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산은 서로 기대 이뤄진다

형태발생장 이론에서 좀 더 나아간 것이 형태공명이론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멕더갈 교수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어떤 종의 한 개체가 경험한 행동이나 형질이 형태장을 통해 같은 종류의 다른 개체에 작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는 쥐를 상대로 한 실험을 했는데 일종의 미로찾기 시행착오 실험이다. 우선 쥐에게 물에 잠긴 미로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을 가르쳤다. 길을 잘못들 때마다 전기쇼크를 줬다. 처음 그 실험에 임한 쥐는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미로에서 빠져 나왔다. 다음 세대의 쥐에게 실험을 하면 더 빨리 미로에서 빠져 나왔다. 습득속도가 더딘 놈들만 교미를 해 실험을 해도 습득속도는 더 빨랐다. 그리고 22번째 세대에 와서 처음보다 습득속도가 무려 10배가 빨라졌다. 그러나 그의 실험의 진정한 의미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실험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장소에서 그러니까 습득능력을 획득한 쥐와는 유전자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쥐들에게 실험을 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쥐들은 10배 빨라진 속도로부터 시작을 했다. 쥐라는 종족의 어느 개체가 획득한 능력이나 형질이 그 종족 전체에 퍼진 것이다. 그는 이런 현상을 형태공명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다양한 예를 들 수 있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자전거를 빨리 배우고 타는 현상들은 단순히 우연일까.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기록은 2시간20분대였지만 현재 세계기록은 2시간3분59초다.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넘는 기록이 가능해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멕더갈은 일련의 실험에서 결국 DNA는 재현의 차이일 뿐 생물체가 가진 모든 특질을 만들거나 간직하고 있는 궁극적 원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원인은 더 먼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다고 결론지었다.

심리학자 융은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기제로 집단무의식 개념을 제시했다. 각 개인이 살아오면서 실제적으로 겪은 일과는 상관없이 같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무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의 형태발생장 개념5)이 인간정신의 분석으로 적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집단무의식은 인간사회를 분석할 때도 매우 유용한 틀이다. 예컨대 한국전쟁 후의 집단적 레드 콤플렉스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물리학과 생물학의 발견을 인간이 사는 사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인간도 하나의 물질이며 생물인 이상 이 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있을까. 아니 인간행동의 근원에 하나의 강력한 힘으로써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서로 관계가 없는 독립적 존재이며 노동하는 사람만 세상의 부를 창조한다는 인식 자체가 얼마나 비과학적이며 허술한 사유인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회의 모든 결과물들이 바로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수사적 명제가 아니라 일종의 물리적 자연법칙과 같은 것이다. 이른바 네그리가 말한 비물질노동6), 혹은 그림자노동 같은 개념들은 이런 물리학적 법칙과 조응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결론이 주는 실천적 함의는 인간사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기본소득만이 아니라 노동시간의 문제, 사회적 제관계의 새로운 배치의 문제가 전체적으로 재구성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개인이 따로 따로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실존으로서의 개체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나아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결합되면서 어떻게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변화하게 됐을까. 최근 문화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브는 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와의 인터뷰에서 “자본주의야말로 공산주의에 기생하는 체제”라고 분석한 바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원시공동체사회에서 인간은 하나의 유적존재이자 공동체적 존재였다. 여기서 개인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자본주의적 발달이 진행되면서 공동체는 해체되고 공장의 부속품으로 인간존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공동체의 해체와 개별적 인간의 존재는 자본주의적 축적체제의 기본 요소였다.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봉사하는 각종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인간을 파편화시키는 데 막강한 정신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부는 어떻게 창조되는가
 
보수는 노골적으로 탄압하고 개혁은 점잖게 짓밟는다

기본소득이 부딪치는 일차적 장애물은 바로 ‘무노동 무임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하지 않는 자에게 돈을 줘야 한다는 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소리쳐 봐도, 아무리 과학적으로 얘기해도 현실적 울림을 갖고 의미 있는 반향이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푸코나 랑시에르가 분석한 바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으로 셈해지지 않는 것은 지급할 의무가 없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점잖게 비웃기’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나는 ‘점잖게 비웃기’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이 비단 우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진보적·개혁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인식론에 빠져 있다고 판단한다.

