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전면 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7월로 시행 2년을 맞았다. 가장 큰 변화는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이 바뀌고,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질병 여부를 결정하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가 신설됐다는 점이다. 개정 산재보험법은 ‘신속하고 공정하게 산재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본연의 취지에 부합할까.
보통 사회가 발전하면 사고성 재해는 줄어들고, 질병은 늘어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반대다. 업무상사고가 증가하고, 업무상질병이 감소하고 있다. 산재보험법상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되는 건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매일노동뉴스>가 세 차례에 걸쳐 업무상질병이 줄어드는 이유와 질판위 도입 2년의 성과와 과제를 짚어 보고, 업무상질병 인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는 대안을 살펴본다.<편집자>


[게재 순서]
1. 치솟는 뇌심혈관질환 업무상질병 불승인율
2.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도입 2년
3. 업무상질병 인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노동자에게 질병의 원인을 찾으라고 하지 말고 근로복지공단이 질병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불승인만 남발할 겁니까. 공단은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합니다.”(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노동자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국내에는 골수가 맞는 사람이 없어 일본에 골수검사를 신청했어요. 한 번 검사 받는데 300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치료비가 2억원은 들어갈 것 같아요. 업무상질병 불승인 도장을 찍은 사람부터 삼성전자에 근무시켜 봤으면 좋습니다.”(삼성반도체 재생불량성빈혈 피해노동자 유명화씨의 아버지 유영종씨)

지난 2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앞.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관계자들이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한 산업재해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반올림은 이날 삼성전자 반도체와 LCD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3명의 요양신청서를 공단에 제출했다. 삼성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요양신청을 한 것은 이날이 세 번째였다. 27일 현재 반올림에 접수된 직업병 피해노동자는 62명이다. 이 가운데 23일 요양신청을 한 3명을 제외하고 13명이 요양·유족급여 신청을 했지만 전원 불승인됐다.
산재보험은 우리나라의 다른 사회보험에 비해 보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업무상재해로 인정되면 요양·간병·휴업·장해·유족급여 등 다양한 급여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업무상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면 모든 치료비를 노동자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모’ 아니면 ‘도’인 것이다.
특히 업무상질병의 경우 산재보험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다. 직업성암은 업무상재해로 인정받는 것 자체가 희귀한 사례로 분류될 정도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8년 직업성암으로 승인된 사례는 5건, 지난해에는 4건에 불과했다. 그나마 올해는 약간 늘어나 1분기에 10건이 직업성암으로 인정됐다.


과거 노출수준만 따지다간…

이처럼 직업성암이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는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을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백혈병 발병원인인 벤젠의 경우 1피피엠(ppm) 이상의 농도에 10년 이상 노출되거나, 노출기간이 10년 미만이더라도 누적 노출량이 10피피엠 이상이어야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 발암물질 노출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영세사업장도 허다하다.

삼성전자 직업병 관련 행정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메디컬법률사무소의 박영만 변호사(산업의학의)는 “기본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된 노동자가 그 물질로 인해 암에 걸렸다면 직업병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며 “과거 노출수준만 따져서는 도저히 직업병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법원은 근로복지공단보다 폭넓게 업무상질병을 인정하고 있지만, 피해노동자와 가족은 기나긴 소송기간을 버티는 것 자체가 버겁다.

끊이지 않는 노정갈등

이처럼 엄격한 기준에 충족해야만 업무상질병을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와 산재노동자들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에 따라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절반 정도라도 입증될 경우 반액이라도 보상하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안치현 한국노사관계진흥원 대표(노무사)는 “(업무상사고와 달리) 업무상질병은 그것이 일 때문인지 아닌지를 구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며 "업무상질병에 대해서는 반액보상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사회적 차원에서 검토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단병호 전 민주노동당 의원이 2005년 발의했던 산재보험법 개정안은 ‘선지급 후평가’를 뼈대로 하고 있다. 노동자를 진료한 의사가 업무상재해로 인정할 경우 우선 요양급여를 지급하고, 업무상재해 여부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판단하기 위해 산업재해보상보험심사평가원을 설치하자는 것이다. 이 개정안은 당장 치료비가 시급한 노동자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안이었지만 17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인정기준 지속적으로 개정해야"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사실 지금의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은 의학적·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신뢰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을 지속적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인정기준을 주기적으로 개정해야 신규 유해물질이 계속 늘어나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업무관련성 평가에 관한 기초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예를 들어 직업성암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업종에서 주로 발생되는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직업성암은 산업재해 인정건수도 매우 적기 때문에 산재통계를 기초자료로 활용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직업성암 건수는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다. 우리나라 국민의 전체 사망원인 가운데 가장 많은 병원군이 암인데도 직업성암은 터무니없이 적게 인정되고 있다. 임종한 인하대 교수(산업의학의)는 “해외의 연구결과를 적용하면 우리나라에서 직업성암으로 인정받는 사례가 기본적으로 1천명에서 1천500명 수준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어느 직종이나 업종에서 주로 직업관련성 암이 발생하는지를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며 “그래야 업무상질병을 정교하게 평가하는 틀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부, 문제점 해결할까

직업성암 인정기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르자 최근 노동부는 직업성암 인정기준 합리화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용역결과는 오는 11월 말께 나올 예정이다. 하지만 노동부는 당장 인정기준을 개정할 계획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불승인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뇌심혈관질환 인정기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을 밝혔다. 노동부 관계자는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이 개정된 지 2년밖에 안 됐다”며 “뇌심혈관질환 인정기준 개정 계획은 없다”고 못 박았다. 이 관계자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고 본다”는 다소 엉뚱한 평가를 내렸다.
노동부가 업무상질병판정위와 업무상질병 인정기준과 관련해 잇따라 제기되는 문제점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 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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