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월드컵이 지난 12일 폐막했다. 우승컵은 스페인에게 돌아갔다. 붉은악마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광장으로 몰려나와 ‘대~한민국’을 외쳤다. 하지만 월드컵이 다국적 기업들의 마케팅 각축전 현장으로 변모하면서 ‘공의 축제’는 사라지고 ‘쩐의 전쟁’만 남았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노동계급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성장한 축구가 이제는 노동계급을 소외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자조도 흘러 나온다. <매일노동뉴스>가 축구와 노동, 노동과 축구의 뒤안길을 조명해 봤다.
 
“왜 축구에는 국제노동기구(ILO)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가.”
노조 간부가 한 말이 아니다. ‘신의 손’ 아니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가 한 말이다. 막대한 TV 중계권료를 손에 쥔 기업과 구단주는 햇볕이 내리쬐는 이글거리는 한낮의 그라운드 안으로 선수들을 밀어 넣는다. 스포츠와 자본의 결탁에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 장소가 어디든, 대상이 누구든 간에 돈이 개입되면 문제가 불거지기 마련이다. ‘황제’에서 ‘노예’에 이르기까지 수직적 다단계로 몸값이 매겨지는 축구선수들에게 노동권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선수노조가 설립되지 않은 데다, 해묵은 ‘근로자성’ 논쟁도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다. 상당수 국가에 선수노조가 존재하며, 교섭권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축구와 노동

이렇듯 알고 보면 축구와 노동은 지근거리에 있다. 초기형태의 축구가 보여 주는 저항정신은 노동운동과도 맥이 닿는다. 기원전 1천500년 중앙아메리카와 아마존의 일부지역에서 발원해 로마의 하르파스툼, 그리스의 에피스키로스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초기형태의 축구는 축제의 일종인 카니발이나 종교의식에 가까웠다. 축제의 날이 오면 사람들은 술과 춤, 축구를 즐겼다. 축구는 점차 지배계급에 대항 저항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지배계급의 상징은 희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저항의 에너지를 두려워한 지배층은 축구 금지령으로 맞서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다. 그는 1368년 축구를 금지했고, 이를 어기는 관리들의 발을 잘랐다.

공은 시간을 따라 구르고 굴러 19세기 영국에 이르렀다. 들판의 축제는 귀족의 잔디밭으로 무대가 옮겨졌고, 각종 룰이 정해졌다. 현대축구가 정립된 것이다. 영국이 오늘날까지 ‘축구의 종가’로 불리는 이유다. 그때는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유럽 제국으로 번지면서 유럽 각국에 공업도시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축구는 영국 명문사립 학생들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곧 여가선용을 원했던 중산층 노동자들이 몰두할 만한 오락이 됐다. 숙련기술을 갖고 직업의 안정성을 확보한 노동자들은 떼를 지어 축구장을 찾았다. 축구장은 잔디로 둘러싸인 공장이었고, 수많은 시민들은 공장 문을 들어서는 노동자였다. 산업혁명 시기에 새롭게 출현한 노동계급은 토요일 오후가 되면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해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손을 놓았고, 실업기간에도 입장료만큼은 따로 챙겨 놓을 정도였다.

세계 최고 명문 축구클럽들이 예외 없이 철강·석탄·섬유도시나 무역항을 끼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공업도시 노동자들이 축구에 얼마나 중독돼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의 맨체스터(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산업혁명을 유럽대륙에 전파한 리버풀(리버풀), 이탈리아의 최대 공업도시 밀라노(AC밀란·인터밀란)와 최대 자동차도시 토리노(유벤투스), 스페인 제1의 공업도시 바르셀로나(FC바르셀로나) 등은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축구와 민족

1882년 6월(고종 19년) 인천 제물포항. ‘플라잉 피시’호를 타고 입항한 영국 해군들이 연안부두에서 공을 찼다. 이것이 한국 근대축구의 첫걸음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 땅에 불기 시작한 근대화의 바람은 교육열풍으로 이어졌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사학이 생기면서 축구도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1907년 일본이 집회 금지를 위한 보안법을 공포하면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축구열풍은 계속됐다. 한국 축구는 54년 사상 처음으로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무대를 밟은 이래 올해 남아공월드컵까지 여덟 차례 본선에 진출했다.

우리나라에 프로축구가 등장한 것은 83년 5월8일이다. 이때 출범한 ‘슈퍼리그’는 할렐루야와 유공 등 프로 두 팀과 대우·포철·국민은행 등 아마추어 세 팀을 묶어 5개 팀으로 구성됐다. 아시아 최초의 프로리그였다.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은 반정부적인 움직임·사회적 이슈 제기를 무력화할 목적으로 이른바 ‘3S정책’을 시행했다. 스포츠(Sports)·섹스(Sex)·스크린(Screen)의 머리글자를 딴 3S 정책은 “정당성 없는 권력의 우민화 정책”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된 유럽 축구와 달리 한국 축구는 계급성보다는 민족성과 연관 지어 해석할 여지가 많다. 대표적인 게 남북관계의 변화다. 1950년대와 60년대 남과 북은 축구장에서도 서로를 외면했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는 그만큼 컸다.

남한축구팀은 60년 로마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날아온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라’는 지시에 불복했고, 북한축구팀은 ‘North Korea’라는 호칭을 사용하라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제안에 반발해 64년 도쿄올림픽 직전 불참을 선언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 출전한 북한이 예상을 깨고 8강에 진출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 주도로 ‘양지’라는 축구팀을 창단해 사상 최초로 해외 원정훈련을 보냈다.

