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서 착취당하거나 수탈당하는 사람들 곧 빼앗기는 사람들은 인구의 95%를 훌쩍 넘어선다. 임금노동자 특히 비정규직은 가장 많이 착취당하는 사람들이며, 장애인이나 빈곤노령층, 그리고 소년소녀가장들, 제3세계로부터의 이주자들은 가장 많이 수탈당하는 사람들이다.

영세자영업자·가정주부·대다수 여성·대다수 청소년·다수의 대학생·징병된 군인들·노숙자·사회활동가들도 수탈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금을 납부하며 저축을 통해 자본가의 사업자금을 대고 그들의 상품을 소비하여 이윤이 실현되도록 도우면서 수탈당한다. 뿐만 아니라 부동산투기차익으로부터 배제되며 더 많은 집세와 더 많은 전세담보융자의 이자를 부담하면서 한번 더 수탈당한다.

빼앗기는 사람들 모두는 착취당하고 수탈된 것을 다시 환수하는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 임금노동자가 더 많은 헤게모니와 주도권을 갖는다는 선민의식은, 그들이 인구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며 더구나 조직률이 10%수준에 머무는 상황에서 위험한 독단일 것이다. 선민의식은 착취당하진 않지만 더 많은 수탈을 당하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들을 적으로 만들고 결국 노동운동을 고립시키고 왜소하게 만들 뿐 아니라 변혁을 위한 연대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이 임금노동자 내지 프롤레타리아12)의 변혁능력을 특권화한 마르크스의 변혁주체론은 변형될 필요가 있다 :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는 모든 계급들 중에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13) 물론 마르크스는 곧 이어 “중간층·소공업가·소상인·장인·농민도 (…) 자신들의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임박한 전환을 고려하여 미래의 이해관계를 방어한다면 혁명적”14)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노동자계급과 대비해 볼 때 모든 계급들은 반동적인 대중일 뿐”15)이라고 본 라살레주의자의 편협한 노동물신주의를 훌쩍 뛰어넘는 주장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노동자를 제외한 수탈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투쟁할 때만 혁명적이라고 보는 것도 임금노동자의 혁명적 능력을 특권화하고 비임금노동자 전체를 주변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마르크스의 주장에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중간층이 곧 임금노동자로 전환될 것이라는 가설이 깔렸다고 할 수 있다. 중간층이 끊임없이 임금노동자로 전락한다는 점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중간층은 그 이상으로 새롭게 생겨나기도 한다는 점을 자본주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임금노동자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이들이 혁명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가설은 새롭게 변형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임금노동자가 인구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모두 포함한 임금노동자는 1천610만명에 이른다.16) 이는 전체 인구 4천900만명의 33%수준에 불과한 숫자이다. 성인인구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임금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42%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선진국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후진국의 경우는 임금노동자의 비율이 증가추세에 있다). 따라서 임금노동자만으로는 헌법과 체제를 변혁하기에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라살레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틀렸다.

그렇다고 중간층이 현재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미래의 이해관계를 위해 임금노동자 편에 서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임금노동자와 더불어 혁명적일 수 있다고 한 마르크스의 말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현재 수탈되는만큼 빼앗기고 있다.

그리고 빼앗기는 사람들은 모두 빼앗긴 것을 되찾는 데 적극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되찾음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대안사회가 착취뿐 아니라 수탈도 폐지해 빼앗김을 되찾고 각자 자유롭게 연합하는 사회라면, 그들은 굳이 임금노동자 편에 서지 않고 현재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르더라도 대안사회를 향한 변혁에서 즉각 혁명적일 수 있다.

이는 변혁의 주체가 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한 임금노동자에 국한되지 않고, 실업자·도시빈민·영세자영업자·장애인·대다수 노령층·사회운동가·진보적인 지식인·대학생·청소년·대다수 여성·이주자 등 인구의 95%에 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이 변혁운동에서 모두 평등하게 연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인구의 절대다수가 혁명적인 잠재력을 갖는다는 점은 대안사회의 실현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그만큼 쉬운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농민·소상공인을 포함한 다양한 중간층이 노동자 편에 설 수 있음(조건부 혁명성)을 인정하고 있는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자의 특권적 지위 내지 선민의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임금노동자보다 인구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비임금노동자에게 거부감을 조장할 뿐이다. 임금노동자 안에서의 단결을 강화할 수는 있지만, 비임금노동자와의 연대는 그만큼 어렵게 한다. 마르크스의 예상과는 달리 임금노동자가 인구의 과반수에 못 미치며 더구나 조직률이 저하하거나 낮은 상태에서 이러한 주장은 노동운동을 고립시키며 혁명을 어렵게 만드는 작용을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노동운동이 처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임금노동자의 혁명성에 대한 특권화는 마르크스 자신의 논지에 따를 때도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절대다수로 급증하는 임금노동자 = 착취당하는 사람들 = 특권적인 잠재적 변혁주체’로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히 20세기 말 이후 급증하는 수탈당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변혁적 잠재력을 고려할 때, 이는 ‘절대다수의 착취당하거나 수탈당하는 사람들 곧 빼앗기는 사람들 = 평등한 잠재적 변혁주체 → 혁명의 현실적 가능성과 불가피성’이라는 일관된 변혁주체론으로 재구성되고 변혁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 자신이 이론화한 수탈의 시공간은 자신의 노동중심적 제한된 변혁주체론을 넘어설 이론적 기초이다. 이처럼 마르크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변혁할 자원을 만들어 놓았다. 비록 마르크스가 1883년에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유지될 것이다.

