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필자의 논문 「마르크스 노동패러다임의 재구성」(『마르크스주의 연구』 2009년 가을호)을 바탕으로 노동시간단축과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한 때 노동시간단축은 한국뿐 아니라 소위 선진국 노동자운동의 화두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으로 노동자운동이 수세적 입장에 몰리자 노동시간단축은 어느새 노동자운동의 요구목록에서 하단에 자리 잡았다.

물론 자본의 ‘고용 없는 성장’ 담론에 맞서 노동측은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노동·노동시간과 관련된 자본주의의 원리와 자본주의의 변화를 고려하면서 그간의 노동시간단축정치를 발전시킴으로써 제시된 것이 아니라, 총고용보장을 위해서 즉자적으로 제시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간단축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오히려 노동자에게 손해가 될 수 있다는 반론이 노동자운동 진영 내부에서도 터져 나왔다. 따라서 목이 쉬어라 외쳐댔던 “노동시간단축 쟁취”는 이제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관념적 정치가 돼 버렸다.

이 글은 이러한 노동시간단축에 대해 더 깊이 고찰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노동시간단축을 당위로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미경을 통해 세포의 특정한 모습을 확장하듯이 자본주의의 원리 및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의 일부 특징을 적극적으로 포착해, 노동시간단축의 타당성과 가능성을 다시 판단하려는 모험이기도 하다.

이하에서는 우선 자본주의에서 노동시간단축이 왜 제기되는지를 밝히고, 노동시간단축의 전부로 인식되던 고용노동시간단축이 어떻게 자본주의 원리에 부딪혀 좌초할 수밖에 없었으며, 오늘날 자본주의의 변화에 따라 부적합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으로서의 기본소득이 고용노동시간단축과 결합돼 대안적 노동시간정치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노동시간단축의 필요성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노동시간단축
 
노동시간단축의 의의는 노동개념에 대한 이해와 노동과 노동시간의 자본주의적 구조화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은 노동자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서 항상 핵심적인 주제였음에도 당연한 전제로 치부되었을 뿐, 정작 비판적으로 분석되지 못했다.

특히 노동자운동의 권위 있는 이론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을 생산력과 동일시하고, 단지 노동·생산력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사적 소유만을 비판했다. 노동 그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유보 없이 계승·발전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됐다.

이에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을 단순히 생산력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본질 실현의 중요한 매체로 보면서, 자본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서의 노동의 소외를 비판하고 노동에 대한 이해를 확장했다. 그러나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의 본질적 긍정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공통된 지반에 머물러 있었다. 노동이 인간과 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며 노동을 통해 인간이 자기실현할 수 있다는 전통 마르크스주의1)의 노동개념은 ‘긍정적 노동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긍정적 노동개념으로부터 ‘노동 안에서의 해방’이 자본주의 비판과 대안사회 구성전략으로 제시된다. 노동이 인간의 자기실현에 본질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해방은 인간이 수행하는 노동 안에서의 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에 대한 본질적 긍정은 자본주의에서 억압받는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를 재고하고 노동자 투쟁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긴 하지만, 노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시대·사회에 따라 달랐으며 노동숭배와 자본주의가 근본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도외시하는 문제가 있다.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긍정적 노동개념은 자본주의의 노동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가치’의 원천으로 간주되며 자본주의의 핵심 구성요소는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전(全)생활과 사회구조는 노동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노동은 제1의 사회활동, 심지어 윤리적 활동으로 자리매김 된다. 이러한 노동이데올로기는 인류역사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만 작동하는 것이다. 아렌트(Arendt, 1996)가 분석했듯이 서구 역사에서 노동은 애초 생존을 위해 수행해야만 하는 필수활동으로 이해됐고, 가능하면 벗어나야할 것, 고통·저주로 간주됐다.

그러나 노동가치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성립은 이러한 노동의 지위를 역전시켰다. 결국 노동이데올로기와 이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노동강제의 국가기구가 자본주의의 중심축임에도,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은 자본주의의 노동이데올로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본주의 비판운동이 노동중심주의에 갇힌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억압의 핵심을 사적 소유나 노동착취가 아니라 노동의 부과와 강제에서 보고, 노동의 근본적 축소와 노동의 폐지를 주장하는 조류가 존재했다. 이들은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를 형성했다.