이런 남북 대결구도를 극복한 것도 축구였다. 남북 축구는 90년대 들어 해빙기를 맞았다. 90년 남북 통일축구대회가 열렸고, 91년에는 세계청소년대회에 남북이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99년에는 남북노동자 축구대회도 열렸다. 축구공이 대결의 시대를 넘어 화해의 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축구와 갈등

축구는 종종 노사갈등의 소재로 떠오른다. 지난달 열린 남아공월드컵 기간 동안 기아자동차 노사는 월드컵 ‘유급시청’을 놓고 기싸움을 벌였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는 지난달 17일 열린 한국과 아르헨티나 경기를 앞두고 회사측에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TV 시청을 하자”고 요구했다. 해당 시간 임금을 달라는 주문도 덧붙였다. 회사는 지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축구시청권을 둘러싼 노사갈등은 외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축구 선진국인 영국과 브라질에서는 노동자들이 월드컵 경기를 시청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논의가 이뤄지기도 한다. 영국 노동조합평의회(TUC)는 지난 5월 월드컵 기간에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TV를 볼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일부 면제하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사용자측에 요구했다. TUC는 “노동자가 축구를 못 봐서 의기소침해지면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축구를 보게 하고 나중에 추가 근무를 하도록 하는 게 낫다”는 입장을 밝혔다.

브라질에서는 은행들이 6번째 우승에 도전하는 브라질 축구대표팀의 경기가 치러질 때마다 영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노동자의 사기를 꺾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대회기간 중 경기에 한눈이 팔려 은행 보안이 느슨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다. 독일은 아예 사용자단체가 월드컵 시청을 독려했다. 독일경총(BDA)은 남아공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독일대표팀의 월드컵 경기를 직장에서 시청할 수 있도록 할 것을 회원사에 권고했다.

이처럼 세계를 열광시키는 축구는 ‘아동 노동착취’의 상징이기도 하다. 축구공을 제작하는 데 빈곤국가 어린이들의 ‘고사리 노동’이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상무부와 국제무역위원회에 따르면 전 세계 축구공의 대부분은 중국과 파키스탄·인도·태국에서 생산된다. 63년 월드컵 공인구 개발권을 따낸 이후 납품을 독점하고 있는 아디다스가 이번 남아공월드컵 공인구로 납품한 ‘자블라니’도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축구공의 대부분은 100퍼센트 사람의 바느질로 완성된다. 기계로 만드는 축구공은 품질이 떨어진다. 한 사람이 하루 4∼6시간 동안 오각형 또는 육각형의 외피조각 32장을 약 1천620여회의 바느질로 꿰매야 축구공 한 개가 만들어진다. ILO가 99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축구공을 꿰매는 5~14세 아동이 전 세계적으로 7천여명에 달한다. 축구를 제대로 못해 본 어린이들이 저임금을 받고 손가락을 찔려 가며 공을 꿰매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성장한 축구가 노동착취의 수단으로 변질된 셈이다.

축구만 변한 것이 아니다. 축구장은 초국적자본의 돈벌이 장터로 전락했다. 선수들은 축구귀족과 축구빈민으로 양분돼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축구공이 둥글다는 사실이다. 최고의 승부에는 반전이 숨어 있는 법. ‘카니발 축구’의 저항정신을 닮은 회심의 역전골이 터질 날을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

[참고자료]
리처드 줄리아노티 <축구의 사회학> 현실문화연구(2004)
김성원 <한국 축구 발전사> 살림(2006)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축구, 그 빛과 그림자> 예림기획(2006)
김영호 <프로스포츠 선수의 노동법적 보호방안>(2006)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484호(2010)
 
축구선수는 ‘근로자’인가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우승한 스페인에는 스페인축구선수노조(AFE)가 있다. AFE는 월드컵 개막을 앞둔 지난 4월 레알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 같은 대표적 명문팀까지 동참한 가운데 조건부파업을 결의해 축구 당국을 당혹하게 했다. 프로축구 하위리그 선수들이 겪는 상습적인 임금체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프리메라리가를 포함한 상위 4부 리그에 출전을 거부하겠다는 것이 AFE의 입장이었다.
루이스 마누엘 루비알레스 AFE 위원장은 “모든 선수가 축구라는 이름으로 연대할 것을 확신한다”며 “파업이 긍정적 수단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선수 수백 명이 돈을 못 받고 뛰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치”라고 말했다.
하위리그 선수들의 임금 문제를 위해 상위리그 선수들까지 힘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훈훈한 광경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는 아직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노조 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근로자로서의 법적 지위 역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프로스포츠 선수의 근로자성 논란은 축구가 아닌 야구에서 간헐적으로 제기돼 왔다. 83년 한 구단의 선수들이 산재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노동부에 근로자성 여부를 질의했다. 당시 노동부는 “근로자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노동부는 “프로 경기는 대중인기에 영합함으로써 흥행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활동인 순수한 의미의 노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2000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만들어졌다. 근로자성 논란이 재연됐다. 그러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선수는 근로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라며 “선수들이 노조를 만들지 않고 협의회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프로야구선수협회가 지난해 노조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 근로자성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노동부 관계자는 “이미 외국에 선수노조가 설립돼 활동 중이기 때문에 노조 설립에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노조 설립 시도는 구단과 감독들의 반대에 부딪혀 유명무실해졌다.
프로스포츠 선수의 근로자성에 대한 노동법학계의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프로선수 계약은 구단과의 사용종속관계가 인정되는 근로계약이라는 견해(자유계약 선수 제외)와 고용계약과 도급과 위임 등의 법리가 뒤섞여 있는 혼합계약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골프장 캐디나 보험모집인 같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근로자성 논란과 유사하다. 개별 노동관계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선수의 생계와 직결되는 건강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우선 적용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구은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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