물론 노동운동(특히 아직도 전지구적으로 가장 많은 건강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은 1996~1997년의 영광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든든한 진지일 것이다.

비록 민주노총 등 다양하게 조직화된 한국의 정규직들은 전체적으로 덜 빼앗기는 사람들일 수 있지만, 가장 잘 조직화돼 있으며 우리의 현대사에서 혁명적 잠재력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노동운동의 위기를 넘어 미래에는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으며 멀리 갈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만큼 한국의 노동운동은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노동운동이 배타적이며 특권적인 선민의식을 주장한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급속도로 사라질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만 해도, 임금노동자들이 선민의식을 가져도 별 문제가 없었다. 당시 한국의 임금노동자들은 가장 많이 빼앗기는 사람들이었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심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노동자들의 선민의식은 노동운동의 단결을 낳는 긍정적인 요인이었다. 임금노동자들의 선민의식은 다른 운동·다른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고 그들과의 연대를 가로막는 부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1996~1997년 노동법개악 저지 총파업 때는,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이 민주노총을 존경하며 갈채를 보내고 심지어 연대하기까지 했다.

당시만 해도 임금노동자의 선민의식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특히 민주노총에 소속된 정규직들의 경우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특권을 가진 사람들로 간주되며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직들의 선민의식 또는 노동중심주의는 다른 운동·다른 사람들의 질시를 유발하며 그들과의 연대를 가로막는 역할을 할 것이다.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운동은 비록 상대적으로 덜 빼앗기는 사람들의 운동이더라도 잘 조직된 역량을 활용해, 자기 자신을 포함해 빼앗기는 사람들 전체의 운동으로 변혁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에 노동운동은 고립되고 왜소화되는 현재의 위기를 넘어 빼앗기는 모든 사람들의 운동을 활성화하며 진보운동의 연대를 비약적으로 확장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며 : 노동운동의 변혁과 기본소득

임금노동자가 자신을 포함해 빼앗기는 모든 사람들의 운동을 활성화하며 진보운동의 연대를 확장하려면, 그럴 수 있는 계기를 만들거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계기로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생태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며 지속가능한 대안사회의 비전을 창출하고 공유하는 것은 이러한 연대의 확장과 진전을 위해서 필수적인 계기 중의 하나일 것이다.

착취와 수탈을 당하는 사람들이 인구의 95%에 이르는 상황에서 착취와 수탈을 근절하고 기존의 경제성과 중에서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던 부분(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을 사회전체성원이 공동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경제적 부의 원천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은 가장 급진적이지만 동시에 95%의 인구에게 더 나은 경제적 부를 약속함으로써 잠재적인 연대의 폭을 최대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21세기 코뮌주의의 새로운 경제모델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고타강령비판」에서 코뮌주의 저차국면에 대해 ‘노동성과(Arbeitsleistung)에 따른 분배’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원리를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코뮌주의 고차국면에 대해서는 ‘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를 중심적인 경제원리로 제시한 바 있다.17)

하지만 그가 제시한 코뮌주의 저차국면의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 원리는 필요에 따른 분배의 측면에서 현재의 서유럽 사민주의에 못 미치고, 고차국면의 ‘필요에 따른 분배’ 원리는 경제적으로 지속불가능한 유토피아적 기획이다.