특히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Lafargue, 1997)는 노동할 권리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노예로 머무르는 권리’이며 진정한 해방의 권리는 오히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고 주장했다. 노동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활동에 불과하며, 자본은 이러한 노동을 사람들에게 더 많이 부과하고 강제하는 것을 통해 이익을 얻는다는 이단적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은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긍정적 노동개념과 반대로 ‘부정적 노동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수단의 의미만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실현 및 해방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 밖의 자유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노동시간의 최대한의 축소’와 ‘자유시간의 극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방향이 제시된다. 바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그것이다.

부정적 노동개념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전략을 특징으로 하는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는 진정한 삶의 의미가 음미될 수 있는 가능성이 노동 밖의 자유활동에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올바르게 밝혔다. 그러나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이 노동에서 생계수단적 의미 이상을 느낀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일차적으로 생계를 위한 수단적 활동으로 정의될 수 있는 노동 또한 자유로운 노동과 해방적 노동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결국 이단적 마르크스주의의 부정적 노동개념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론은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긍정적 노동개념과 노동 안에서의 해방론에 대한 즉자적인 반정립일 뿐, 노동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과 노동해방은 어떻게 개념화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는 양 극단을 통합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도의 토대는 이미 마르크스에게서 발견된다.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1844)에서 노동의 자기실현적 계기를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유적 존재임을 증명하고 현실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긍정적 노동개념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노동을 자기실현적 행위로 보면,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노동의 소외되지 않은 노동으로의 전환이 노동자운동에 중요한 문제로 부상한다. 소외되지 않은 노동, 해방된 노동, 자유로운 노동 등과 같은 노동 안에서의 해방조건을 밝히고, 그 조건을 쟁취하는 것이 노동자운동의 과업이 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 안에서의 해방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폐지, 노동착취의 근절, 모든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 민주적 소통과 과학 등에 바탕을 둔 새로운 노동형태를 통해서 가능하다(MEW 23: 511-2쪽; 25: 113-4쪽, 828쪽; 42: 512쪽, 596쪽, 602쪽).

그러나 이렇게 긍정적 노동개념과 노동 안에서의 해방론만을 반복한다면,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적 노동이데올로기 수용을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하나의 마르크스를 발견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비판 요강』(1857)을 거치면서 자신의 노동개념과 노동해방론을 확장시켰다.

바로 노동은 자기실현의 계기를 가지고 있고 인간의 자기실현에 기여를 할 수 있고, 노동은 ‘일차적이고 기본적으로’ 생계라는 외적 목적에 구속된 활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이 아무리 자유로워 질지라도 인간의 ‘완전한’ 발전을 위한 고차원적 활동은 아니며 가능한 축소되면 좋다는 것이다(MEW 23: 57쪽, 280쪽; 25: 828쪽; 26.3: 252~3쪽; 42: 244쪽, 601쪽, 603쪽, 604쪽, 607쪽).

이는 긍정적 노동개념에 부정적 노동개념을 결합한 ‘이중적 노동개념’과 노동 안에서의 해방을 계속 추구하면서도, 이에 덧붙여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이중적 노동해방’이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설정돼야 함을 함의한다.

이중적 노동개념과 이중적 노동해방론은 인간이 노동에서 느끼는 자기실현적 의미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노동이데올로기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이단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운동은 생계의 활동으로서 노동을 가능한 축소시키고 자유활동을 확대시키되(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노동 자체는 자유롭고 해방된 노동이 되도록(노동 안에서의 해방) 이중전략을 구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언급은 이를 보다 분명하게 말해준다.
“사실 자유의 왕국은 곤궁함과 외적인 합목적성을 통해 결정되어 있는 노동이 멈추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 본성상 본래의 물질적 생산의 영역 너머에 있다. 야만인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 자연과 격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문명인 또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문명인은 모든 사회형태에서 그리고 모든 가능한 생산양식 하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문명인의 발전과 더불어 필연성의 왕국은 확대된다. 왜냐하면 욕구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산력도 확대된다. 이 영역에서의 자유는 사회화된 인간, 즉 연합된 생산자들이 그들과 자연의 이러한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지배되는 것처럼 물질대사에 의해 지배되는 대신, 물질대사를 그들 공동의 통제 아래 가져오는 것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최소한의 힘 소비와 더불어 그리고 그들의 인간적 본성에 가장 가치가 있고 어울리는 조건 하에서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것에서만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필연성의 왕국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필연성의 왕국 너머에서, 자신이 자기목적으로 간주되는 인간 역량의 발전, 자유의 진정한 왕국이 시작한다. 그러나 이 왕국은 자신의 토대로서 필연성의 왕국 위에서만 꽃필 수 있다. 노동일의 단축은 근본조건이다.”(MEW 25: 828쪽)

