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으로 고용노동의 불안정화는 노동자 계급투쟁을 공격하는 신자유주의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와 밀접히 관련이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생산방식의 포스트 포드주의화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4) 그리고 이러한 포스트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으로의 전화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의 다섯 번째 한계를 부른다.

소비자의 새로운 욕구·기대·요구 등을 포함한 생산물 수요에 신속하고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단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및 적시생산으로의 전환으로 특징지어지는 포스트 포드주의화는 특히 고용노동시간과 관련해서는 파트타임 노동으로 특징지어지는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로 드러난다.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는 고용노동시간에 대한 자본의 자의적 통제와 배치 권력을 강화하고 생산의 유연화로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비자와 노동자의 욕구변화에 조응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는 1980년대 독일에서 노동조합의 고용노동시간단축 요구에 맞서 자본이 제시한 카드였고, 결국 고용노동시간단축을 동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결정이 아닌 자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고 배치된 채 실행됐다(Blaschke, 2004: 30쪽).

그러나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라는 ‘원리’ 자체는 소비자 수요에 반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고용노동자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고용노동자는 자신의 상황을 고려한 노동시간의 길이와 배치를 통해 보다 자기 주도적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조건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유럽재단”의 조사를 보면, 이런 이해 때문에 전 시간 고용노동자는 고용노동시간단축뿐만 아니라 자기가 결정하는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를 원한다(Blaschke, 2004: 42쪽).5)

또한 사실 기존 파트타임 노동자, 특히 육아나 개별적인 자기계발 활동을 고용노동과 병행하려는 사람들은 파트타임 노동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보다는, 자본에 의한 고용노동시간의 일방적 설정과 배치, 저임금·파트타임 노동에 대한 취약한 사회적 보호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의 원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첫째 누가 고용노동시간의 길이와 배치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가 문제이고,6) 둘째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에서 고용노동자의 생활유지에 적당한 소득보장과 사회보장이 담보되는가의 문제이다. 이 두 문제가 해결돼야, 자본에 의한 고용노동시간의 ‘나쁜’ 유연화가 아니라 고용노동자에게 유익한 고용노동시간의 ‘좋은’ 유연화가 가능하다.
 
그런데 일괄적인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시간이 개별 고용노동자의 희망대로 다양한 방식으로 축소·배치돼야 한다는 것을 고려치 못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단을 결핍하기 때문에 다섯 번째 한계를 가진다.

획일적인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와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고,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의 노동자 측에서의 지지자, 특히 파트타임 노동을 희망하는 사람을 고용노동시간단축의 투쟁동력으로 이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시간의 좋은 유연화의 조건인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시간에 대한 자기결정권7)과 소득 및 사회보장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시간의 주권(主權)’을 쟁취하는데 한계가 있고, 따라서 고용노동시간정치 자체를 왜소화(矮小化)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생산영역에서 생산방식의 포스트 포드주의화는 비물질적 생산영역의 확대와 비물질적 노동의 확대를 의미한다.8) 비물질적 생산영역은 소통·정보·문화·정서 등의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영역이고, 비물질적 노동은 이러한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이다(HardtㆍNegri, 2001: 382쪽).

그런데 이러한 비물질적 노동은 고용노동시간과 관련해서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시간’과 ‘고용노동 외의 시간’의 경계를 허무는 특징이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고용노동시간에만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며, 고용노동 외의 시간에도 끊임없이 제품개발과 관련된 생각을 떠올리고, 일상의 한 요소를 제품개발에 응용하기 위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감정노동자의 경우는 자신의 감정을 고용노동 외의 시간에도 고용노동시간의 감정표출방식으로 드러내거나, 고용노동 외의 시간에 자신이 겪었던 감정의 요소를 고용노동시간의 감정노동에 응용한다. 비물질적 노동에서 고용노동시간과 고용노동 외의 시간의 경계는 모호하게 되며, 비물질적 생산영역이 확대되고 비물질적 노동이 확산될수록 이러한 현상은 노동세계의 큰 흐름이 된다.9)

고용노동 외의 시간을 ‘질적으로’ 고용노동시간에 결합시키고 두 시간의 경계를 허무는 이러한 비물질적 노동의 시간체제는 고용노동 외의 시간이 고용노동시간을 위한 휴식·회복시간으로 쓰여 지거나 자본주의적 소비를 위한 시간만으로 쓰여 졌던 포드주의적 산업노동의 시간체제10)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여전히 포드주의적 산업노동의 시간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주장, 즉 고용노동시간과 고용노동 외의 시간의 엄격한 구분을 바탕으로 하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여섯 번째 한계가 있다.

