정년퇴직 같은 자연감소분으로 해소할 예정이므로 강제퇴직에 따른 고용불안이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결국 거짓으로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2008년 4차 공공기관 선진화계획 발표 당시 “KTX 2단계 개통과 같은 신규사업에 따른 소요인력 2천여명은 정원 감축과 별도로 검토해 반영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공사가 ‘조건부 위탁’과 같은 기형적인 고용형태를 들고 나온 배경이다.

이에 대해 국토해양부 철도정책과 관계자는 “철도 신규사업에 따른 인력충원 문제는 공사와 논의 중에 있다”며 “초과현원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까지 정원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 조건부 위탁은 자체 업무프로세스 개선에 따른 것이지 공공기관 선진화계획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노조의 입장과 간극이 크다. 권종현 노조 조사통계국장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직원들에게 정년연장과 보수수준을 보장하는 조건부 위탁은 매력적일 수 있겠지만, 결국은 양질의  일자리를 축소시켜 정규직의 고용불안과 청년실업 문제를 심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철도 노사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시행되는 신규사업에 필요한 인력은 2천165명이다. 그런데도 공사는 지난해는 물론이고 올해도 신규채용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올해 5월 인턴 500여명을 선발해 그중 100명을 11월에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도가 대책이라면 대책인데, 이마저도 실현 불가능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인턴 100명을 정규직화하려면 그만큼 정원이 늘어나야 하는데,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철도공사와 국토부는 2년째 신규사업 인력충원에 대해 “논의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국토부도 “철도공사 정원을 늘리려면 기획재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며 말을 아꼈다.

정부의 무리한 공공부문 정원 통제로 말미암아 공기업이 필요한 인력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불법적이고 기형적인 고용형태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KTX 여승무원 사건이 주는 교훈은 “공공기관 인건비를 절감하려다 수백, 수천 배 이상의 사회적 갈등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인건비 절감 위주 공공부문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KTX 여승무원 사건은 언제 어디서 재발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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