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13일 개소식이 있었다. 서울 영등포에서 정동으로 이사한 금속노조의 이전 개소식이 있었다. 필자가 금속노조에서 나온 지 2년 만이었다. 개소식 며칠 전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새롭게 시작된 금속노조의 정동시대를 맞아 ‘투쟁터 다지기’를 제목으로 개소식이 진행됐다. 백기완 선생님은 투쟁의 쇳소리에 대해 말하며 금속노조를 축하했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도 참석해서 금속노조를 축하했다. 참석자들은 모두가 금속노조의 정동시대를 축하했다. 풍물가락에 장단 맞추며 모두가 축하했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이 나라 노동운동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날 단병호·문성현·김창근·김창한 등 금속연맹과 금속노조의 전 위원장들은 돼지머리 앞에서 금속노조의 발전을 기원했다. 고사상 위에서 귀를 높이 세우고 활짝 웃고 있는 돼지머리 앞에서 내외빈들은 혹은 대표로서 고사상 앞에 나가 엎드려 절하고 혹은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면서 금속노조를 위해 기원했다. 그리고 박유기 위원장은 ‘유세차’ 비나리로 금속노조가 굳건히 투쟁의 중심으로 계속 설 것을 다짐했다. 그렇게 이날 개소식은 계속됐다.
이날 개소식에서 대부분의 축사는 비정규직에 관한 것이었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근로자에 관한 대법원 판결과 그로부터 새롭게 촉발된 비정규직 투쟁이 이날 행사의 말이었다. 모두가 금속노조에 비정규직 투쟁을 당부하거나 지지하고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바야흐로 금속노조의 정동시대는 비정규직 투쟁으로 열리고 있었다.

2. 2008년 7월13일 퇴직하고 나온 뒤 이날 처음으로 금속노조 행사에 참석했다. 98년 금속연맹을 찾아가 기획국 법규담당으로 일하는 한 ‘청년’ 사법연수생이 떠오른다. 99년 법률국장으로 분주한 ‘초짜’ 변호사가 지나간다. 그리고 ‘법률원’을 짓고 개소식을 하는 생소한 이름 ‘법률원장’이 현판식에서 금속법률원을 올리고 있다. 이렇게 이날 개소식으로 10년 전 개소식을 떠올리고 말았다. 2000년 금속산별노조를 준비하기 위해 규약에 관한 의견을 내고, 2006년 금속노조 통합 대의원대회에서 규약개정안을 설명하던 자가 2008년 법률원의 위상과 역할에 관해 노동조합 중앙위원회에서 운영규정에 관해 호소하던 때의 안타까움도 지나간다. 그리고 금속노조를 나와서 바로 옆 건물에 여전히 법률사무소 새날의 간판을 들고 물러나 있던 자가 스스로를 추스려 정동극장 앞 사무소로 이전하고서야 새롭게 개소식을 하던 때가 떠오른다. 98년 그 사법연수생은 단병호를 봤지만 단병호는 사법연수생을 보지 못했다. 99년 위원장 문성현은 법률국장으로 임명했지만 법률국장의 꿈을 보지는 못했다. 법률원장으로 임명했지만 법률원장이라는 자의 가슴에 담겨진 꿈을 보지 못했다. 금속노조에서 그의 꿈은 낯설었다. 노동조합의 조직체계에서의 법률원만이 있었고 노동자의 법률조직으로서 노동운동에서의 법률원이라는 조직은 없었다. 노동조합 내부의 문제에서 법률원의 독립적인 판단은 언제나 문제였다. 사용자와 싸우기 위해서 법률원은 필요했지만 조직내부의 다툼에서는 법률원은 문제였다. 노동을 배제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 법률원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법률원이 내세우는 것은 납득하지 않았다. 정규직지부와 논란을 벌이던 비정규직지회의 질의에 관한 법률원의 회신은 골칫거리였다. 아무리 법률원장에게 말해 봐도 소용없었다. 노동조합 선거를 둘러싼 법률원의 질의회신은 바라던 회신내용을 받지 못한 후보진영에게는 법률원이 문제였다. 노동조합 집행부는 법률원에 조직내부 문제에 관한 질의의 접수와 회신의 처리 사실을 통보하도록 함으로써 관리하려고 했지만 법률원의 질의회신의 내용까지 관리할 수 없었다. 기아차 비정규직 조합원을 어떻게 편제할 것인지는 금속노조 규약에서 해당 비정규직단위에서 정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정규직지부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법률원은 질의회신했고 이에 대해 기아차지부로부터 금속노조 임원들은 강한 항의를 받았다. 이러한 일은 계속해서 발생했다. 조직내부 문제에 관한 질의회신 등을 통한 법률원의 의견이 언제나 문제였다. 그것이 조직내부에서 엄청난 논란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해도 법률원장이라는 자에게는 오직 법률원의 독립된 판단이 중요한 것이었다. 금속노조 임원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무리 정규직지부가 반발하고 이 때문에 금속노조 차원에서 지부와의 원만한 사업집행이 될 수 없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법률원장이라는 자는 그런 자였다. 그리고 금속노조는 법률원운영규정안을 정책실에서 만들어 상무집행위원회·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운영규정에서는 법률원은 노조 정책실장과의 협의를 통해 질의회신 처리를 포함한 법률사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 운영규정안에 반발하며 다시 법률원장이라는 자는 고집을 부렸다. 