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건한’ 정책의 참을 수 없는 한가로움
상기하자면 나의 문제의식은 서구 근대적 담론이 어떻게 우리 운동의 노선에 스며들어 발목을 붙잡고 있는가를 밝히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과 기본소득 사이에는 아득한 간극이 놓여 있다. 핵심은 노동과 소득의 분리다. 이것은 기존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노동가치설을 확립하고, 청년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바로 그 노동에 대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역사적 단계에서 제기되는 문제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멈춰섰던 지점이고 초점을 달리했던 지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을 비판한 사람이지 완성시킨 사람이 아니다. 동시에 노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본축적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래서 ‘자본론’이지 ‘노동론’이 아닌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동과 소득의 분리라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더욱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23) 그 자체의 다양한 존재 즉 인간의 실천개념으로서 확장돼야 한다는 인식을 전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만일 국민정서를 고려하거나 현실적인 접근방법의 문제라면 기본소득 역시 그러한 접근이 가능하다. 예컨대 기본소득을 청년실업자나 고령자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서서히 전 국민 기본소득이 전체의 상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본소득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운 그런 시대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주체형성 전략의 측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다. 실업급여의 기간연장이나 실업부조라는 요구로 어떤 주체형성이 가능할까. 어렵게 조직하더라도 정부의 시혜적 정책에 목숨 걸게 되는, 그리하여 심사관들의 심사에 울고 웃어야 하는 그런 수동적 주체들을 양산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까. 현재 한국의 실업운동이 꽤 시일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수동적 대상화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 반증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얘기를 하자니 마치 ‘누워 침 뱉는’ 느낌이 든다. 필자가 실업운동단체에서 몇 년간 일하면서 이런 경향을 만든 주요 책임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고백컨대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끼고, 속았다고 깨달았을 땐 이미 상당히 구조화된 상태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조직적 관성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민주노총의 혁신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도 이미 형성된 조직적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보수와 진보가 공유하고 있는 근대성의 주술로부터 깨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현실에서 대중투쟁의 파열음을 심장으로 느끼고 같이하는 것이다.

이념이나 정책적 차원의 판단이 아니라 대중의 실제 상황을 놓고 생각해 보면 정책담당자들이 ‘합리적이고 온건한’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느끼는 편안함이란 얼마나 한가한 것인가. 참으로 대중들의 실생활이 그렇게 먹고살 만한 것인가. 사실은 절망적인 삶의 조건에 시달리고 있는데 우리는 선진국의 초입에 있다는 환상, 그리고 언론에서 만들어 내는 가상의 현실, 정부가 만들어 내는 각종 통계지표, 그리고 보수와 개혁·진보를 망라한 담론적 느슨함 속에서 마비된 것은 아닌가. 결국, 이념들이 대중들의 절박한 외침을 올바로 호명하지 못하면서 높은 자살률로 혹은 낮은 출산율로, 그리고 파악되지 않는 각종 사회범죄로 이어진다. 그 고통은 은폐된 형태로 개인과 가족, 이름 모를 불특정 다수에게로 전가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수언론이 선동하고 개혁·진보진영조차도 엉거주춤 동조하는 ‘현실성’ ‘합리성’의 함정에 빠져 대중들의 울분에 찬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꿔라!
이쯤에서 애초의 문제의식-근대주의를 넘어선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그것은 말로 되는 일이 아니며 선전물에 과격한 문구로 도배한다고 사람들의 의식이 급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어도, 뉴턴적 세계관이 아인슈타인의 물리적 발견으로 붕괴돼도, 그것이 현실 인간의 사고방식과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데 200년 이상 장구한 시간이 걸렸다. 다시 말해 근대주의자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마이동풍이라는 사실 앞에서 미리 지칠 필요는 없다. 늘 저지르는 실수이지만 위대한 진리를 공포함으로써 사람들의 인식체계를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관점이야말로 관념론에 불과하다.