내가 알기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많은 개혁적 정책담당자들의 일반적 인식은 점잖게 비웃기 수준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개혁적 정책전문가들이 직접 정부에 참여하면서 사회복지제도를 설계했다. 그 결과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고용보험제도가 만들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시기에 파격적으로 시도된 정책은 진행 과정에서 용두사미로 변화됐다. 실질적으로 그 설계에서 빠지게 된 사각지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였다. IMF 후 형성된 비정규직·실업자와 빈곤층의 존재는 통계에 잡히지도 않고 공표하지도 않음으로써 실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다. 이 존재의 신음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 것으로 된 것이다. 보수는 이 소리를 묵살하고 진보는 어떻게 대변해야 할지 헤매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기껏해야 고용보험을 확대하고, 기초생활보장법을 강화하자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힘이 실리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일정한 발언권이 있는 집단들의 목소리조차 여기서 머무는 것은 의식의 제한성 때문이다. 사회의 부는 노동을 통해 이뤄진다는 오래된 명제의 영향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담스미스로부터 헤겔좌파를 거쳐 마르크스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공리다. 진보개혁진영의 의식 역시 이런 인식의 틀 안에 있기 때문에 실업·빈곤층에 대한 접근방식은 배려와 동정의 대상으로 시작한다. 기본소득은 원칙적으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이것은 실업자도 사회적 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즉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도 부의 창조자라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사회복지이념(workfare, 워크페어)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보수와 진보개혁의 공모가 이뤄진 부분은 바로 이 워크페어를 통해서다. 물론 진보개혁진영은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주류였던 시장경제론자로부터 양보를 얻어 내기 위해 그런 담론이 필요했었다고. 그러나 이런 주장의 밑바닥 의식구조에 노동가치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아마도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쉽게 말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노동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도 설계가 된 것이다. 결국 진보개혁진영이 관료들과 현실적으로 타협하며 제시한 것이 현재의 사회복지시스템이다.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 존재가 가치를 창출한다!

최근 일반인들이 무심코 흘려들었을 중요한 연구결과 하나가 언론에 나왔다. 신생아 한 명이 갖는 경제적 효과에 관한 연구7)다. 사실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 자체가 거부감을 주지만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있을 법한 연구다. 숭실대 김현숙 교수와 명지대 우석진 교수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신생아 한 명당 대략 12억원의 생산유발 효과와 1.15명의 고용효과가 있다. 의료비용 등을 최소화해 보수적으로 잡아도 그렇다고 한다면 다른 요인을 적극적으로 계산하면 더 많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연구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신생아 1명 출산시 우리 사회는 12억원 이상의 이익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하고, 출산장려금도 좀 더 과감히 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단순화하면 모든 부모들은 아이 한 명당 최고 12억원을 사회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권리를 인정해 매월 20만원 정도의 금액과 그 외 지원8)을 하는 선진국들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지역별로 다르지만 기껏해야 수십 만원 정도의 장려금으로 생색내는 것에 그친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내는 가치는 우리사회의 지배계급(자본)이 전유하게 된다.

그런데 연구결과에 대한 각 집단의 반응은 어떠할까. 설문조사를 해 보지는 않았지만 예상컨대 보수라면 무시하거나 혹은 육아의 기쁨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하느냐라는 위선을 떨 것이다. 진보개혁진영은? 출산수당을 좀 더 올리자고 하겠지만 더 과감하게 주장하는 데 머뭇거릴 것이다. 왜? 존재에 대가를 요구한다는 발상에 익숙치 않고, 그 근거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보수와 개혁의 공모가 이뤄져 세계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출산정책이 나오는 것이다. 대중은? 낳아서 키울 조건이 안 되니 알아서 피임을 하는 것으로 사회에 복수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출산파업이다.