여기서 우리의 본래 주제인 노동시간단축은 이중적 해방 중에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가장 주요한 전략으로 위치 지어짐을 알 수 있다. 노동시간단축은 생계라는 외적 목적을 위해 수행되는 노동시간을 축소시키고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확대하려는 인간의 ‘존재론적 해방요구’에서 제기되는 것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노동강제와 노동부과를 축소하고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노동 안에서의 해방이 노동시간이 과도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노동시간단축(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노동 안에서의 해방의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노동자운동이 취해야 할 두 가지 방향과 거기에서 차지하는 노동시간단축의 원론적 위치 및 필요성에 대해 알아봤다. 그러나 아직 자본주의 특수한 착취개념이 설명되지 않았다. 이 착취개념을 통해 노동시간단축의 의의는 급증한다.  
 
잉여노동시간단축과 고용노동시간단축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능력, 즉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드는 사회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일정기간 동안 구매하는 대신, 노동자에게 같은 기간 동안 노동자 자신 및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지불한다.

여기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기간(노동자가 일하는 전체시간)은 그 기간 동안의 노동자의 생계를 위한 비용(노동력 재생산비용)을 마련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시간과 같지 않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계비용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보다 더 오래(노동계약 상에 적혀 있는 대로) 자본가를 위해서 일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착취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서 이러한 노동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자본가는 더 많은 이익·착취를 위해서 노동자에게 더 많은 노동을 강요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필요노동시간으로, 자본가를 위해 필요노동시간을 너머 노동계약대로 더 일하는 시간을 잉여노동시간으로 설정했다.

노동설비의 재투자·개선비용 등을 위한 잉여노동시간을 제외한다면, 필요노동시간은 노동자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이고 잉여노동시간은 노동자에게 불필요한(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잉여의 노동시간인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에서는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이 구분되고, 자본가가 노동자의 잉여노동시간의 생산물을 고스란히 가져간다. 이로 인한 차별과 억압의 계급사회가 견고히 유지된다면, 노동자운동이 사활을 걸 곳은 분명해진다. 바로 잉여노동시간단축이다.

물론 잉여노동시간에 만들어 낸 생산물의 이익은 임금인상과 같은 방식으로 회수가 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을 중심으로 조직화돼 있고 자본주의에서 나머지 생활시간이 노동시간을 위해 복무하도록 배치되고 쓰여 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노동시간이 생활시간 형성의 본질적 결정자”(Vobruba, 2007: 210쪽)라는 것을 고려할 때, 고용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잉여노동시간단축과 잉여노동시간단축을 통한 고용노동시간단축의 의미와 필요성은 결코 임금인상으로 상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노동시간은 첫째, 인간역량의 발전을 위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증대를 위해 단축돼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의 노동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해 단축돼야 한다. 셋째, (특히 고용노동시간의 경우) 자본주의적 착취의 근간인 잉여노동시간을 회수하기 위해서 단축돼야 한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을 포함한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은 노동자운동의 핵심정책이어야 하는 것이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의 한계
 
1980년대 이래 기술발전과 자동화로 인해 노동사회가 소멸한다는 ‘노동의 종말론’의 대두로, 노동시간단축은 노동자운동 측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됐다.

산업구조가 노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노동시간의 단축이 실현될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낙관론과 자본주의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술적 토대로부터 곧장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상할 수는 없으며, 자본이 우세한 권력을 이용해 기술발전과 자동화를 대량해고로 연결시킬 수 있다는 비관론이 교차했다.

이러한 일희일비(一喜一?)에 대한 대안으로 고용노동시간단축을 통해 축소된 고용일자리를 나눠 고용노동자 공동의 생존을 보장할 뿐 아니라, 또한 기술발전의 열매(자유시간)을 누리자는 현실주의적 ‘고용노동시간단축’이 제기됐다.

특히 일자리 나누기는 자본 측에서 대량해고로 유효수요가 감소하거나 체제불안이 증가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고용노동자 측에서 생계수단인 일자리를 잃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는 ‘자동화 시대의 윈-윈(Win-Win)전략’으로 선전됐다.

