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노동자들이 사망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직업성 암을 소개한 바 있다. (2007년 미국산업의학회지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전 세계 노동자 사망의 32%는 직업성 암 때문이며, 순환계질환(26%), 업무 중 사고(17%)가 뒤를 이었다) 최근 금속노조가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발암물질진단사업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노동현장을 접하고 있다. 이 사업은 금속사업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 중에 발암물질은 얼마나 되는지, 일하면서 노출될 위험은 없는지 등에 대해서 조사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사업이다. 주로 자동차 부품사업장들을 조사하면서 주물작업·절삭작업·도장작업·세척작업·용접작업 등 참으로 위험한 발암물질들이 아무런 대책 없이 사용되는 현장들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래전 보았던 영화가 한 편 생각났다. 약 7~8년 전 화제가 됐던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다. 영화에서 결국 살인사건은 해결되지 않았고 마지막에 형사가 범행 장소에서 새로운 단서를 발견하며 아직도 ‘이 사건은 진행 중’이라는 듯 여운을 남기며 끝난다.

왜 영화 이야기를 꺼낼까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노동현장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물론 수십 년간 변하지 않는 곳도 있을 것이다) 생산방식이 변하고,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바뀌고, 무엇보다도 이른바 애로공정이라고도 불리는 위험한 작업들은 하청노동자·이주노동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과거에 어떤 물질들을 사용했고, 어떤 상황에서 일했는지는 노동자들의 머릿속에 기억으로만, 추억으로만 남는 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다음은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들이 들려준 얘기다.
“예전과 생산방식도 바뀌고 환경도 많이 좋아졌죠. 글쎄요? 환기장치가 설치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퇴직한 분들이나 알까….”
“우리야 제품 만드는 데만 신경 쓰지, 페인트가 언제 바뀌었는지, 석면보온재가 언제 교체됐는지 알간디요? 그냥 회사에서 주면 주는 대로 쓰는 거지?”
“예전에야 직접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하청업체에 넘기고 우리는 관리만 해요. 예전에 직접 그 작업할 때는 말도 못했어요. 먼지에, 냄새에, 소음은 얼마나 심하던지…. 지금 다시 그 일 하라고 하면 못하죠.”

노동자에게 발생한 질병(또는 재해)이 일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 역학조사라는 것을 진행한다. 언론에서도 자주 언급됐던 한국타이어 집단 돌연사와 관련된 역학조사, 삼성반도체 백혈병 발생과 관련된 역학조사 등이 대표적인 예다. 흔히 역학조사를 형사들의 사건수사과정에 비유하곤 한다.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환경측정과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평가하고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형사가 범인을 잡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화학물질 노출로 인해 급성적으로 병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직업성 암을 포함한 대부분의 질병들은 처음 노출된 이후 그 영향이 수년에서 수십 년간 잠복됐다가 나중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경우 과거에 어떤 물질들을 사용했는지,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 일했는지가 중요한 판단근거가 된다. 즉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물질들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노출평가자료·업무내용을 비롯한 근무기록 등이 작업관련성을 판단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자료이다. 그런 자료는 회사가 다 알아서 보관·관리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체계적으로 자발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사업장은 본 적이 없다.

국제금속노조연맹(International Metal Worker's Federation, IMF)의 직업성 암과 관련된 노동조합의 활동지침에 따르면 직업성 암이 의심될 때는 가장 먼저 화학물질·작업환경 관련자료 등의 자료를 모으고 정보를 분석해야 한다. 단지 발암물질과 직업성 암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미조직된 노동자들은 노동자들 스스로 이런 노력을 해야 한다. 만약에 병이 생기고 직업 때문이라고 의심된다면 비빌 언덕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취급하는 화학물질에 대한 관심을 갖고, 가능하다면 관련 증빙자료를 모아보자.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떤 물질들을 취급하고,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 기록으로 남겨두자. 내가 취급하는 화학물질에 대해 환경측정에서 제대로 다룰 것을 요구하고 감시하자. 이런 자료는 누가 대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대신할 수 있는 요구도 아니다. 수년 또는 수십 년간 현장에서 일해 온 노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화학물질로 인한 노동자들의 죽음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노동자가 병을 얻게 되고 행여 직업 때문이라고 의심될 때 과거 사용했던 화학물질, 당시의 열악한 작업상황은 여전히 추억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영화제목처럼 살인의 추억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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