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전면 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7월로 시행 2년을 맞았다. 가장 큰 변화는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이 바뀌고,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질병 여부를 결정하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가 신설됐다는 점이다. 개정 산재보험법은 ‘신속하고 공정하게 산재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본연의 취지에 부합할까.
보통 사회가 발전하면 사고성 재해는 줄어들고, 질병은 늘어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반대다. 업무상사고가 증가하고, 업무상질병이 감소하고 있다. 산재보험법상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되는 건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매일노동뉴스>가 세 차례에 걸쳐 업무상질병이 줄어드는 이유와 질판위 도입 2년의 성과와 과제를 짚어 보고, 업무상질병 인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는 대안을 살펴본다.<편집자>


[게재 순서]
1. 치솟는 뇌심혈관질환 업무상질병 불승인율
2.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도입 2년
3. 업무상질병 인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1. “모든 회의라는 게 처음에는 적응기간이 필요하잖아요. 위원회라는 조직도 처음 6개월 정도는 눈치를 보게 돼 있습니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도 초기에는 심의활동을 했다기보다는 위원장의 부의안에 거의 따라갔다고 봐야죠.”(질판위원 A씨)

#2. “한번 회의를 하면 3시간 동안 평균 25건에서 30건을 다룹니다. 한 건 처리하는 데 5~6분이 소요되는 거죠. 그 시간 안에 모든 자료를 읽어볼 수가 없어요.”(질판위원 B씨)

노동자들의 업무상질병 여부를 심의하고 결정하는 기구인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 제도가 도입된 지 이달로 2년이 됐다. 질판위는 근골격계질환과 뇌심혈관질환 등 업무상질병이 늘어나면서 인정기준과 판정을 둘러싼 시비가 지속되자 도입된 제도다. ‘산재보험제도 발전을 위한 노사정위원회’는 지난 2006년 12월 근로복지공단 지역본부별로 업무상질병을 심의·판정하는 질판위를 두기로 합의했고, 2008년 7월 서울·부산·대구 등 6개 지역본부별로 질판위가 설립됐다.

이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공단에서 자문의사협의회의 자문을 얻어 업무상질병 여부를 결정했다. 자문의사를 공단에서 위촉했기 때문에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랐다. 지사별로 판정결과가 다르다는 민원도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 질판위 제도는 이런 문제점을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까. 이달 16일 <매일노동뉴스>와 만난 한 질판위원은 “위원회라는 특성상 초기에는 적응시간이 필요하다”며 “처음에는 질판위원들끼리 눈치를 보다 보니 말을 아꼈다”고 말했다.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데 무슨 얘기를 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심의회의는 위원장(근로복지공단 고위 직원)을 포함해 총 7명으로 구성된다. 보통 4명의 의사위원(임상의학의·산업의학의)과 2명의 법률가(변호사·공인노무사)·산재전문가(공단·노동부 퇴직자)로 구성된다. 각 위원회 위원은 50명 이내로 구성되는데, 올해 4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개정되면서 위원수가 70명으로 확대됐다. 질판위 도입 이전에는 요양신청건을 담당하는 공단 보상부 직원이 민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은 전적으로 업무상질병 여부를 질판위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노무사나 노동단체·사업주·의료기관 같은 이익단체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진 측면이 있다.


심사 전 받는 서류는 '2쪽짜리 심의안'

하지만 질판위의 운영상의 허점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질판위원들은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심의회의에 참가하는데, 1주일 전에 받는 자료는 2쪽자리 심의안이 전부다. 공단에서 정리한 자료인데, 재해내역과 주치의 소견 등이 간략히 정리돼 있다. 요양을 신청하는 노동자측 주장은 따로 정리돼 있지 않다.

요양을 신청한 재해자가 제출한 전체 자료는 심의회의 당일에야 확인할 수 있다. 하루 평균(회의시간 3시간) 심의건수가 25~30건인 상황에서 서류목록을 다 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민주노총 법률원의 권동희 노무사는 “아무리 많은 서류를 제출해도 질판위원들이 워낙 많은 사건을 단시간에 처리하다 보니 진중한 심사가 이뤄질 수가 없다”며 “결국 형식적인 심사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질판위 운영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노동자들의 항변권은 어디에?