대량실업이라는 위협 아래에서, 이미 자본주의 비판의 성격을 탈각하고 체제 내화된 노동자운동과 소속 조합원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던 노동조합 또한 이러한 고용노동시간단축을 중심 강령으로 무리 없이 채택할 수 있었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이 노동자운동의 당연한 과제인 것은 분명한다. 그러나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자본주의의 원리와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를 고려하면서 주의 깊게 제시돼야 한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당위만으로 제시돼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변화된 구조에서 보조 장치를 갖추지 못한 노동시간단축 요구는 오히려 일부 노동자를 배제하고 차별해, 전체 노동자운동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그것이 임금노동관계에서 잉여노동시간단축으로 기능하는 한 자본의 이윤을 회수하고 착취시간을 줄이는 것을 의미하기에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비판적이고 해방적인 것이지만, ‘노동시간단축 일반’이 ‘고용노동시간단축’으로만 생각될 경우에는 자본주의의 기본원리 및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에 맞서지 못하고, 심지어 노동자 분할지배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이하에서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의 한계를 더 면밀히 검토해 볼 것이다. 이는 고용노동시간단축 이외에 노동시간단축을 위한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원리와 고용노동시간단축의 한계
 
자본주의체제에서는 자본주의 조직에 속하는 고용노동만 노동으로 인정되고 임금이 주어지며, 가사노동을 포함한 ‘고용노동이 아닌 노동’은 노동 범주에서 쫓겨난다. 이는 자본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조직에 구속된 노동자의 잉여노동을 통해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자본은 고용노동을 절대시할 필요가 있다.2)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노동은 애초 고용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이 노동의 범주에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 범주가 지속적으로 축소돼 왔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노동을 통한 사회적 생산력의 증가와 이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확산으로, 노동은 특히 1800년대 생계활동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된 생산적인 활동으로 그 범위가 축소됐고,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고용노동·임금노동이 노동 범주의 전부가 됐다.

더 나아가 1950~1975년 중심부 자본주의에서는 남성이 주로 수행했던 고용노동만이 ‘정상노동’으로 불렸다(Kocka, 2001: 8~9쪽). 이러한 노동범주 축소의 역사는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노동에 대한 이해가 사회적 권력관계의 표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Kurz-Scherf, 2007: 277쪽).

따라서 우리가 노동을 고용노동으로만 생각하고 고용노동만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운동을 전개한다면, 이는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계급지배적 이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고용노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기 어렵다. 특히 노동자운동의 고용노동 중심주의는 자동화로 인해 노동이 소멸하고 있고, 오늘날 노동은 더 이상 사회의 중심적인 축이 아니며 노동자운동은 주변화돼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그에 동조하는 꼴이 된다.

반대로 노동자운동의 원천인 노동 일반은 오히려 넘쳐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고용노동이 아닌 노동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고용노동 중심주의로 인해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 채 오히려 자신의 사망신고서에 서명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고용노동시간단축의 첫 번째 한계가 분명해진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 범주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생계필연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수행하는 시간 전체를 줄이지는 못한다.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고용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줄이는데 기여할 수 있으나, 고용노동이 아닌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줄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용노동시간단축은 노동자의 일부인 고용노동자만을 위한 노동시간정치, 부분적 노동시간정치라는 제한을 가진다.
 
또한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자본주의의 노동분할과 관련해서 두 번째 한계를 지닌다. 성·인종·민족 등의 자본주의에서 직접적으로 기원하지 않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에서 여전히 물질적 효과를 발휘하며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이러한 사람들 사이의 균열선을 이용해 노동 세계에서 각 집단을 상이하게 대함으로써 노동자 집단 내부에 균열을 만들고, 서로를 경쟁시켜 노동자의 연대를 막으며 자본에 대한 복종을 공고히 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분할해서 지배한다.

여러 경험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는 무임금, 저임금, 낮은 승진기회, 개인 역량의 낮은 발전가능성을 가진 노동부문에 여성·타인종·타민족 등의 사회적 소수자 집단이 집중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은 성·민족·인종을 매개로 수직적으로 분할될 뿐만 아니라 수평적으로 분할돼, 여성·타인종·타민족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노동 세계의 하위에 그리고 바깥에 배치돼 있는 것이다(Kurz-ScherfㆍLepperhoffㆍScheele, 2006).

 또한 여성·타인종·타민족이라는 사회적 표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노동자는 노동분할의 더 낮은 곳과 바깥으로 밀려나는데, 이는 사회적 배제가 노동세계에서 누적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려준다(Herkommer, 2008: 65쪽, 70쪽).