비물질적 노동이 확대되는 포스트 포드주의 생산체제하에서,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시간만을 단축하지, 고용노동 외의 시간이 질적으로 고용노동시간화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고용노동시간단축이 고용노동 외의 시간의 질적인 고용노동시간화를 어느 정도 저지할 가능성을 아예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니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을 통해서 ‘고용노동 외의 시간 내의’ 고용노동을 위한 계기가 축소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반대로 고용노동시간이 단축된 만큼 ‘고용노동 외의 시간 내의’ 고용노동을 위한 계기가 확대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고용노동시간단축 그 자체로는(특히 비물질적 노동의 경우에) 고용노동 외의 시간의 질적인 고용노동시간화를 완전히 차단할 수 없으며, 총체적 노동시간의 단축을 실현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신자유주의화, 포스트 포드주의화, 비물질적 생산체제화는 큰 틀에서 1970년대 계급투쟁에 대항해 진행되어 온 ‘자본의 사회에 대한 실질적 포섭과정’의 특징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살펴볼 때, ‘사회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정’은 유통과 재생산 영역을 자본주의에 ‘직접적으로’ 포섭해 가는 것을 말하는데,11) 이로써 고용노동자 외에도 학생·주부·실업자 등 모든 사회구성원이 자본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Negri, 1994: 223~5쪽).

예를 들어, 우리가 고객불만센터에 제품의 불만을 토로해 실제적으로는 제품의 개선사항을 알려주거나, 블로그에 제품사용 후기를 올려 의도치 않게 제품을 홍보하고, 우리의 일상적인 소소한 아이디어가 제품개발자에게 포착되어 제품에 곧바로 응용되는 등, 우리 일상활동의 모든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마디를 형성하게 되고, 자본의 이익에 직접 연관돼 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고용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도 자본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복무하는 활동을 하게 되는 셈이다.12) 그러나 자본은 이런 활동들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사회가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되어 갈 때,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사람들의 일상활동이 자본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복무하는 활동으로 돼 가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는 일곱 번째 한계를 가진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일반적 고용노동자가 ‘고용노동시간 혹은 고용노동 외의 시간’에 의도치 않게 그리고 지불받는 것 없이 ‘자기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활동을 하거나,13) 고용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그리고 지불받는 것 없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은 모든 사람들의 전(全)생활시간에 대한 자본의 ‘직접적’ 정복경향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14)
 
기본소득을 통한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의 가능성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첫째, 자신의 고용노동 중심주의 때문에 생계필연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수행하는 시간 전체를 줄이지는 못한다. 둘째, 성·인종·민족을 매개로한 노동의 분할을 간파하지 못함으로써 남성·자인종·자민족 고용노동자를 위해 여성·타인종·타민족 고용노동자를 희생시킬 수 있다. 셋째, 자본주의의 핵심법칙인 가치법칙을 비판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으로부터의 질적인 해방을 열 수 없고, 결국 노동으로부터의 양적 해방도 담보할 수 없다.

넷째, 신자유주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저임금 노동자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저임금 고용관계를 양산할 수 있다. 다섯째,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를 지지할 수단을 결핍함으로써 고용노동시간정치를 왜소화할 수 있다. 여섯째, 비물질적 노동의 확대과정에서 야기되는 고용노동 외의 시간의 질적인 고용노동시간화를 막지 못한다. 일곱째, 사회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으로 사람들의 일상시간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시간으로 전화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시간단축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노동시간정치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기존의 고용노동시간단축이 폐기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용노동시간단축이 담보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고, 고용노동시간단축이 야기하는 노동자 간 갈등을 예방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시간정치를 고용노동시간단축과 결합하자는 것이다.

여기서는 ‘모두를 위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고용노동시간단축정치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시간정치,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정치로 제시하고자 한다.
모두를 위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① 모든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속하고 보장되는, ② (빈곤을 퇴치하고 사회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생활을 보장하는 액수의, ③ 곤궁함에 대한 심사(소득심사·재산심사)하지 않는, ④ 노동강제·노동의무 및 활동강제·활동의무가 없는, ⑤ 국가에 의해 지불되는” 소득이다.(Blaschke, 2009: 299쪽)

기본소득은 고용노동시장 외적인 생계가능성을 보장하고,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에 대한 생계적 의존을 줄임으로써 고용노동시장에 독특한 영향을 미치고, 이에 따라 무엇보다 고용노동시간정치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한다.

