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가산디지털밸리 직장인 참여 음악회 ‘도시락(樂) 콘서트' 눈길“네가 아무리 슬퍼도 관객이 보기에 별로 안 슬퍼 보이면 안 슬픈 거야. 네가 느끼는 게 다가 아니잖아.”
“어디 폭포수에서 연습했어? 너무 막 소리를 질러 버리니까 생뚱맞다는 거야. 자연스럽게 이 상황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줘야 해.” 
“조명이 안 꺼지면 끝난 게 아니야. 근데 둘이 멍하니 앉아 있더라. 계속 뭔가를 해야지.”

지난 22일 오후 서울 삼선동 한성대 인근의 한 건물 지하에 자리 잡은 직장인 연극단체 연습실.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린 이날 66제곱미터(20평) 남짓한 공간에서 10여명의 단원들이 근로자연극제 공연을 앞두고 막바지 연습에 한창이다. 연습실 사방에는 온갖 소품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방음을 위해 벽에 붙여 놓은 스펀지는 여기저기 뜯겨 있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99년 창단한 이 극단에는 30여명의 단원이 활동하고 있다. 한 달에 2만5천원씩 걷는 회비로 극단을 운영하고 있다. 단원 모두 평범한 직장인들이다. 전체 단원이 모이는 날은 공연 뒤풀이나 연말 총회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이 단체를 비롯한 13개 직장인 연극단체가 전국직장인연극단체협의회(회장 고건영)에 가입돼 있다.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이 주최하는 근로자연극제는 이달 21일 개막했다. 올해는 전국에서 29개 직장인 연극단체가 참여했다. 공연에 참여하는 단체들에게는 공연지원금 100만원이 지급된다. 
“선배들 말씀으로는 88년에도 지원금이 100만원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공연 끝나고  뒤풀이를 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었다는데, 지금은 어림도 없죠.”

공연지원금 20년째 그대로

고건영 회장은 “요즘은 한 번 공연을 하려면 최저 250만원에서 500만원 정도가 든다”며 “지원금 100만원은 전체 비용의 4분의 1수준”이라고 말했다.  지원금이 항상 100만원인 것도 아니다. 공단이 예산을 미리 배정해 놓고 참여하는 극단수에 따라 지급하기 때문에 80만~90만원을 받는 극단도 있다. 근로자연극제에 참여하는 극단들은 모자라는 비용을 스스로 충당한다.

공단이 대관한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추첨을 통해 순서를 정한다. 그러다 보면 평일에 공연이 잡힐 수도 있다. 직장인들이 평일에 공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추첨에 참여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비용을 들여 극장을 빌리는 극단들도 있다. 30개 팀의 공연이 2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진행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근로자연극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지만 연극제를 하는지 조차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고 회장은 “예심을 거쳐 본선을 진행하면 심사기간이 길어지겠지만 공연할 팀을 미리 추려 낼 수 있기 때문에 극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며 “공연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주 5일제가 도입된 뒤 여가를 즐기기 위해 문화활동을 찾는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직장인 문화생활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매년 열리는 근로자문화예술제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로자문화예술제는 미술·문학·음악·연극 등 4개 분야로 나눠 진행되는데, 전체 예산은 매년 5억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2008년 예산은 5억600만원, 예술제 30주년이었던 지난해는 약간 늘어난 5억6천700만원, 그리고 올해는 5억3천700만원이다. 이 중 연극공연 지원금은 3천300만원으로 매년 그대로다.<표 참조>
 

노동부는 내년 근로자문화예술제 관련 1억4천700만원의 예산 증액을 요구했으나 기획재정부의 1차 심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 2차 심의를 받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문화 지원예산을 늘리고 싶지만 전체 예산이 한정돼 있다”며 “근로자 대부사업이나 신용보증사업, 취약근로자에 대한 근로조건 유지사업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어 문화 지원예산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예산 증액 요구해도 기재부 ‘제동’