반면 보다 나은 지위에 있는 남성·자인종·자민족 노동자는 자신의 이익이 위협받는다면, 이러한 노동의 분할을 극복하려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노동의 분할·위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고용노동시간단축은 노동의 분할, 특히 고용노동 내의 분할을 해소하지 못하며, 오히려 고용노동 내의 노동의 균열을 강화할 위험이 있다. 자본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대로 노동시간과 임금이 비례하는 경우3) 일방적이고 집단적인 고용노동시간단축은 남성·자인종·자민족 고용노동자의 자유시간을 위해서, 이미 저임금을 받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여성·타인종·타민족 고용노동자의 임금수준을 떨어뜨리는 내부희생 전략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용노동시간단축을 가운데 두고 남성·자인종·자민족 고용노동자와 여성·타인종·타민족 고용노동자가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함으로써 노동시간단축을 추동할 통일된 주체가 형성되지 못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부터의 모든 사람의 해방’이라는 노동시간단축의 진정한 의의는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잉여가치·잉여노동시간을 회수할 가능성을 지닌 것이긴 하지만, 잉여가치가 근거하는 자본주의적 교환·생산·분배의 규제적 원리인 ‘가치법칙’, 상품생산을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과 가치량의 비례법칙을 비판하지 못한다는 세 번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상품교환의 양적비율은(수요와 공급이 서로 상쇄된다고 볼 때) 기본적으로 각 상품의 가치량에 따라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상품을 만드는 각각의 ‘구체적인 노동’은 성격이 구체화되지 못하고,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동등한 ‘추상적인 노동’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노동이 쓰이는 시간(상품을 만드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치량을 규정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가치량은 구체적인 노동이 만들어 낸 ‘실제적인 물질적·비물질적 부’의 양과는 다른 것이다. 가치량은 생산물의 양을 자본주의적으로 지시하는 “사회적 상형문자”(MEW 23: 88쪽)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동시간이 가치량을 결정한다’는 가치법칙은 이 법칙이 작동하도록 돕는 이데올로기적·물리적 폭력장치를 동반하면서, 노동력을 포함한 모든 상품의 교환·생산·분배의 원리로 기능한다. 자본주의에서 상이한 쓰임새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동등한 가치량을 지닌 상품들만 서로 교환될 수 있으며, 더 많은 가치량을 얻기 위해서만 물건이 생산되고, 노동자는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인 노동력의 가치만큼 분배받는다. 자본주의는 가치·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의 지배는 다시 가치를 구성하는 노동의 지배와 가치량을 측정하는 노동시간의 지배를 의미한다. 가치·가치법칙이 교환·생산·분배의 원리라는 것은 노동·노동시간이 교환·생산·분배의 규제적 원리라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가치법칙이 강제되는 이상, 노동이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생계 필연적 수단에 불과하며 따라서 노동착취뿐 아니라 노동 자체로부터 해방돼야 한다는 생각은 노동자 스스로에게도 망상으로 치부된다.

또한 가치·가치법칙은 노동·기계·자연이 생산한 실제적인 물질적·비물질적 부가 노동시간으로만 측정되는 가치와 뒤섞이고, 이러한 가치만이 교환·생산·분배의 원리로 기능한다. 때문에 자본가뿐 아니라 노동자 역시 더 많은 가치와 가치의 현상형태인 화폐를 위해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자 자신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물질적·비물질적 부의 양이 얼마만큼인지 반성할 수 있는 계기는 제거돼 있고, 오직 ‘시지프스의 노동’만이 존재한다.

이렇게 볼 때, 가치법칙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없는 고용노동시간단축은 그것이 잉여노동시간을 줄일지라도, 노동으로부터의 ‘양적인’ 해방일 뿐이며 사회구성의 원리를 노동에서 이탈시키는 노동으로부터의 ‘질적인’ 해방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고용노동시간단축을 통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더 많은 가치를 향한 사람들의 자본주의적 욕구에 부딪혀 좌초될 위험이 있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자본주의의 핵심축인 ‘고용노동 중심주의’, ‘성·인종·민족을 매개로한 노동의 분할’, ‘교환·생산·분배의 규제적 원리로서의 노동가치법칙’을 넘어서지 못한다. 또한 고용노동시간단축은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에 따라 그 해방적 효과가 감소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와 고용노동시간단축의 한계
 
1970년대 노동자투쟁 및 사회투쟁을 포함한 전반적 계급투쟁의 여파로 인한 자본의 이윤율 하락은 자본주의의 노동정책·사회정책 전반을 바꾸게 했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 계급투쟁의 승리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노동정책·사회정책의 재편을 통한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역공의 맥락에 있는 것이었다.