왜냐하면 일한 성과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필요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받는다면18), 사회 전체적으로는 노동유인이 크게 감퇴해 경제적 성과가 크게 감퇴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코뮌주의 고차국면의 분배원리는 게으른 사람들 내지 이기주의자들의 역설을 초래할 것이다. 곧 이러한 모델이 실현되면 헌신적인 사람들이 게으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빼앗기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19)이나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20)로서의 코뮌주의와는 정반대로, 각자의 이기주의가 조장되고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마르크스는 코뮌주의 저차국면에서는 사회전체의 가처분소득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성과를 낳는 노동자들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노동자들은 압도적인 경제적 특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코뮌주의 저차국면의 경제원리와 사회 전체성원이 필요에 따라 동일한 분배를 받는 마르크스의 코뮌주의 고차국면의 경제원리 사이에는 순조로운 이행을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넘기 힘든 간극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코뮌주의 저차국면에서 새로이 경제적 특권층으로 부상할 노동자들 대부분이 그러한 경제적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리라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가정이기 때문이다.21) 이는 마르크스적인 ‘코뮌주의 두 가지 시공간의 역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주의자들의 역설’과 더불어 ‘코뮌주의 두 가지 시공간의 역설’은 마르크스의 코뮌주의 경제원리가 갖는 난점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두 가지 역설을 낳는 마르크스의 코뮌주의 경제모델을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코뮌주의 경제모델은 우월하고 지속가능한 21세기 대안경제모델을 위한 원료를 제공한다. 두 가지 시공간으로 분리된 마르크스 코뮌주의의 두 가지 경제원리는 변형돼 하나의 시공간에 통합된 단일의 경제원리로 변혁될 필요가 있다.

곧 21세기 대안경제모델은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 + 각자의 필요에 따른 동일한 분배’, 다시 말하면 ‘노동소득(가처분총소득의 50%수준) + 사회연대소득 내지 코뮌주의적 기본소득(가처분총소득의 50%수준)을 통한 능력에 따른 노동의 촉진’으로 변혁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제원리는 ‘노동소득(사실상 가처분총소득의 40%수준) +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사실상 가처분총소득의 60%수준)’을 낳는 현대 자본주의적 경제원리에 비해 더 많은 노동유인을 담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더 우월한 성과를 촉진할 수 있다.

그리고 당장의 경제적 효용보다는 ‘생태예비의 원칙’ 및 ‘생태우선성의 원칙’에 따라 무공해에너지 및 생산물의 내구성제고를 우선적으로 촉진한다면 생태적으로도 자본주의보다 월등히 우월한 성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생산수단 및 토지의 사회적 공유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21세기 대안사회의 경제적 비전은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공동이익을 낳으며 사회적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착취받는 사람들과 수탈당하는 사람들의 연대를 최대로 확장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물론 최대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목표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여기에는 현재의 시공간에서 이러한 21세기 대안경제모델로 이행할 때 기반이 될 수 있는 경제적 조건 및 정치적 실행 조건이 결부될 필요가 있다.
경제적으로 당장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힘들다면, 과도기적으로 자본주의적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와 생태세·토지세를 통해 상당부분의 불로소득·투기소득을 사회적으로 환수해 가처분총소득의 30%수준에서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고, 이 비중을 점차 확대하는 방안도 유력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방안은 주식 등 불로소득·투기소득의 원천이 되는 자산의 가격을 하락시키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 적립되어 있는 250조원수준의 연기금, 그리고 기업에 대한 은행대출(사실상 사회전체성원의 예금으로 이루어진 공동자산이다)의 주식전환을 통해 상장사뿐 아니라 모든 주식회사를 사회적 공동소유로 전환할 수 있는 유리한 경제적 환경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생산수단의 압도적인 부분이 사회적 공동소유로 전환된다면 그 때의 주된 기본소득재원은 기존 자본주의적 이윤(이자+배당+지대)의 전환된 형태가 될 수 있다.22)
이러한 과도기적 기본소득전략조차도 정치적 실행조건과 결부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변혁주체의 형성과 변혁의 실행은 다양한 계기를 통해서 만들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기본소득 자체(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급진적인 기본소득운동)는 변혁주체의 형성에 막대하게 기여할 것이다. 초기에는 생소함에서 오는 냉소주의가 클 수 있지만, 인구의 90%이상에게 이익이 되는 가시적인 기본소득의 비전은 잠재적인 수혜자들이 빠른 속도로 기본소득운동의 주체로 나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아가 지금까지 진보운동이 경험하지 못한 최대다수의 진보적인 연대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독일·남아프리카공화국·브라질 등의 경험은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 불과 5년 전만 해도 인구의 99%에게 생소했던 기본소득은 이제 인구의 90%이상에게 알려졌고,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받는 어젠다가 됐으며 실행가능성이 높은 사회적 요구로 변화됐다.

