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제기 : 노동운동의 위기

197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80년대 이래 레이건과 대처를 필두로 하여 최근까지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정부가 창궐하면서 미국을 비롯하여 주요 선진국에서 실업자가 폭증하며 비정규직이 대량으로 양산되고 노조조직률이 급속히 떨어졌다.

이와 더불어 정규직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됐다. 나아가 정규직이 중심이 된 노조운동과 노동운동에게는 자본주의 체제유지를 위한 ‘자본가계급의 동맹군’, 심지어 ‘반동적’이라는 비판마저 쏟아졌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이 1987년 이래 새롭게 힘차게 부상한 한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한국의 민주노총은 1996~1997년 총파업을 통해 다양한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다수 사회성원들로부터 열렬한 갈채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97~1998년 외환위기 이후(특히 2000년대 들어) 상황은 돌변했다. 한국에서도 노동운동을 비난하며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하는 다양한 진보세력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과거에 노동운동이 자신들을 핍박했다는 상상적 또는 현실적 피해의식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진보세력은 생태운동·여성운동·실업자운동·소수자운동·빈민운동·인권운동·학생운동·청소년운동·자율주의·ATTAC·시민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이들은 이제 노동운동의 중심성과 지도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노동운동이 연대의 역량과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한다.1) 심지어 노동운동을 싸잡아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증표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이제 노동운동은 자본가계급 및 이들의 시종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일부 진보세력으로부터도 배척되고 있다. 이는 노동운동의 진보성과 혁명성을 위해 불철주야 투쟁해 온 활동가들과 지지자들이 보기엔 억울할 뿐 아니라, 억지 주장일 것이다. 분명 그렇다.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일부 진보세력의 비난과 조롱을 억지라고 간단히 치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진보세력 내에서조차 노동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의 비판을 억지라고 치부하고 무시하면 노동운동은 점점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들 주장의 허구성을 증명하고 반박하거나 공격하는 것도 노동운동에 득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격받는 사람들은 적이 된다’는 논리가 진보운동세력들 사이에서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노동운동이 비판을 수용하고 진보세력 전체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도록 변혁해 다양한 진보세력의 공통된 비전을 새롭게 창출하고, 변혁의 힘을 한 차원 높이는 것이 유망한 경로일 것이다.

그럴 때에 노동운동은 현재의 위기를 넘어 또다시 진보운동의 유력한 축이 될 수 있고, 다른 진보세력으로부터 존경받는 연대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노동운동에 대한 다양한 진보세력들의 비판에 귀 기울이는 이상으로, 노동운동 자체의 발상전환과 변혁이 필요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럴 능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시작된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직까지 전세계 진보운동 중에서 진보적인 건강성과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다양한 진보세력이 존경하고 연대하고 싶어 하는 노동운동이 되기 위한 노동해방의 새로운 방향성과 비전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다.

빼앗김의 두 가지 시공간 : 착취와 수탈

노동운동의 목표가 노동해방이라는 데에는 대다수가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해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대체로 고전적인 좌파들은 임금노동을 철폐하고 노동자가 자기노동 및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고, 네그리 등 자율주의자들과 고르 등 탈노동패러다임의 주창자들은 노동 자체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활동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전자를 노동 안에서의 해방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해법으로는 필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 안에서의 해방+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동이 모든 부의 유일한 원천이며 잉여가치 내지 이윤의 유일한 원천인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라고 보는 사람들(나아가 이러한 착취로 인해 자본주의에서의 임금노동은 강제노동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노동해방은 무엇보다도 임금노동에 기초한 착취로부터 벗어나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 및 생산물과 세상의 주인이 되는 ‘노동 안에서의 해방’일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노동해방의 주역은 임금노동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빼앗김에 대한 저항이나 이를 되찾는 운동에서 빼앗기는 사람들만큼 열성적인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동뿐 아니라 지식을 포함한 모든 활동이 부의 주요한 원천이며 모두가 사회적 부의 생산자이기 때문에 평균이하의 소득을 얻는 사람들은 모두 착취를 당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게 착취로부터 벗어나는 노동해방의 주역은 임금노동자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청소년·학생·가정주부·이주자·노령빈곤층·장애인·노숙자·예술가 등이 임금노동자보다 더 많은 착취를 당하며 변혁에 더 적극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임금노동자는 임금을 받는만큼 이들보다 덜 착취당하며, 따라서 상당부분 자본에 포섭돼 반동적일 수조차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노동해방에 대해 화해하기 힘들게 보이는 두 가지 답으로는 진보운동의 전략이 갈라진다. 부의 원천과 착취 내지 빼앗김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결정적인 이유다. 노동해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착취 및 빼앗김의 시공간을 먼저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노동 안에서의 해방’에 주안점을 두는 노동중심주의자들은 스스로 마르크스를 계승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며 빼앗김을 당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임금노동자들뿐이라고 본다. 하지만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주장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라살레의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는 라살레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2):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그리고, 확실히 이것으로 물적 부는 이루어진다)의 원천이며, 노동자체는 하나의 자연력인 인간의 노동력의 발현일 뿐이다.”3)