기본소득은 고용노동시장 진출 희망자를 줄이거나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시장 탈퇴권을 강화함으로써 고용노동시장에서 노동력 공급을 줄이고, 이를 통해 고용노동자는 자본·기업과의 투쟁·협상에서 발언권을 높일 수 있다(Vobruba, 2007: 104쪽). 왜냐하면 기업이 일정한 규모의 고용노동자에게 계속적으로 의지하는 반면, 그들을 대체하고 그들과 경쟁하고 결국 그들을 위협할 ‘산업예비군’은 기본소득을 통해 축소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을 통한 고용노동자의 이러한 투쟁력·협상력 강화는 우선 고용노동자가 자신의 자유시간 확보를 위해 고용노동시간단축 자체를 추진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또한 이것은 자본의 술책으로 고용노동시간이 단축되는 대신 노동강도 강화를 포함한 다른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것을 저지해, 고용노동시간단축 실현의 의의가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보다 큰 것을 의미한다. 기본소득을 통한 고용노동자의 투쟁력 증대는 노동조건 악화를 저지하는 수세적 전략만이 아니라, 노동과정에 대한 고용노동자의 자기결정권을 강화시키는 공세적 전략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동과정에서 지배기술을 철수시키고 노동의 인간화를 위한 기술의 도입을 촉진시키며, 노동자의 노동과정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권을 강화시킬 수 있다. 착취의 문제를 잠시 덮어둔다면, 기본소득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노동 안에서의 해방을 촉진하는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에서 지적했던 고용노동시간의 좋은 유연화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애초 고용노동자 스스로 결정하는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가 실행되지 못하는 이유는 고용노동자가 고용노동시간의 길이와 배치에 대한 권한이 없고, 고용노동시간이 유연화될 경우 소득보장이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말한 것처럼 고용노동자의 투쟁력·협상력을 증대시켜 노동과정·고용노동시간에 대한 결정권을 강화할 수 있고, 사회적 생활을 유지할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소득보장의 불투명성을 제거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고용노동자에게 유리한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15)

그리고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사회적 생활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고용노동자간 분할을 통해서 야기되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을 둘러싼 갈등을 극복하고, 오히려 이들의 연대로 고용노동시간단축을 추진하게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용노동시간단축에 대한 반대(특히 여성·타인종·타민족 고용노동자와 불안정 고용노동자)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을 통해서 그들의 소득저하가 예상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성·타인종·타민족 고용노동자와 불안정 고용노동자는 ‘저임금’ 고용노동자라는 공통점을 지니며,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이들의 임금수준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16)

따라서 우리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을 소득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기본소득을 통한 평등한 생활보장은 고용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혹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기존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타 노동자 집단과 서로 경쟁하고 적대적인 투쟁을 벌이는 상황을 제어할 수 있고, 고용노동자가 그동안 억압되었던 자유시간 확대에 대한 이해를 직접적으로 표명할 수 있도록 한다. 결국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고용노동시간단축을 실현하기 위해 연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고용노동시간단축을 위한 중심축이고, 고용노동시간단축정치는 자기실현을 위해서 기본소득과 결합돼야 한다.
 
이상에서 기본소득이 고용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유리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본소득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고용노동시간단축을 위한 고용노동시간정치인 것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기존의 고용노동시간정치가 담보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도 노동시간단축을 가능하게 하는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정치’이기도 하다.

우선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이 아닌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줄일 수는 없었으나, 기본소득은 사람들의 모든 활동에 소득을 보장해 줌으로써 이를 가능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이 고용노동만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필수적 활동으로 보다 폭 넓게 정의될 수 있으며, ‘자유롭고 창조적인 활동을 위한 시간을 위해 생계적 활동을 위한 시간 자체를 축소시켜야 한다’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념에 부합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기본소득은 고용노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고  조건 없이 소득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활동시간과 소득의 양은 비례하지 않고 그 관계가 아예 없으며, 하나의 활동이 만들어 낸 물질적·비물질적 부와 다른 활동이 만들어 낸 물질적·비물질적 부가 각각에 들어간 활동시간을 기준으로 교환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지출된 활동시간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교환과 분배는 지출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따라 교환되고 분배되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상품을 만드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치량을 결정하며 이에 따라 상품이 교환된다는 자본주의의 가치법칙, 그리고 상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노동시간만큼의 가치량을 임금으로 받는다는 임금법칙과 대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원리는 더 많은 가치, 더 많은 노동에 대한 사람들의 강제된 그리고 동시에 내면화된 열망을 진화하면서, 한편으로 노동 밖의 자유로운 활동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의미를 추구한다. 한편으로는 사람 자신의 입장에서 곱씹어 볼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