네티즌들의 대가 없는 블로그 활동이 정보통신산업을 살찌우고, 환자의 경우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생명력 자체가 의료산업의 토대를 이룬다. 이제는 존재 그 자체에 정당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아닐까.<계속 이어짐>
 
[각주]

5) 형태발생장 이론에 의하면 세상에서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라는 개인은 인간 전체에, 우주 전체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가 된다. 생물학자인 셀드레이크는 세상의 혼 같은 것을 부정하는 데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런 개념은 동양에서는 ‘기’ 사상과 상통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주의 기가 모여진 것이 생명체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상은 동양철학의 기본을 이룬다. 일찍이 주역사상으로 체계화된 바가 있지만 사주팔자라는 것 역시 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우주의 기가 집중되면서 그 인간의 성격이나 운명을 규정한다는 이론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이 곧 우주 전체다’라고 하는 부처 말씀도 시간과 공간의 끝없음을 생각할 때 신비적 직관의 영역에서만 통하는 레토릭이 아니라 실제 사유의 긴장을 극도로 밀고 갈 때 깨우치는 사고의 결정체 아닐까. 물론 여기서 관념론적 입장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제동을 걸 필요는 있다. 자칫하면 물질과 에너지를 동일시(*)해서 불가지론의 함정에 빠질 위험은 피해야 한다. -필자 주
*물질은 모든 변화의 토대다. 물질 없이 에너지가 있을 수 없듯이 물질로부터 분리된 운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의 에너지로의 전환을 주장한 사람들은 에너지론자-빌헬름 오스트발트 등- 이었다. 그들은 질량을 물질, 나아가 에너지와 동일시했으며 마침내 물질과 에너지는 동일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것은 아직도 주장되고 있는 이론인데 그들은 E=mc²(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가속도)이라는 공식에 기초해 물질과 에너지가 같은 것임을 추론했다. 그들은 상호작용하는 입자와 반입자가 광자로 전화하는 것을 물질의 파괴로 그리고 순수에너지의 전화로 간주했다. 그러나 실제로 광자 또는 전자장의 양자는 운동하고 있는 물질의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여전히 존재한다.