『자본』1권에도 마르크스의 유사한 견해가 표명되어 있다: “따라서 노동은 자신에 의해 생산된 사용가치들 곧 소재적인 부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말했듯이 노동은 부의 아버지이고 지구는 그 어머니다.”4)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들 곧 지구와 노동자를 파멸시킴으로써만, 사회적인 생산과정의 기술과 조합을 발전시킨다.”5)
이처럼 마르크스는 자연이나 지구 자체도 노동과 더불어 부의 원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면 상당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이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가치와 잉여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마르크스에게 빼앗김의 시공간은 착취(Exploitation, Ausbeutung)의 시공간 뿐 아니라, 수탈(Expropriation)의 시공간이기도 하다. 착취의 시공간이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이라면, 수탈의 시공간은 노동과정과 다른 차원에서 빼앗김이 발생하는 모든 시공간을 지칭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이러한 수탈의 예로 시초축적 시기 농민에 대한 영주의 토지수탈6), 자본주의적 축적과 집중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소자본에 대한 대자본의 수탈(흡수·합병 등)7), 그리고 신용제도와 주식회사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전체 사회성원의 금융자산에 대한 소수 자본가들의 수탈8) 등을 들고 있다.

수탈의 시공간은 마르크스의 예를 넘어서 확장될 수 있다. 미국 달러화가 세계기축통화로 작동함으로써 미국민 모두가 누리는 달러화 주조차익, 영어사용자들이 얻게 되는 특별수익은 국제적·지구적 차원에서의 수탈의 시공간이다.

한미FTA와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저리의 미국채 등 유가증권으로 환류되는 것, 그리고 한국의 영어몰입주의는 이러한 수탈이 강압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기는 자들의 자발적이고 열렬한 욕망과 노력을 통해서 재생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부동산·증권투기차익, 가부장제사회에서 남성이 누리는 유리한 취업·승진기회, 내국인이 얻는 경제적 특권, 성인이 누리는 경제적 특권 등은 각자의 노력과 무관하게 경제적 특권이 작동하는 모든 시공간이 이러한 경제적 수탈의 시공간이다. 심지어 매력적인 외모, 유능한 배우자, 선망 받는 일자리와 지위, 타고난 좋은 지능·체력·소질,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누리는 경제적 특권도 모두 경제적 수탈의 시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각자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생겨난 불평등의 원천이다.

빼앗기는 사람들과 변혁의 주체

지속가능한 대안사회는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에서 생겨나는 착취와 수탈을 폐지해 지속가능한 수준에서 각자가 실질적으로 최대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면 빼앗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변혁의 주역은 누구인가? 자본주의적인 착취뿐 아니라 수탈의 시공간을 고려할 때, 빼앗기는 사람들이 임금노동자로 국한되지 않는 점은 명확하다.

노동중심패러다임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더 많이 빼앗기는 사람들은 임금노동자가 아닐 수도 있다. 특히 정규직은 더욱 아니다. 실업자와 노령빈곤층은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으며, 제 3세계로부터의 이주자들도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길 것이다.

대다수 청소년과 학생들도 임금노동자보다 적게 빼앗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장애인은 특히 더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을 것이다. 다수의 여성도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자율주의나 탈노동패러다임에 서 있는 고르 등이 생각하듯이 임금노동자 특히 정규직 대다수가 빼앗는 사람들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규직들은 소득이 상대적으로 높고 최빈자에 비해서는 부동산이나 주택·저축·증권 등 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므로 수탈을 덜 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착취의 시공간에서는 최빈자나 실업자에 비해서는 더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다. 특히 비정규직은 착취의 시공간인 노동과정에서 가장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적고 많음을 떠나서 빼앗기는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90%를 넘어설 것이다. 소득만이 아니라 재산까지 고려할 때, 불평등지수가 특히 높은 한국에서는 빼앗기는 사람들이 95%를 넘어설 수도 있다.