최근 한국 기본소득운동의 경험도 진보적인 정치주체의 형성과 확장에서 급진적인 기본소득의 어젠다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경우 2009년 2월에 기본소득네트워크(cafe.daum.net /basicincome)가 출범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민주노총에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가 출간되면서, 기본소득은 적어도 한국 진보운동과 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어젠다의 하나로 부상했다.

여기에는 노동소득에 대한 추가과세는 최소화하고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과세와 토지세를 강화해 국내총생산(GDP)의 30%수준에 달하는 291조원이상의 재원을 마련함으로써, 무상교육·무상의료와 더불어 5년이상 한국에 거주한 외국인과 모든 국민들에게 1인당 평균 연 500만원이상을 지급하자는 한국형 기본소득모델이 제시돼 있다.23)
 
이 모델에 따를 때, 기존 과세대상소득(명목소득보다 낮다)이 1억원이하인 2인 가구는 세액증가분보다 더 많은 기본소득을 받게 된다. 따라서 대다수 정규직들도 기본소득으로 인해 잃는 것보다 받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국내 인구의 90%이상이 이익을 보게 된다.

특히 노동소득세 증세는 최소화하고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많은 과세를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노동소득이 많은 정규직 거의 대다수도 이익을 보게끔 설계된 점이 이 모델의 강점이다. 이는 기본소득이 정규직을 포함한 압도적인 대다수의 것이 되며 최대 다수의 최대 연대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아직 민주노총에서 기본소득을 조직의 강령이나 정책으로 수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노동계에서 기본소득을 주제로 한 책자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전지구적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한국의 노동운동이 특권화된 노동중심주의를 벗어날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기본소득은 사회당에서 부속강령으로 채택되어 있으며 교수노조에서 3대 정책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장애인운동,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민주노총 및 민주노동자연대, 자율주의운동에서도 점차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운동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논의가 본격화된 지 1년이 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기본소득운동이 진보운동 내에서 낳은 파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생태운동·여성운동·청소년운동·빈민운동·실업자운동·학생운동과 심지어 새로운 노령층운동에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진보운동의 주체들,  그리고 그들의 연대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기본소득은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많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특히 그동안 모호했던 자본주의적 착취와 수탈 그리고 이를 다시 되찾아와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연대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간결하고 강력하게(simple and powerful)’ (Van Parijs, 2000: 1쪽)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본소득은 정규직·비정규직을 모두 포함한 임금노동자의 것이기도 하다. 노동소득뿐 아니라 기본소득을 추가로 받게 될 압도적인 대다수는 덜 일해도 더 많은 소득을 올리게 된다. 또한 무상교육·무상의료·무상보육, 낮아진 주택비용 등으로 인해 더 많은 경제적 부를 향유하게 된다.

그리고 노부모 부양부담의 축소를 감안하면, 그들이 누리게 될 경제적 부는 더욱 커질 것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민중전체를 위해 굳건히 싸워 왔던 한국의 노동운동은 기본소득운동과 만남을 통해 자신뿐 아니라 보다 많은 민중에게 거대한 희망을 주게 될 것이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거대한 진보의 연대를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급격한 환율변동으로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야기하는 미국 달러지배체제를 넘어서서, 세계단일통화를 도입해 발행량 중 일부를 전지구적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하자는 후버(Huber)나 프랭크만(Frankman)의 제안 등과 결합해 지구적 차원에서도 진보의 새로운 연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Van Parijs, 2006: 46쪽 및 Frankman, 2006: 60쪽).24)