게다가 요양을 신청한 노동자는 질판위가 판정을 하기 전에 회사측에서 어떤 자료를 제출했는지 알지 못한다. 뇌심혈관질환의 경우 노동자가 의식을 잃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 재해자의 가족이 요양·유족급여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회사측이 제공하는 자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질판위는 공단 지침에 따라 회의록을 작성해야 한다. 녹음으로 기록을 대신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정보공개를 신청해도 회의록이나 녹음테이프는 질판위 운영규정상 공개할 수 없다는 게 공단의 입장이다. 민주노총 법률원은 지난해 공단을 상대로 정보공개 일부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으나 지난 5월 서울행정법원은 “참석위원 명단은 공개하되 회의록은 공개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회의록이 공개되면 공정한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권동희 노무사는 “질판위원은 산재신청인이 심사회의에 참석할 때 어차피 확인할 수 있다”며 “핵심은 회의록 공개 여부였는데 질판위원 명단만 공개하라는 판결이 나왔다”고 아쉬워했다.

이해 부족한 위원 ‘자질’ 논란도

업무상질병 요양신청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질병은 근골격계질환과 뇌심혈관질환이다. 두 질병에 있어 핵심은 업무부담과 과로 여부다. 문길주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질판위원들이 대기업의 작업현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지만 중소사업장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며 “이 때문에 근골격계질환을 퇴행성으로 분류해 불승인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질판위원을 하다 스스로 그만뒀다는 한 전문가는 “임상의학의들은 (업무상질병 판정에 관한) 사회적 사명감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회의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며 “업무상질병 인정기준 자체가 애매하다 보니 자신이 갖고 있는 전문가의 감에 따라 판단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노동계는 재해노동자의 요양신청을 기초로 관련질환과 인과관계를 갖고 있는 작업 유무에 대한 재해조사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성호 한국노총 안전보건연구소 국장은 “작업관련성질환의 경우 지속적인 과로나 신체부담작업 여부를 조사하는 작업력 조사를 강화해야 한다”며 “공단이 재해조사인력을 확충해 질환을 유발하는 작업에 대해 10년 이상 작업력을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캐스팅보트’ 역할하는 위원장

질판위 제도가 도입되기 전과 비교해 업무상질병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공단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질판위가 공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일단 질판위 심의회의 위원장이 공단의 고위급 직원이다. 질판위 제도 도입 초기에는 위원장이 심사회의 초반에 자신의 입장을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또 질판위원끼리 의견이 맞설 경우 표결에 들어가는데, 동수가 나올 경우 위원장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다. 임종한 인하대 교수(산업의학의)는 최근 질판위 관련 토론회에서 “질판위의 심의건수가 많기 때문에 적절한 회의 진행을 위해서는 위원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공정한 평가를 위해 질판위 위원장은 학계에서 민간전문가가 맡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심의 전에 모든 자료 제공해야

이 같은 질판위의 운영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단기적인 과제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심의회의 전에 질판위원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질판위원은 “산재신청인의 주장을 요약한 원본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문제”라며 “사전에 모든 서류를 질판위원들에게 보낸다고 해서 과연 다 볼 수 있을지 의문은 들지만 보든 안 보든 일단 자료는 미리 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질판위원을 늘려 심의건수를 줄이고 최소한의 심의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김용규 가톨릭대 교수(산업의학의)는 ‘책임심사위원제’를 제안했다. 질판위원들에게 모든 자료를 사전에 제공한 후, 위원별로 사건을 배정해 좀 더 꼼꼼하게 자료를 읽고 오도록 책임을 지우자는 것이다. 김 교수는 “책임심사위원이 해당 건에 대해 공단에서 작성한 요약본에 잘못은 없는지 확인하면, 좀 더 책임 있게 판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적으로 질판위를 공단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산재보험기금을 운용하는 기관이 재해 여부까지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기금을 운용하는 공단 입장에서는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은 “재해 여부를 조사하는 기관은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업무상재해를 조사하고 판정하는 기관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독립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업무상질병 인정기준 자체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권동희 노무사는 “질판위의 한계도 있지만 핵심은 산재보험법”이라며 “아무리 뛰어난 질판위원이 심사를 한다고 해도 현행법상 인정기준과 공단 지침에 따르면 불승인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울은 상대적으로 불승인율이 높은 뇌심혈관질환 심의 비중이 높았고, 대전지역은 불승인율이 낮은 근골격계질환 심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같은 질병이라도 지역에 따라 불승인율 편차가 심해 판정의 일관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질환의 경우 부산(94.7%)과 대전(44.4%)의 불승인율 차이가 무려 50.3%포인트에 달했고, 세균성질환도 광주(60%)와 대전(10.4%)의 불승인율 차이가 49.6%포인트에 이르렀다. 안면신경마비는 서울·부산·대구·경인에서 전원 불승인된 반면, 대전에서는 전원 인정됐다. 심의건수가 가장 많은 근골격계질환의 경우 서울의 불승인율(51.9%)이 가장 높았고, 광주는 상대적으로 불승인율(32.5%)이 낮았다. 조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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