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근무하면서도 노동기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이방인' 취급

지난 4월부터 경기도 안양의 한 봉제공장에 다니는 김인태씨(32세)는 최근 시민 학생들의 고온리 미군사격장 폐쇄 요구 시위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매향리 주민들과 사례는 달라도, 그 역시 한미행정협정(SOFA)의 또 다른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일년 전만해도 민주노총 서울지역사무전문직서비스노조(위원장 이진희) 소속 두라코퍼레이션지부의 지부장이라 불렸다. 두라코퍼레이션은 용산 미8군 안에 있는 건축물의 유지·보수 및 닥트 청소를 맡은 용역업체.

이런 김씨가 졸지에 '해고' 통지서를 받게 된 것은 회사의 정리해고 방침에 반발, 부분파업을 주도하고 미군기지 안에서 집회를 연 것이 빌미가 됐다. 이 사건으로 조합원 10명이 미군헌병대에 연행돼 밤샘 조사를 받고 미군기지 출입증까지 압수 당했다. 회사 사장은 한미행정협정과 연방획득규칙에 따라 작성한 계약서대로 쟁의행위를 신고할 수밖에 없었고, 출입증을 압수당한 사람들과 고용관계를 더 유지시키기 힘들다며, 김씨와 노조 사무장을 즉각 해고한 것이다.

김씨는 "한국노동자인 만큼 노동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반발했지만, 회사는 막무가내였다. 김씨가 해고된 뒤 두라코퍼레이션노조 역시 와해되고 말았다.

* "미군부대 안에서 벌어진 쟁의는 한국기관이 관할권을 갖지 못한다"

8개월여의 실직을 끝내고 어렵게 새 직장을 얻은 그는 헌병대에 끌려가고 출입증을 압수 당하던 당시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문제의 원인인 한미행정협정은 반드시 개정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씨는 그 뒤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내, 현재 중앙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사실 김씨 처럼 미군기지에서 일하다 한미행정협정이란 벽에 막혀 억울한 피해를 본 사례는 한 두 건이 아니다.

지난 95년에는 경기도 송탄의 미군부대에서 직영하던 하사관 식당 '챌린저 클럽'을 개인 업자에게 임대하는 과정에서 클럽 종업원 57명 가운데 윤모(57세)씨 등 33명이 호봉과 경력이 높다는 이유로 무더기로 해고당한 사건도 있었다.

이보다 앞서 지난 90년 월차, 시간외 등 수당 지급을 요구한 소송에서 승리했음에도 한미행정협정을 근거로 "주한미군 안에서 벌어진 어떠한 쟁의도 한국기관이 관할권을 갖지 못한다"며 법원 판결 자체를 거부한 미국기업 엠코의 사례는 당시 법조계 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들의 거센 비난을 사기도 했다.

최근엔 부산 동구 미군기지 안에서 부대출입과 관련된 일을 하던 김모(32세. 여)씨가 성희롱까지 당한 뒤 해고된 사건이 터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김씨는 94년부터 미군 상관들에게 계속적으로 성희롱을 당한 것을 상부에 폭로, 성희롱 가해자인 상관중 한명이 해고되자, 미군측이 '동료를 해고당하게 만든 여성'이라며 부당한 대우를 계속하다 결국 지난 2월 근무태만이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해고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씨는 "미군들은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음란물을 같이 보자고 해 한국인으로서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현재 한국의 법정이 아닌 미군의 소청위원회에서 조사중이다.

지난 23일에는 연합통신을 통해 부산 미하얄리아 부대 구내식당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가 억울하게 산재처리를 받지 못한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다.

김기태(56세)씨는 지난 2월3일 미군쪽의 인력감축과 설연휴였던 관계로 사람이 적게 나와 4명이 들어야 하는 무게 100㎏ 가량의 식탁과 의자를 2명이 들다 팔꿈치 인대가 늘어나고 염증이 생기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미국인 식당장은 '그전부터 아팠던 것'이라고 주장하며 산재 인정을 거부했다. 김씨는 80만원 가량의 치료비와 일을 하지 못했던 3개월치 월급 4백50만원도 받을 수 없게 됐다. 김씨는 법률구조공단과 근로복지공단을 찾아갔으나, '미군부대 안에서 발생한 일은 손댈 수 없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이렇듯 알려진 사례들 외에도 한미행정협정을 근거로 미군기지 안에서 발생한 노동기본권 제약 사례는 훨씬 많지만 공개되지 않을 뿐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이소희 간사는 "미군기지 특성상 폐쇄적이고, 문제가 바깥에 알려지면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피해 노동자가 해결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노무관련 피해사례가 많이 접수되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간사는 또 "미군기지내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이 좋을 것이라는 일반인에 편견 속에서 미군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고, 한국정부로부터는 한국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다는 3중의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기지 수는 100여개에 이르며, 여기엔 경비, 클럽, 냉동관리, 청소 등의 업종에 1만8천여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 중 하청업체 직원 3천명을 제외한 1만5천여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한국노총 소속인 전국주한미군노조(위원장 강인식)에 가입돼 있다. 주한미군노조는 단협과 관련된 교섭은 수시로 개최하며, 임금협상은 1년에 한번 개최한다. 그러나 단체협약 자체가 "한미행협, 한미행협 보완협약, 합의각서, 개정협정, 또는 공식회의록, 그리고 상부기관이 제정한 현행법령과 그리고 이후 한미현행법이나 상부기관에 의하여 발행되는 규정 등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주한미군노조의 운신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연맹의 김규호 위원장은 "한국법에서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미군기지내 한국인 노동자들이 미군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밝히고 "주한미군노조의 임금협상이 끝나는대로 소파(SOFA)의 노무관련 조항 개정 투쟁을 연맹 차원에서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전국주한미군노조 위원장을 역임했었다. 다른 외기노련의 관계자는 "소파(SOFA)는 미국법도 한국법도 아닌 모든 불리한 조항들을 다 모아놓고 변경할 여지조차 없다는 것이 문제"라며 "정부가 협상할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이런 주한미군 기지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부당 대우 문제와 관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장주영 변호사는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해선 한미행정협정의 대부분 노무관련 조항을 개정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장변호사는 "우선적으로 주한미군의 한국인 노동자 간접 고용제가 도입돼야 하며, 한미행정협정의 노무조항 가운데 초청계약자를 고용주의 범위에서 제외해야 한다. 또한 노동쟁위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는 합동위원회에 노동자대표의 참여가 반드시 보장돼도록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접고용제란 한국 정부 또는 그 대리인과 노동자가 노사관계의 당사자가 되어 한국의 노동관계법의 적용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한 한미행정협정에 명시된 미군 당국뿐 아니라 미군과 계약을 맺은 외부 업자(초청계약자)에 대한 노무관리상 특혜를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미행정협정(SOFA)의 노무조항은 67년 체결이래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정부는 곧 한미행정협정의 개정 협상을 재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검역권 확보, 환경조항 신설 등을 제기할 방침인 반면, 미군쪽은 형사상 범인의 신병인도 시점을 앞당기는 정도로 마무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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