기본소득은 더 많은 가치를 추구하는 생산체제·교환·생산·분배의 규제적 원리로 노동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를 비판하고, 사회구성의 원리를 노동으로부터 이탈시키는 노동으로부터의 ‘질적’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으로부터의 양적 해방으로서의 고용노동시간단축이 자본주의가 주입한 노동자의 허위욕구에 의해 좌초되는 것 역시 예방될 수 있다.

이렇게 기본소득이 노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원리에 맞선 것이라면, 기본소득은 또한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로 인한 자본주의적 노동의 확대에도 저항할 수 있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이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 외 시간의 질적인 고용노동시간화를 차단할 수 없는 반면, 기본소득은 고용노동 외 시간이 질적으로 고용노동시간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비물질적 노동의 특성이기도 한 ‘생산물의 제작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의 기존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이는 것은 비물질적 생산영역의 확대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제거될 수 없다. 이러한 포기는 오늘날 인류의 생산력 발전의 결과를 부정하는 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화살의 방향을 비물질적 노동 자체가 아니라,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에게 돌려야 한다. 비물질적 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의 회수라는 측면에서 고용노동 외 시간의 질적인 고용노동시간화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자본이 비물질적 노동의 수확을 전취하는 것을 막고 노동자가 이를 전유할 수 있다면, 이는 비물질적 노동영역에서 고용노동 외 시간이 질적으로 생산물 생산을 위해 직접 기여하는 시간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자본을 위해 고용된 노동’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를 이렇게 볼 때, 고용노동 외 시간의 질적인 고용노동시간화에 맞설 방법으로 고용노동자의 소득인상이 제시될 수 있다. 이 방법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용노동자의 임금인상이고, 다른 하나는 고용노동자가 기존 임금에 덧붙여 기본소득을 따로 더 받는 것이다.17)

그런데 이러한 소득인상 방법 중에서, 기본소득은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시장 탈퇴권을 강화함으로써 비물질적 노동의 수확을 전취하려는 자본에 맞서는 추가적 수단을 제공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고용노동 외 시간의 질적인 고용노동시간화에 대한 효과적 저항방법이다. 물론 이것은 기본소득이 임금인상투쟁과 결합하는 바람직한 기획을 부정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또한 사회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정에서 사람들의 일상활동이 자본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복무하는 활동으로 돼 가는 것에 제동을 걸 수 있다. 기본소득은 자본이 고용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소득을 지불하며,18) 따라서 사람들의 일상 활동이 자본에 복무한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적어도 사람들의 일상 시간이 자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점취되는 것을 막는다.
 
결론 : 기본소득 그리고 …

위에서 살펴봤듯이 기본소득은 고용노동시간단축 자체를 촉진한다. 기본소득은 고용노동시간단축이 포함하지 못하는 노동시간단축,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길을 여는 새로운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정치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고용노동시간단축을 기본소득과 결합하는 대안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자본주의 지배의 물질적 토대인 사적 소유의 문제, 착취에 대한 직접적 비판은 우회될 수 없다. 노동자 자주관리 등을 포함한 전통적인 반자본주의 전략도 여전히 적극적으로 사고돼야만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더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차적인’ 기본소득은 기본소득으로 확보되는 사람들의 자유시간이 다시 자본주의적인 소비주의에 포섭되는 것을 방조할 위험이 있다. 기본소득은 자유시간을 자율적이고 자기창조적인 활동을 위해 쓰도록 돕는 대안적인 사회적 체계·조직·문화정치에 의해 보조돼야 한다. 기본소득은 자신이 확보하는 자유시간이 자본주의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기본소득의 도입 이후를 기본소득 자체와 함께 고려해야 하는 독특한 노동시간정치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의 노동시간단축정치는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운동 내에서 수많은 논쟁·갈등·적대를 불러왔다. 한 가지 원인은 노동시간단축정치가 고용노동시간단축정치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의 고용노동시간단축정치가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정치로서의 기본소득과 결합된다면, 노동자운동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노동을 지배하는 그리고 노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시간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노동조합은 ‘기본소득이 소득보장을 통해서 노동조합의 조직률 혹은 조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조합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떨림을 가질 수 있다(Blaschke, 2004: 33쪽).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본다면, 기본소득은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비판세력인지를 판가름 할 시험대이며 오히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극복세력으로 거듭날 기회를 제공한다.
 