법률원은 독립적인 판단이 가능해야 한다. 그렇게 금속노조의 법률원운영규정이 제정돼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럼에도 노동조합 중앙위원회에서 운영규정은 제정됐다. 그리고 금속노조 10년을 그의 가슴에 묻고 금속노조를 떠났다. 이 고집불통은 자신의 꿈을 묻고서 떠나왔다. 금속노조를 떠나는 순간 더 이상 그 꿈은 그가 꿀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봤다. 그러나 떠나와서도 꿈을 꾸었다. 노조 법률원이 아니라고 해서 꿈을 꿀 수 없는 것은 아니라면서 고집을 부렸다. 노조여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고 노조라서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제멋대로 ‘노동법률원’을 짓고 개소식을 했다. 더 이상 판단에 간섭받을 수 없어 자유로운 노동법률원으로서 법률원이 수행했던 법률사업들을 계속해 나가면서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런 자가 이날 금속노조 개소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생각했다. 개소식 사회를 지켜보면서 법률원사태 당시를 떠올리며 김연홍 실장이 금속연맹에 처음 들어왔던 때를, 그와 나누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를, 그의 나이를, 그리고 그의 꿈을 생각했다. 김연홍은 금속노조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금속노조는 김연홍을 꿈꾸게 하고 있을까. 민경민과 배현철, 조건준 그리고 금속노조 사무처와 임원들, 그들의 꿈과 금속노조를 생각했다. 노동자를 위한 우리들의 꿈과 금속노조에서 우리들을 생각했다.

3. 이날 개소식의 공식적인 말은 비정규직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쓸데없이 위와 같은 사적인 일과 꿈을 생각했다. 나의 꿈을 생각했고 금속노조에서 나를 생각했다. 80년대 우리의 꿈과 90년대와 2000년대 우리를 생각했다. 운동을 시작하고부터 언제나 나의 꿈은 우리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이 우리를 갈라놓기도 했지만 금속노조에서 우리의 꿈을 생각했다. 정파가 다르고 의견그룹이 다르고 조직이 달랐던 우리의 꿈을 생각했다. 노동자 세상을 위한 우리의 꿈은 같았지만 금속노조에서 그 꿈을 찾는 우리의 다른 모습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50이 다돼 가는 우리의 청춘을 봤다. 장차 공식적인 비정규직 투쟁을 수행하게 될 모습들을 생각했다. 안타깝던 비정규직 투쟁의 지난날들이 새롭게 전개될 비정규직 투쟁 위에 자꾸만 겹쳐진다. 투쟁이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 비정규직 투쟁이 지금 사내하청노동자의 정규직화를 쟁취하지 못했다. 판결이 사그라져 가던 투쟁의 불씨를 되살렸다. 그래서 지금 금속노조는 소송에 높은 관심을 두고 비정규직의 조직화와 투쟁을 전개하려고 한다. 금속노조 비정규직대책회의는 법률원과 새날 등이 참여하는 법률팀을 꾸려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소송은 금속노조가 수행하는 비정규직의 투쟁사업의 모든 것일 수 없다. 노동조합이 소송에 집중하면 할수록 노동조합의 사업과 투쟁은 소송만이 앙상하게 남게 될 것이다. 지금 금속노조의 비정규직 투쟁이 그렇다. 판결로 시작된 투쟁은 소송으로 종결될 수도 있다. 그리고 소송은 원피고 당사자들과 소송대리인이 법정 공방으로 진행되고 노동조합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 필자는 금속노조의 대책회의에 새날 변호사로 참여하고 있다. 더 이상 금속 법률원의 변호사로서 참여하고 있지 않다. 이번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근로자에 관한 대법원사건뿐만 아니라 아산공장 사내하청근로자 등 비정규직사건을 과거 금속법률원이었던 법률사무소 새날의 변호사들이 담당해 왔기 때문에 관련 사건을 수행하고 있는 변호사로서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법률사무소 새날을 운영하고 있는 자로서 필자는 소송과 관련한 원칙을 둘러싸고 노동조합 법률원과 다른 입장에서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계산된 이해를 가지고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금속노조에서의 내 꿈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지 않다. 오직 필자가 담당하게 될 소송과 법률지원이 이 나라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권리 확보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나와 우리가 꾸었던 청춘의 꿈이 이 나라의 노동운동에서 백기완 선생님이 이날 말씀하신 쇳소리로 울리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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