그리고 이처럼 빼앗기는 모든 사람들은 빼앗기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향한 변혁의 잠재적인 주체이다. 그리고 탈노동패러다임 옹호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더 많은 것을 빼앗기는9) 소수자들만이 변혁의 주역이거나 헤게모니를 갖는 것이 아니다.10) 왜냐하면 변혁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도주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말대로 ‘연합지성(assoziierter Verstand)’11)과 같은 긍정적인 대안을 구성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합지성은 들뢰즈와 가타리, 네그리 등이 중시하는 연결·접속·소통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집단적 능력과 대안사회를 위한 지적·정치적 연대와 연합의 능력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총을 포함하여 다양하게 조직화된 정규직은 비록 상대적으로 덜 빼앗기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저항과 대안을 구성하는 변혁의 유력한 주체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포함해 인구의 95%를 넘는 빼앗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투쟁한다면 어떤 진보세력도 그들을 탓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운동세력은 다른 진보세력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며, 연대파트너로서의 매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변혁은 실제로 그렇게 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계속이어짐>

[각주]

1) 네그리와 라자라또 등이 1990년대에 주장한 인지자본주의론의 입장에서, 전병권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구하는 노동운동조차 반동적이라고 주장한다. “노동계는 아직도 구래의 산업자본주의 시절의 집단투쟁의 환상에 사로잡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외친다. (…) 이 시대에 뒤떨어진 노동운동의 반동성을 보다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전병권, 2006: 180쪽)
2) 마르크스는, 리카도도 드 트라시에 따라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MEW 23: 94쪽).
3) MEW 19: 15쪽(「고타강령비판」,『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4권, 2007, 박종철출판사: 371쪽).
4) MEW 23: 58쪽 - 강조는 인용자.
5) MEW 23: 530쪽 - 강조는 인용자.
6) MEW 23: 744쪽 이하.
7) MEW 23: 654쪽.
8) “이러한 수탈(Expropriation)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서 대립적인 형태로 곧 소수에 의한 사회적 소유의 전유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용으로 인해 이 소수는 점점 순전히 행운을 찾는 모험가의 성격을 띤다. 여기서는 소유가 주식의 형태로 존재한다. 주식의 운동과 양도는, 작은 물고기가 상어에게 잡아먹히며 양들이 증권늑대들에게 잡아먹히는 증권놀이의 순수한 결과이다.”(MEW 25: 456쪽 - 강조는 인용자)
9) 탈노동패러다임에 서 있는 논자들은 대체로 임금노동과 노동과정을 중심축으로 하는 마르크스의 착취개념이 협소하다고 보고, 착취의 시공간을 임금노동 외부로까지 확장한다. 기본소득의 주창자인 판 빠레이스는 마르크스의 착취개념을 변형하고 로머(Roemer)의 착취개념을 더욱 확장해, 노력에 기반을 두지 않는 불평등을 낳는 모든 영역(예를 들면 선망 받는 좋은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의 경제적 특권, 남성이 누리는 경제적 특권, 영어사용국민의 경제적 특권 등)을 착취의 시공간으로 정의한다(Van Parijs, 1993: 89-109; 1997: 133-185쪽).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선망 받는 일자리를 가진 상당수 정규직 임금노동자는 피착취자라기보다는 착취자에 속한다. 한편 네그리와 하트는 여가활동을 포함한 모든 활동이 노동이며 이런 노동을 하는 사람들 곧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자본에 의해 착취당한다고 주장한다(하트/네그리, 2001: 508쪽). 이처럼 탈노동패러다임에 서 있는 논자들은 마르크스의 착취개념 및 프롤레타리아트개념을 외연적으로 확장한다. 특히 네그리/하트의 경우, 이러한 외연적 확장을 통해 산업노동자계급을 혁명성을 폄하하고 비물질노동(지적·소통적·정서적 활동)의 헤게모니를 주장하기까지 한다(네그리/하트, 2001: 517쪽). 어쨌든 네그리/하트뿐만 아니라 판 빠레이스도 착취와 다른 또 다른 빼앗김의 시공간인 마르크스의 ‘수탈’개념을 체계적으로 간과한다. 그리고 사실상 이 두 시공간을 무차별적으로 착취의 시공간으로 통합함으로써 상당수의 정규직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빼앗는 사람들의 편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는 정규직·비정규직을 상대적으로 덜 수탈을 당하지만 더 많은 착취를 당하는 사람으로 보는 필자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10) 들뢰즈와 가타리는, 노동자계급이 기왕에 획득한 사회적 지위나 심지어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한 자본의 일부일 뿐이며 자본의 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들뢰즈/가타리, 2001: 902쪽).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처럼 노동자계급의 탈자본주의적 변혁주체성을 조건부적으로 부정한다.
11) MEW 25: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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