[각주]
4) 물론 포스트 포드주의화 또한 신자유주의처럼 자본에 의해 추진되는 자본의 전략이다. 그러나 포스트 포드주의화는 이미 생성된 대중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본의 이윤에 복무하도록 활용하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노동자와 대중의 일방적 희생만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전략과 ‘이론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 포드주의화와 신자유주의는 포스트 포드주의화가 구체적 생산방식과 더 관련이 있고, 신자유주의가 인사정책, 노동시장정책과 더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 포드주의와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계급투쟁에 대한 자본의 재구조화 전략으로 거의 ‘동시에’ 출현했고, ‘현실적으로’ 중첩적으로 노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 차이에 대한 인식이 종종 환기되지 못했다.
5) 심지어 고용노동자는 기업이 “시간보수주의” 때문에 다양한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 가능성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기업을 비판하기도 한다(Vobruba, 2007: 212쪽).
6) 이에 대해 보브루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동시간유연화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상노동일의 정상 배치와 다른, 노동시간의 길이 혹은/그리고 배치의 선택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우선 누가 선택할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어떤 논리를 따라 정상노동일로부터 벗어나는가가 열린 채로 남ㅌ에 따라 노동시간의 길이와 배치를 선택하거나. 두 가지 가능성은 ‘유연화’라는 말 외에 서로 공통적인 것을 거의 가지지 않는다. 첫 번째 경우에 엄격한 시간강제로부터의 부분적 해방이 문제이고, 두 번째 경우에 엄격한 시간강제로의 종속의 완성이 문제이다. 따라서 노동시간유연화의 사회정치적 내용을 판단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는 것이 요점이다. 바로 누가 선택하는가?”(Vobruba, 2007: 96쪽)
7) 보브루바(Vobruba, 2007: 100쪽)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은 노동력 공급을 줄임으로써, 고용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여 고용노동시간의 유연화가 자본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을 막고, 고용노동자에 의해 결정되도록 돕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시간의 좋은 유연화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전시간 고용노동자의 노동력 공급만을 줄일 뿐, 전체 노동력의 공급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는 실업자, 더 많은 임금을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는 저임금 고용노동자가 상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시간의 좋은 유연화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고용노동시간단축과 고용노동시간의 좋은 유연화를 함께 추구하는 전략의 필요성을 줄이는 것은 아니다.
8) 이는 탈산업사회, 서비스사회, 정보사회, 지식사회 등 다양한 용어로 불려왔다. 그러나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한계는 그것이 노동사회의 종말론을 유포하고 기존의 노동자운동을 공격하기 위해서만 기능했으며, 정작 서비스, 정보, 지식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노동형태와 노동조건을 분석하고,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개시방향을 탐색하지 않는데서 극명히 드러난다. 비물질적 생산체제로의 변화를 기존 마르크스주의처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처럼 유토피아로 포장하지도 않는, 비물질적 생산체제화의 ‘양가성’에 대한 탐색으로는 특히 다이어-위데포드(Dyer-Witheford, 2003) 참조.
9) 네그리의 자율주의로 한정되지 않는 포스트-오페라이스모(Post-Operaismo)의 입장에서 이러한 경향을 분석한 것으로는 비르노(Virno, 2004) 참조. 노동사회학에서는 이를 ‘노동의 탈경계화’(Entgrenzung von Arbeit)라고 개념 짓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트샬·보쓰(Gottschall·Voß, 2005) 참조. 그런데 이렇게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시간과 고용노동 외의 시간의 경계가 불투명해지는 것은, 이후에 살펴볼 ‘사회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경향’으로 더욱 명확해지겠지만, 이제 생산물의 가치가 더 이상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따라서 가치법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낳는다. 그러나 오늘날 생산물(상품) 교환 원리를 여전히 가치법칙 ‘체계’에 더 정치적이고 폭력적으로 묶어두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의 지배는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가치법칙이 자신의 경제적 토대를 상실해가고 있는 상황을 반영해서, 우리는 이를 하나의 과정으로서, ‘가치법칙의 형해화(形骸化)’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10) 여기서 또한 이 글에서 ‘고용노동시간 이전 혹은 이후의 시간’을 자본주의의 시간구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자유시간’ 혹은 ‘여가시간’란 말로 표현하지 않고, 다만 글자 그대로 ‘고용노동 외의 시간’으로 번거롭게 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1) 네그리에 따르면, 케인스주의 시대의 ‘사회에 대한 자본의 형식적 포섭’과 구분되는 ‘사회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은 다음을 의미한다. “자본은 사회 전체에 스며들어 정복해 가고, 생산과 소유 그리고 유통의 낡은 형태들이 파괴되는 순간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노동과정 형태도 유일하게 현존하는 양식이 된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 된다. […] 공장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산은 사회적이고, 모든 활동은 생산적이다.”