기본소득이냐 아니냐보다 어떤 기본소득인가가 더욱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기본소득은 21세기에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보의 새로운 희망과 연대를 확장할 어젠다이다. 그리고 19세기의 노예제 폐지, 20세기의 보통선거권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경제적 영역으로까지 확장할 기본소득의 실현은 21세기의 가장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 될 것이다(Suplicy, 2006: 37쪽).
19세기와 20세기에 진보의 가장 강력한 축을 이뤘던 노동운동이 21세기에 기본소득운동 그것도 최대한 급진적인 기본소득운동과 만나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각주]
12) 『자본』 1권에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를 임금노동자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MEW 23: 642쪽).
13) MEW 4: 472쪽(「공산당선언」).
14) 같은 곳.
15) MEW 19: 22쪽(「고타강령비판」).
16) 2008년 말 기준 한국의 전체 임금노동자는 약 1천610만명에 이른다(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경제활동인구). 물론 상당수 시간제노동자나 비정규노동자가 이 1천610만명의 통계에 누락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1천610만명에는 국회의원, 경영자, 고용 변호사 및 의사, 대기업 이사 등 사실상 임금노동자라고 볼 수 없는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한국의 임금노동자 수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1천610만명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17) MEW 19: 21쪽.
18) 기본소득의 주창자 판 빠레이스는 마르크스의 ‘필요에 따른 분배’를 ‘장애와 나이에 따른 균등한 기본소득’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필요가 주관적인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함축하며 장애가 심하거나 나이가 많을수록 기본소득 수령액이 많아짐을 뜻한다(Van Parijs, 1993: 163쪽 이하; 1997: 84쪽).
19) MEW 4: 482쪽.
20) MEW 23: 92쪽.
21) 네그리, 가라타니 고진 등은 코뮌주의 1국면에서 2국면으로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불가능의 이유를 명료하게 제시하지는 않는 편이다. 이에 반해 판 빠레이스는 그러한 단계적 이행이 불필요하다고 본다(곽노완, 2007: 187쪽 참조).
22) 이 외에도 화폐주조차익 중 인플레를 초래하지 않는 수준에서 일부를 사회전체성원에게로 분배하며 토지세와 생태세를 더욱 강화하는 방안 등도 병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3) 강남훈·곽노완·이수봉, 2009: 65쪽 이하. 이 모델에서 제시된 기본소득은 나이가 많고 장애정도가 심할수록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 65세이상의 노령층은 1인당 연 900만원을 받으며, 39세이하의 사람들은 1인당 연 400만원을 받는 것으로 설계돼 있다. 그리고 명목 경제성장률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매년 기본소득을 인상하자는 안이 제시돼 있다. 여기서 제시된 한국형 기본소득모델은 노동소득에 대한 증세는 최소화하고 자본주의적인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에 대한 과세강화 및 신설을 최대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모델보다도 탈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가장 많이 갖고 있으며 최대다수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설계돼 있다. 이는 기본소득운동이 정규직을 포함해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90%이상의 압도적 다수의 연대를 위한 끈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판 빠레이스의 기본소득모델은 주로 정규직들이 부담하게 될 고용지대로부터 대부분의 재원을 마련하도록 설계돼 있다(Van Parijs, 1997: 113~125쪽). 이는 정규직 다수를 기본소득의 잠재적인 반대자로 만들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형 모델과는 차이가 있다. 판 빠레이스가 이렇듯 고용지대를 최대의 재원으로 보는 이유는, 현대자본주의에서 가처분총소득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불로소득(이자·배당·지대) 및 투기소득(부동산양도차익·증권양도차익·환차익 등)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을 기본소득으로 전환시킬 계기를 경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기의 코뮌주의 직행론에서 후퇴해, 1995년 이후에는 ‘기본소득과 지분배당경제를 결합한 최적자본주의’를 지향하고 있다(이에 대한 비판은 곽노완, 2009b: 24~28쪽 참조). 기본소득을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으로 보는 독일 좌파당 연방의원인 키핑(Kipping)조차도, 이처럼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에 대한 집중과세를 통한 재원확보 방안을 경시하고 있다. 이렇듯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에 대한 간과는, 결국 정규직 상당수가 기본소득으로 받는 부분보다 더 많은 부분을 조세로 납부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인구의 90% 이상이 이익을 보는 한국형 기본소득모델과 달리, 인구의 3분의 2 정도만 기본소득으로 인해 이익을 보게 되고(Kipping, 2008, 3쪽) 그만큼 연대의 잠재적 외연을 좁히며 따라서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을 기본소득으로 전환하는 부분이 큰 해방적이며 코뮌주의를 지향하는 기본소득모델일수록 오히려 외연적 수혜자를 넓힘으로써 연대의 폭을 더욱 확장하며 그만큼 코뮌주의적인 대안경제의 실현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키핑이나 필자 외에도 기본소득을 사회주의나 코뮌주의로의 이행전략으로 보는 논자로는 에릭 올린 라이트(Wright), 호워드(Howard), 캘리니코스, 블라슈케 등이 있다(곽노완, 2009a: 61~62쪽).
24) 전지구적 기본소득의 재원으로는 세계단일통화주조차익 외에도, 지구적 규모에서의 탄소세 내지 생태세 등이 거론되고 있다(Van Parijs, 2006: 46쪽; Busilacchi, 2006: 71쪽 이하). 그리고 판 빠레이스는 최근에 영어 등 특정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언어의 사용국에게 언어세를 부과하여 전지구적 기본소득의 재원을 확충하자는 제안을 구체화하고 있다(조만간 책으로 출간될 예정임). 판 빠레이스는 이러한 전지구적 기본소득을 일국적 차원이나 지역적 차원의 기본소득을 대체하기 보다는 그것과 나란히 병립하는 것으로 제안하고 있다(Van Parijs, 2006: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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