게다가 노동계의 관심도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개선·임금협상 등에 맞춰져 있다. 사업주나 정부를 상대로 문화생활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문화생활은 노동조건 개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기 안전관리 일을 하는 선우찬(53)씨는 직장인들의 모임인 ‘참 좋은 색소폰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사)기업하기좋은나라운동본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직장인 참여 음악회 ‘도시락(樂)’ 콘서트에도 참여했다.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연주하고 싶어 하잖아요. 저도 여러 악기에 도전했다가 색소폰에 빠져 들었어요.”
선씨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다가도 악기를 연주하면서 몰입될 때는 뭔가 가슴 속에 뭉쳐 있던 게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말했다. 매주 화·목요일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에 열리는 도시락 콘서트는 서울 구로동 노동부 서울관악고용센터 건물 마당 등 구로·가산디지털밸리 인근 곳곳에서 열린다. 민간과 정부·지방자치단체가 직장인 문화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아직 초기 단계여서 참가단체들이 많지 않지만 최근 입소문을 타면서 관심을 보이는 단체들이 부쩍 늘었다.
 
“디지털밸리를 춤추게 하라”

점심시간을 활용한 직장인 동아리 문화공연에 대한 아이디어는 노동부 공무원에게서 나왔다. 최상철 관악고용센터 기업지원과장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를 보면서 왜 IT기술이 세계 최고라고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작품을 못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IT 종사자들이 예술과 문화를 접하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착안했다”고 말했다.

금천구청·구로구청 등 지자체들도 팔을 걷고 나섰다. 가산·구로디지털단지에는 IT업종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들이 많다. 그런데 퇴근시간이 되면 우르르 빠져 나가는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 막기 위해 문화지대를 조성한 것이다.

금천구청은 올해 처음으로 6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직장인 동아리 6곳을 지원하기로 했다. 금천구청 관계자는 “가산동 마리오 아울렛 인근지역을 패션 아이티 문화존 거리로 만들 계획”이라며 “직장인들의 문화생활을 지원하고 거리공연 기회도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찾기 쉬운 소극장 지원 절실

“기업은 하나의 조직이지만 개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노동자들이 회사의 비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까 임금조건이 안 맞으면 그냥 나가게 되죠. 돈을 많이 주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공통의 비전을 바라보고 문화를 통해 자기계발을 지원해야죠.”

이번 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사)기업하기좋은나라운동본부의 송희정 문화사업팀장의 말이다. 동아리를 통해 문화생활을 즐기는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직장인 생활패턴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연습·무대 공간이다. 퇴근 후 늦은 시간까지 연습하는 경우가 많지만 현재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는 보통 밤 10시까지만 이용할 수 있다. 송 팀장은 “직장인 동아리들은 공연장의 많은 좌석을 채울 여력이 없고 장비 설치에 대한 부담도 있기 때문에 대형극장은 적합하지 않다”며 “저가로 쉽게 연습할 수 있는 소극장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선우찬씨는 “연극이나 음악·영화 같은 취미를 본업으로 하고 싶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많다”며 “취미생활과 직장생활을 어울려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밀어준다면 노동자들의 근로의욕도 높아지고 기업 운영에도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쥐꼬리 근로자문화예술제 상금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이 주최하는 근로자문화예술제 최고의 영예는 대통령상이다. 예술제 상금 총액은 2007년 9천450만원에서 올해 9천890만원으로 별 차이가 없다. 97년 500만원이었던 대통령상 상금은 13년이 지난 올해도 500만원이다.
이러한 상금액수는 다른 기관 행사와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전국적인 규모로 치러지는 행사의 대통령상 상금은 대부분 1천만원 이상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사)한국연극협회가 주관하는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은 2천만원이고 장관상은 1천만원이다. 역시 한국문화예술위가 주최하고 한국무용협회가 주관하는 전국무용제의 대통령상은 2천만원, (사)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은 1천만원, 한국패션협회가 주최하고 지식경제부 등이 후원하는 대한민국패션대전의 대통령상도 2천만원이다.
전국적 규모의 행사이고,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이 주최하는 근로자문화예술제의 상금이 민간협회가 주최하는 행사의 상금보다 적은 것이다.   조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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