(Negri, 1996: 183쪽)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회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을 진행 중인 ‘과정’, 하나의 주요한 ‘경향’으로 보지, 네그리의 후기 이론이 밝히듯이 실질적 포섭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는 포스트 포드주의‘화’, 비물질적 생산영역의 ‘확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포스트 포드주의화, 비물질적 생산의 확대, 사회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정은 노동자 계급투쟁에 대한 자본의 재구조화 전략으로 진행되는 것이며, 계급투쟁이 종료되지 않은 한 완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경향이 오늘날 이미 완료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경험적 자료를 볼 때, 여러 자율주의에 대한 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반(反)사실적이기도 하다.
12) 이렇게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본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복무하게 될 때, 네그리는 이들을 ‘사회적 노동자’라고 부른다(Negri, 1988). 네그리의 사회적 노동자 개념은 이후 저작에서 ‘다중(multitude)’ 개념으로 확장되는데, 여기에서 ‘사회과학적’ 개념에 ‘존재론적’ 요소가 덧붙여진다. 이에 대해 여기서 더 논의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13) 고용노동자가 고용노동 외의 시간에 의도치 않게 그리고 지불받는 것 없이 ‘자기 업무와 직접 관련이 있는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활동을 하는 경우, 이는 위에서 말했던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 외의 시간의 질적인 고용노동시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는 범주적으로 다르다.
14) 다시 말하지만, 사회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으로 사람들의 생활시간이 자본을 위한 ‘직접적’ 생산시간이 되는 이러한 경향은 사람들의 생활시간을 자본주의적 소비시간으로 만드는 이전부터의 경향과 다른, 새로운 현상이다.
15) 최근 제기되고 있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 논의는 노동자의 자기결정적 유연성이 아니라 기업 주도의 유연성을 말하며,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통한 생활보장이 아니라 고용노동을 매개로한 기초보장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논의와 다르며,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다.
16) 물론 ‘임금삭감 없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기본소득과 결합된 고용노동시간단축’에 비해 모든 고용노동자의 고용노동시간을 실질적으로 단축하는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저임금 고용노동자의 경우, 임금을 보존하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이 실현되더라도, 자신의 저임금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단축된 고용노동시간을 다른 고용노동을 위한 시간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저임금 고용노동자는 임금삭감 없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이 도입될지라도, 이를 투 잡스(two jobs)의 기회로 활용하도록 사회구조적으로 강제된다. 따라서 저임금 고용노동자는 임금삭감 없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이 제기되더라도, 이를 위해 투쟁할 특별한 동기를 가지지 않는다.
17) 그런데 임금인상과 기본소득을 따로 떨어진 것으로 보면, 기본소득으로 고용노동자의 생계가 보장되는 만큼, 기업이 임금을 인하하고 국가가 이를 보장하지 않겠는가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기본소득 액수가 낮다면, 이러한 자본의 ‘콤비임금’ 전략은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정의한대로 기본소득 액수가 사회적 생활을 보장할 만큼 충분히 높으면, 이는 고용시장에서 노동력 공급을 축소시킬 것이고, (예비)고용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여 자본이 임금을 인하시키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즉 기본소득은 최저임금 효과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위의 문제제기는 최저임금제가 없거나 폐지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으나, 우리의 주장은 기본소득이 최저임금제와 결합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본소득과 최저임금제가 결합되어야 더 긍정적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블라쉬케(Blaschke, 2004: 45쪽; 2009: 304~9쪽) 참조.
18) 그러나 기본소득의 재원이 자본의 이윤을 회수하는 징세방식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간접세나 노동자 집단 내부에서만 소득이 재분배되는 징세방식으로 마련된다면, 이러한 기본소득의 의의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기본소득은 오히려 사회 불만을 ‘거짓으로’ 해결하려는 자본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재원마련 방식과 바로 위 각주에서 말한 기본소득의 액수는 ‘해방적’ 기본소득을 판별하는 두 가지 핵심적 기준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