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뒤 단비 같은 판결이 이어지자 노동계도 분주해졌다. 금속노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고 비정규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직화사업을 벌이고 있다. 현대차 울산·아산·전주공장의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수는 2천200여명을 넘어섰다.
<매일노동뉴스>가 24∼25일 이틀간 현대차 울산공장을 찾아 그곳의 노동자들에게 “대법원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재벌기업의 불법적 고용관행에 쐐기를 박은 판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가져올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고용형태에 따른 정서적 이질감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1 “때를 잘못 만났지. 젊은 애들이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오로지 정규직이 되는 거 그거 하나 바라고 있는데….”
24일 오후 현대차 울산2공장 간이주행시험장. 김정수(51·가명)씨는 올해 27살인 아들과 함께 울산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정규직, 아들은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이다. 김씨는 할 수만 있다면 아들을 정규직으로 만들고, 자신은 하청업체에 가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아들의 인생에 길을 터 주고 싶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정규직, 아들이나 조카는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아요. 그전에는 IMF다 정리해고다 해서 불안하게 살다 보니 내 돈벌이만 신경 썼지 남 생각을 못했어요. 돈 벌어서 애들 학교만 제대로 보내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제 아들이 나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살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네요.”
김씨의 아들은 2006년 10월부터 같은 하청업체에서 근무해 왔다. 옛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의 적용을 받는 2005년 7월1일 이전 입사자를 구제대상으로 한 대법원 판결의 적용대상에서 한 발 비껴나 있는 셈이다. 김씨의 아들이 현대차 정규직이 되는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현대차가 개정된 파견법의 ‘고용의무’ 조항을 이행해 직접고용하는 방법이 있다. 고용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현대차는 3천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된다. 과연 현대차는 어떤 선택을 할까.
#2 같은 시각 현대차 울산공장 본관 앞마당. 최상식(31·가명)씨가 “업체해고 인정 못해, 원청이 해결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청업체에 고용돼 현대차 울산2공장에서 자동차 범퍼를 조립해 온 최씨는 ‘투싼’이 단종되면서 공정이 줄자 해고됐다. 그를 포함해 66명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최씨는 2004년 11월부터 2공장에서 근무했다. 올해 6월30일까지 A사 소속으로 근무했고, 7월1일부로 B사로 변경됐다. 사장이 바뀌었고, 기존 업체에서의 경력이 인정되지 않아 각종 수당이 깎였다. 그러다 이달 18일 회사로부터 해고예고통보를 받았다.
“해고통보를 받은 기분은 진짜 말로 표현이 안 돼요. 집에는 태어난 지 18개월 된 아기랑 말기암 선고를 받은 어머니가 누워 계시는데. 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실까 봐 아직 말씀을 못 드렸어요. 처가에도 말을 못했죠.”
최씨는 새로 바뀐 B사의 횡포에 대해 분을 참지 못했다.
“사장이 처음 온 날 의례적으로 음료수라도 하나씩 돌릴 줄 알았는데 없더라고요. 회사가 바뀌면서 월급을 손해 본 게 얼만데…. 회사는 작업복도 바꿔 주지 않았어요. 원래 입던 A사 작업복에 B사 마크를 오버로크(휘갑치기, 둘러서 꿰맴)해서 입으라는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었죠.”
해고통보를 받아든 그가 기댈 곳은 법원뿐이다. 2004년 입사한 최씨는 옛 파견법에 의해 직접고용 간주(고용의제) 조항의 적용을 받는 대상으로 구분된다. 그는 “법원이 끝까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세대 간 문제로 전이된 비정규직 문제
김씨와 최씨의 사례에서 보듯 제조업 생산현장에서 고용형태에 따른 문제는 이제 세대 간 문제로 전이되고 있다. 비정규직의 고용 문제를 관망해 온 정규직들은 자식들의 먹고살 길을 걱정해야 하는 기성세대가 됐다.
지난달 22일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1천명이 넘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지회장 이상수)에 가입했다.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바라는 비정규 노동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아들이 비정규직인 김씨처럼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경우가 아니라면, 아직까지 비정규직 문제는 ‘남의 일’인 것이다.