특히 자본은 자본 우위의 노자타협 산물이었던 케인스주의적인 노동자관리정책을 폐기하고, △자동화 △타국으로의 공장이전(세계화) △금융부문으로의 투자전환(금융화) 등을 무기로 사용했다. 고용노동정책적으로는 고용노동자를 자유롭게 해고할 권리와 고용노동과정에서 절대적으로 명령할 권리를 획득하고, 사회정책적으로는 고용노동자간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의 사회적 생활·생존의 가능성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는 고용노동자 간 경쟁을 심화시키고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충성도를 높여 자본의 권력을 강화했다.
자본은 총자본의 지배지위의 안정을 사회 전체적으로 보장하는 데 더 관심을 두기보다는, 개별기업의 이윤의 극대화만을 노골적으로 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전략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이러한 노동세계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특히 기존의 고임금 정규직 일자리를 파트타임노동·임시노동·단기노동·하청노동·파견노동 등 불안정노동의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로 대체하는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핵심은 기업과 국가가 지출하는 인건비의 절약으로써,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단체협약·노동법·사회보장법을 통해 노동자 보호규정을 활용할 수 있었던) 고용노동자는 정규직의 지위에서 강등돼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사회적 보호의 박탈로 내몰린다.

한국 역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관철된 외환위기 시기인 1997년을 기점으로 비정규직이 급속히 늘어났다. 2009년 8월에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51.9%(855만명)가 비정규직이며,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225만원)의 47.2%(120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김유선, 2009). 이제 저임금·불안정 고용관계는 노동세계의 일상이 됐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인 저임금·불안정 고용관계의 확산과 사회복지의 해체는 기존 고용노동시간단축의 네 번째 한계다. 임금이 노동시간에 비례하는 한, 일방적이고 집단적인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정규직에 대해서는 그들의 자유시간 증대와 삶의 여유를 위해 기여하지만, 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들의 임금을 하락시켜, 그들의 생활수준을 악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또한 실업급여가 실업자가 고용노동을 했을 당시의 최종소득에 따라 계산되도록 하는 사회정책이 유지되는 한,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저임금 노동자의 실업 후의 상황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다(Vobruba, 2007: 42쪽). 따라서 그들은 마지막까지 더 많은 노동을 통해 임금을 가능한 올리고자 하며, 고용노동시간단축에 반대하는 것을 오히려 합리적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유럽의 실제 고용노동시간과 노동자의 희망 고용노동시간에 관한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조사에 따르면 주간 노동시간이 긴 전(全)시간 고용노동자는 고용노동시간을 줄이려고 하는 반면, 주 35시간이하(특히 주 20시간이하)의 파트타임 노동자는 자신의 주간 노동시간을 올리고자 한다(Blaschke, 2004: 38쪽). 또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고용노동시간단축 자체는 자본이 고용노동시간단축으로 발생하는 생산량 감소분을 저임금·불안정 노동의 확장을 통해 보상하려는 것을 막지 못한다(김도형, 2001).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불안정 고용관계에서의 고용노동시간단축은 전체 노동자의 일부분에만 이익이 되고, 다른 노동자 집단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며, 신자유주의적 고용관계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고용노동시간단축을 둘러싸고 남성·자인종·자민족 고용노동자와 여성·타인종·타민족 고용노동자가 대립한 것처럼, 고임금 정규직과 저임금 비정규직이 대립하고 분열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각주]
1) 이 글에서는 엥엘스, 레닌,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교리화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이들에 반발하지만 이들의 노동개념을 공유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통틀어 ‘전통’ 마르크스주의라고 칭한다.
2)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가 고용노동에만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지배는 종속적 노동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상품으로 구입하는 것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3분의 2는 종속적 노동, 고용노동에 의한 것이 아니다(Wolf, 2009: 193쪽).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고용노동이 아닌 노동에 대해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3) 임금이 노동시간에 비례한다는 말은 시간급의 경우에서 보듯이, 마치 임금이 노동자가 노동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으나, 이미 밝혔듯이 자본주의에서 임금은 기본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이 임금과 노동시간의 비례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노동계약 상의 임금이 노동력의 실제적 재생산 비용에 미달하는 한, 임금과 노동시간을 비례시킬 수 있다. 자본은 임금과 노동시간을 비례시켜, 노동자가 더 많은 소득을 위해 더 노동하도록 해, 생산성과 이윤의 확대를 꾀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