예컨대 노동운동에서 조합원 교육이 중요하다고 외치며 인식변화의 기제가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놓치는 것과 비슷한 오류다. 인식의 변화는 곧 환경의 변화와 연동됐다는 원리는 다시 말해 건강한 몸을 갖고 싶다면 먹는 음식을 잘 골라 먹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식을 바꾸기 위한 우리의 실천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 홍보활동을 한다고 했을 때 보통 홍보전단지를 억지로 나눠 준다. 뿌리치는 손길에 마음 상해 하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성가신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홍보전단지를 나눠 줘 인식을 바꾸겠다는 발상은 인지과학적 측면에서 볼 때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결국 환경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홍보전단지-홍보의 목적-의 내용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떡과 함께 홍보물을 돌린다든지 음악을 들려주며 여러 가지 이벤트와 결합하며 홍보하는 것이 시도됐다.

다른 차원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현재 노동기본권이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다. ‘제도적 학살’이라고 불릴 만큼 국회를 통과한 노조법(복수노조, 근로시간면제제-타임오프-)이 노조의 자주적 활동을 제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주로 정부의 노동에 대한 인식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즉 대통령이 반노동적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탄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인식전환을 촉구하는 것이 통상적 결론이다. 좀 더 구조적으로 보면 정부의 정책기조 상 필연적 결과다. 예를 들어 4대강 사업을 하면서 투입되는 막대한 자금은 공기업의 부채로 충당된다. 이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요금 인상과 노동자들의 복지를 후퇴시킬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국 노동기본권을 지키는 것은 대통령의 인식을 전환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이다. 4대강 사업을 저지시키고 경제발전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문제는 결코 장기적 과제가 아니다. 노조 사수를 위한 즉각적 사업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이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은 미래의 사회상을 제시하는 꿈같은 얘기가 아니라 바로 노동기본권을 사수하는 가장 효율적인 의제인 셈이다.
이것은 의식 전환을 위한 설교가 아니라 조건의 배치를 달리하자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적절한 의제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노동과 복지의 행복한 만남을 위해
기본소득의 가장 큰 장애물은 인식의 문제며 근대주의적 한계에 놓여 있는 시대적 상황의 문제다. 우리 사회의 곳곳, 인식구조의 구석에 스며 있는 관념을 걷어내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함께 진행돼야 한다. 노동시간단축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 생태환경운동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내 확대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문운동 자체는 추진력의 한계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한 차원 더 밀고 갈 수 있는 제도적 연결고리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보적 운동, 노동운동에서 새로운 시도를 벌여야 한다. 그것은 ‘더 급진적인 것, 더 정치적인 것!’ 이다. 물론 관념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대중의 외침과 공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의 몸을 속박하는 근대적 담론의 주술에서 깨어나 대중의 외마디 외침을 새로운 요구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명박 정권의 삽질을 진보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의 정책들이 그야말로 진보진영의 성장에 엄청난 새로운 활로를 열어 주고 있다. 보수세력의 정체가 드러나고 우리의 홍보물에는 풍부한 사례를 제공해 주고 있다. 바로 그 엄청난 부조리를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안경, 혹은  든든한 디딤돌 중 하나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마치며
비판적 지지라는 익숙한 함정을 벗어나, 민주와 독재라는 구도의 한계를 넘어, 성장과 분배라는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오래된 숙제다. 거대담론이 문제가 아니라 생활정치가 없고 풀뿌리운동이 없는 것이 운동의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생활과 지역이 없고 현장운동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념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나는 실용주의자요, 나는 현장론자요, 나는 실사구시파요, 나는 대중중심노선이요 하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바로 그 속에 온갖 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의 개똥철학이 녹아 있다. 80년대 말 사회주의의 붕괴 속에 우리 스스로가 해체해버린 그 낡은 깃발의 빈자리에 들어선 것은 그런 속류화한 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의 짬뽕들이었다.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현실 그 자체로 선명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짬뽕화된 의식의 부유물을 걷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새로이 등장할 깃발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 전일적 체계를 갖춘 거대담론을 제시할 수는 없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근대주의의 해체이며, 해체를 통해 드러날 어떤 것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다. 