2공장 휴게실에서 만난 이아무개(45)씨는 “같은 현장에서 더 힘든 일을 하면서도 급여는 적게 받는 하청업체 동생들을 보면 안 됐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면서도 “그 많은 비정규직이 전부 정규직이 됐을 때 회사가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 할 텐데, 그로 인해 기존 정규직들은 임금인상 등에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속내를 털어놨다.
김아무개(48)씨도 “정규직은 나이 든 사람이 많고, 비정규직은 젊은 사람이 많다”며 “정규직화 이후 나타날 세대차이가 걱정되고, 그동안 젊은 비정규직이 주로 해 온 고된 업무를 나이 든 노동자들이 분담해야 한다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을 지지하는 정규직 노동자도 있었다. 송아무개(41)씨는 “회사가 임금이 싼 비정규직을 고용해 이윤을 남겨 온 것에 대해 법원이 잘못됐다고 판결한 이상 정규직들도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 동생들 안됐지만, 피해 입는 건 싫어”
자리를 옮겨 비정규직지회 사무실을 찾았다. 지회는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지부장 이경훈) 건물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지회 가입원서들이다. 라면박스 2개에 원서가 꽉 들어차 있었다. 울산공장에서만 1천명이 넘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지회에 새로 가입했다. 지회 가입자들의 희망은 단연 정규직화다. 이상수 지회장은 “2004년 노동부가 불법파견 판정을 내놓은 뒤 지금까지 2천여명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정리해고됐다”며 “신차 출시나 라인공사, 생산공정 합리화 등의 명목으로 해고를 당해 본 노동자들은 무엇보다 고용안정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지회에 가입한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협력업체들의 탈퇴 압박도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2004년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이 있은 뒤 현대차의 사내하청 채용방식은 공채가 아닌 지인의 소개를 통한 채용이 주를 이뤘다. 협력업체 중간관리자 등이 인맥을 동원해 인력을 충원해 온 것이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지회에 쉽게 가입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실제로 협력업체들은 최근 지회 가입자가 늘자, 인맥을 동원한 탈퇴 압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회장은 “며칠 사이 10여명의 노동자가 지회에 가입했다가 탈퇴했다”며 “협력업체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 배후에는 현대차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정규직 노조가입 열풍 “이젠 정규직 됐으면”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정규직노조인 현대차지부도 분주한 모습이다. 지부는 이미 ‘불법파견 TFT’를 구성한 상태다. TFT에는 비정규직지회 관계자도 참여한다. 비정규직지회를 중심으로 조직화 사업을 전개하고, 정규직지부는 회사측에 특별교섭을 요구하는 등 교섭창구를 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동안 현대차지부는 ‘정규직 이기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비정규직노조와의 통합을 묻는 ‘1사 1노조’ 대의원 표결이 세 차례나 부결된 뒤 이 같은 비판은 더욱 견고해졌다. 지부는 비정규직이 증가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외환위기와 정리해고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2000년, 현대차 노사는 1천여명에 달하는 무급휴직자를 조기 복직시키는 대신 16.9%라는 비정규직 사용 상한선을 도입하는 데 합의했다. 당시 현대차노조 위원장은 정갑득 전 금속노조 위원장이었다. 노조 입장에서는 비정규직의 폭발적 증가를 제어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결과적으로 비정규직을 주요 생산공정에 투입하는 데 동의한 셈이 됐다. 이후 비정규직 비율은 30%대까지 올랐다가 현재는 24%대를 유지하고 있다. 이경훈 지부장은 “당초의 의도와 달리, 16.9% 합의는 비정규직 증가의 물꼬를 튼 셈이 됐다”며 비정규직 양산의 책임이 일정부분 정규직노조에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사 1노조’를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연대투쟁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하부영 제2민주노조운동실천네트워크 대표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대신해 정리해고 당하는 부당한 현실에 대해 우리는 ‘정규직 고용안정의 방패막이’라는 최면에 빠져 회사의 비정규직 살인을 묵인방조했다”며 “회사에 정규직화를 요구하기 전에 현대차지부가 1사 1조직으로 규정을 바꿔 비정규직이 지부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계 하기에 달렸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는 불법파견 노동자라도 2년이 되지 않으면 사실상 구제받을 길이 없다는 점이다. 또 대법원이 고등법원의 판단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에 확정판결이 나오기까지 수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금속노조가 추진 중인 집단소송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재판의 당사자인 현대차는 물론이고 정부도 발 빠르게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고용노동부는 제조업을 포함한 파견 허용업종 확대를 추진 중이고, 재계는 이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그럴 경우 이번 대법원 판결이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다.