그것은 첫째, “최소비용으로 최대결과를” 추구하는 공리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생산성’-이것은 비용과 결과의 비율이란 점에서 그 자체로 공리주의적 관념이 내장돼 있다-을 기준으로 삼는 것을 폐기해야 한다.

둘째, 생명의 지속, 생활의 지속이다. 우리는 왜 생산을 하는지 근본적으로 다시 물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 교환관계 속에서 가려지고 보이지 않는 ‘서로 기대어 생산하는’ 노동에 정당한 위상을 새롭게 부여해야 한다. 그것이 기본소득이다.

셋째, 이런 담론의 운동적 의미는 근대주의적 한계와 탈근대의 방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디딤돌이며 작은 불씨이다.
여기서 작은 불씨라는 은유적 표현은 그것이 광야를 불태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세상을 바꾸기는 너무 힘들고, 대중들은 자본주의의 포로가 돼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진정 대중과 공명할 작은 그 무언가라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진보의 한계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기본소득은 그야말로 작은 불씨이지만 광야를 불태울 충분한 힘이 있다.

한 가지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내가 말한 개혁·진보진영에 대한 비판이 전체를 매도하는 것으로 비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오늘도 변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많은 운동가들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다. 나는 단지 좀 더 자신감을 갖자고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 헌신적인 삶과 희생들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고 반드시 꿈은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의제화하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얼마 전 교수노조도 채택했지만 모든 사회운동단체에서 강령적 요구로 기본소득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면 사회의 변화는 훨씬 더 빨라질 것이다. 우리가 혁명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개혁을 확실히 담보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이 당당히 외칠 권리가 있는 천부적 권리다. 최근 한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에 구호 하나만 덧붙이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국가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뭐 있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기본소득 보장하라!
 
23) 현대사회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만큼 새로운 재정의가 필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알랭드 보통이 일의 기쁨과 슬픔이란 책에서 재기롭게 서술한 것처럼 노동의 찬가는 르네상스시대가 돼서야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다. 처음에는 예술적 활동 그것도 가장 찬양받는 예들에 한정됐지만 시간이 가면서 거의 모든 작업을 끌어안게 됐다. 그 이전에는 생계를 위한 노동과 그와 다른 일들 즉 음악이나 철학등과 같은 것이 분리돼 있었고 육체노동은 정신을 병들게 한다고 봤다. 시민은 노동하지 않고 소득을 얻어 여가를 즐기는 생활을 할 때만 진정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노예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를 기반으로 노동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면, 근대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그 노동을 모든 작업영역으로 끌고들어와 비참하고 소외된 노동 그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파멸적인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가와 동일시했던 만족은 자본주의하에서 일의 영역으로 옮겨갔고, 이제 아무런 경제적 보답이 없는 일들은 모든 의미가 빠져 나간 껍데기가 돼 버렸다. 주위사람을 돕는 노동, 가사노동, 자기가 좋아서 하는 컴퓨터 작업 등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해야만 하고 자기충족이나 즐거움을 위해 해야 하는 모든 노동들이 그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 낭비로 간주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자기충족을 위한 여러 활동은 불가피한 내적 욕망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사회에서 양자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노동을 상품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붕가붕가레코드사에서 시도했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 그런 것이다. 생계와 자신의 취미를 조화시키는 것. 그것은 프로와 아마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존재하는 인디밴드의 숙명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어쩌면 선택받는 초엘리트들의 드문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장기하와 얼굴들’ 현상은 결코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이며 대다수 장삼이사의 인간들은 자본의 기준에서 볼 때 ‘가치 없는’ 노동을 오늘도 수행할 수밖에 없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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