대법원 판결로 2년 이하 한시하청이 확산되고 이른바 ‘회전문 채용’이 관행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때문에 노동계가 여론전에 치중하기보다는 비정규직의 처우개선과 고용안정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조자명 비전노동센터 대표는 “산별노조나 대기업노조의 간부들을 가리켜 표를 먹고사는 ‘표식동물’이라는 비난이 제기되는 이유는 적지 않은 간부들이 집행권력이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입으로만 사업을 벌여 왔기 때문”이라며 “노동계가 사회 양극화 문제의 근간을 이루는 비정규직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노동계가 사회적 교섭을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손정순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연구위원장은 “불법파견 문제를 법·제도상의 문제로만 이해하면 현실적인 해법을 찾기 힘들다”며 “업종별 협의나 대정부교섭을 통해 정규직 전환지원금 제도를 확장하는 등 실질적인 개선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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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현대자동차 울산·아산·전주공장에서 근무하는 1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7천693명이다. 생산직 노동자 3만1천661명 가운데 24.3%를 차지한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옛 현대차노조)가 2000년 노사 교섭을 통해 ‘16.9%’라는 비정규직 투입 상한선을 받아들이고 10년이 지나는 사이, 비정규직수는 야금야금 늘어났다. 기술개발에 따라 작업공정이 단순해지고 모듈화가 진행되면서 하청노동자들은 기존의 단순업무 대신 정규직과 동일한 라인에 섞여 일하게 됐다.
지난 25일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난 이경훈(50·사진) 현대차지부 지부장은 “97년 IMF 사태와 98년 정리해고를 거친 뒤 비정규직이 물밀 듯 증가했고, 당시 노조는 비정규직이 무한정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IMF 이전의 하청노동자 비율인 16.9% 에 맞춰 비정규직 사용 상한선을 정했다”며 “하지만 당초의 의도와 달리 이후 비정규직 증가의 물꼬를 튼 셈이 됐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양산의 책임이 정규직노조에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현대차지부에 ‘귀족노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지부가 임금과 노동조건 향상에 치우친 경제적 실리주의만을 좇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고,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이 두 번째다. 특히 비정규직 노조와의 통합 여부를 묻는 ‘1사 1노조’ 대의원 투표가 3차례나 부결되면서, 대공장 정규직 노조의 폐쇄성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완성차노조들의 산별노조 가입도 이러한 경향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직은 하되 작업장 권력 공유는 거부하는’ 양상이 심화됐다. 이는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지부장은 “임기 내 1사 1노조를 실현할 수 있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비정규직 확대의 물꼬가 터진 뒤, 정규직 조합원들 사이에 비정규직을 고용의 방패막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이 지부장은 그러나 “법원에서 사내하청 고용의 위법성을 인정한 상황이기 때문에 부단한 설득을 통해 정규직 조합원들의 인식을 바꾸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지부는 이달 23일 ‘불법파견 TFT’를 구성했다. 비정규직지회를 중심으로 조직화 사업을 전개하고, 정규직지부는 회사측에 특별교섭을 요구하는 등 교섭창구를 여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이 지부장은 “현대차가 산별중앙교섭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금속노조 차원의 특별교섭 요구보다는 지부의 교섭요구가 교섭 성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비정규직지회의 조직화 투쟁과 정규직지부의 교섭이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지부장은 현대차의 울타리를 넘어선 업종별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첨단기술이 총망라된 자동차산업의 경우 신기술이 개발될 때마다 노동력 투여량이 줄어든다. 자동차업계에서 신차가 출시될 때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리해고가 되풀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지부장은 “앞으로는 정규직의 고용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자동차 전문가들과 노사 관계자, 정부 관계자가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구은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