6) 비물질적 노동은 마르크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마르크스 당시의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비물질적 노동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막연한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그리고 현실의 역동적 운동들에 주목하고 그것과 조응 및 교류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에게 어쩌면 미래의 우리들의 삶까지 예견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마르크스의 사유 자체가 그렇게까지 확장되기에는 140여년 전의 삶과 오늘날의 삶은 너무나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설명에서는 오늘날의 노동형태인 비물질적 노동의 몇 가지 특징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이후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전유된 일반지성(혹은 대중지성)의 상을 그려보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하겠다.
   “요리사 등 용역들의 많은 부분이 상품의 소비비용에 속한다.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차이는 단지 노동이 화폐로서의 화폐, 혹은 자본으로서의 화폐와 교환되는지 였다. 예를 들어 내가 자영노동자·예술가 등에게서 그들의 상품을 구매할 경우에는 화폐와 일종의 노동 사이에 아무런 직접적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화폐와 상품 사이에 직접 교환이 이루어지므로 이 범주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비물질적 생산에서는 그것이 순전히 교환을 위해서만 영위되고, 상품을 생산한다 할지라도 다음의 두 가지가 가능하다. ⑴ 실행하는 예술가의 예술행위라는 상이한 책, 그림, 예술 생산물처럼, 생산자와는 분리돼서 존재하는, 그러므로 생산과 소비의 중간에 상품으로서 유통될 수 있는 상품으로 위 생산이 결과된다.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매우 제한된 범위로만 적용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조각가 등으로서 도제를 거느리지 않는 한, 대부분(자립적이 아니라면) 상인자본, 예를 들어 서점상을 위해 노동한다. 이는 단순히 형식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형태만을 이루는 관계이다. 이 이행형태들에서 바로 노동의 착취가 가장 심하다는 것은 사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⑵ 생산물이 생산하는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여기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지며, 사태의 본질상 몇몇 영역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의사를 원하지 그의 급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강습소에서 선생은 학습공장의 기업가를 위한 단순한 임노동자일 수 있다. 그러한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전체에 대해서는 고려될 수 없다.”
   마르크스의 ‘비물질적 생산’ 개념은 현대의 노동형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아래에서 랏짜라또의 「비물질적 노동」을 참고해 그것이 대중지성의 창출과 맺는 상관성을 추적해 보겠다.
  ★ 마우리찌오 랏짜라또, 「비물질적노동」
   비물질적노동은 상품의 정보적·문화적 내용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① 그것은 2차 산업 및 3차 산업의 노동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나타낸다. 숙련 기술은 점차 사이버네틱스와 컴퓨터통제(및 수평적-수직적 커뮤니케이션)를 포함한다. ② 그것은 이전에는 노동으로 인식되지 않던 활동들, 즉 문화적·예술적 표준·유행·취미·소비규범·공론 등을 정의하고 고정시키는 일련의 활동을 포함한다.
   - 이제 노동의 질과 양은 비물질성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비가역적이다. 노동자는 다양한 생산 속에서, 단순히 명령에 종속되기보다 ‘능동적 주체’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그에 따라 자본은 주체성 자체에 대한 명령을 확립하고, 주체화 과정을 창출 및 통제하는 기술로 참여적 경영을 도입했다. 주체성을 상품제작 안에 가두기가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경영-소통-창조’의 영역에서 주체의 능력을 ‘생산을 위한 생산’의 조건과 양립시켰다. ‘주체가 되라’는 슬로건은 협력과 위계, 자율성과 명령 간의 적대를 더 높은 수준에서 다시금 제기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개별 노동자의 개성을 동원하면서도 그것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통의 주체가 되라’는 경영자의 명령은 이전의 정신/육체노동의 분리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일 수 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개성과 주체성까지도 가치 생산에 포함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관리자 없이도 그/녀 자신의 통제와 동기 부여에 책임을 져야 한다. 고용주는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이중의 문제로 애를 태운다. 그들은 노동의 자율성과 자유를 승인하면서도, 노동조직의 새로운 질이 수반하는 권력은 ‘재분배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의 경영진은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고려하지만 오직 그 주체성의 생산적 요구와 합치하도록 코드화해야 하는 것이다. -네그리 「비물질노동과 주체성」 재인용

7) 숭실대 김현숙 교수와 명지대 우석진 교수팀이 출산이 일자리 창출과 생산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결과, 신생아 1명이 평생 12억2000만원의 생산유발 효과를 내고 1.15명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한 사람의 생애를 출생ㆍ영유아기, 학령기, 노동시장기, 은퇴기로 나눠 주기별 소비활동을 분류하고 이에 따른 관련 산업의 생산 및 고용효과를 산출했다. 출생ㆍ영유아기에는 의료서비스, 분유ㆍ이유식, 유아용품, 보육서비스와 관련 산업에서 4400만원의 생산과 0.168명의 고용이 창출됐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학령기에는 공ㆍ사교육, 학용품, 서적 등과 관련 산업에서 2억2900만원의 생산과 0.717명의 고용효과가 나왔다. 노동시기에는 결혼 및 일상적인 소비생활로 모두 3억9300만원의 생산과 0.067명의 고용효과가 발생하며, 은퇴기에는 의료 및 요양, 여가, 한방 등 소비로 2억1700만원의 생산과 0.13명의 고용이 창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기를 특정하기 어려운 자동차·주택·금융 등과 관련한 소비에서도 3억4400만원의 생산을 유발하고 0.065명의 고용효과를 내는 것으로 분석됐다. 출생에서 학령기까지의 소비를 통한 고용효과는 0.885명으로 본인이 노동시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거의 1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 고용창출분 1.15명 가운데 본인의 근로로 인해 산출된 0.61명을 제외한 순고용 창출효과는 0.53명이었다. 국민 1명이 본인을 빼고도 0.53명의 일자리를 추가로 만들어 냄에 따라 2명의 출산이 1명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8) 서구 선진국들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아동복지 수준은 걸음마 단계다. 비교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선진국에서 이미 보편적으로 시행 중인 ‘아동수당’ 제도다. 아동수당이란 국가마다 약간이 편차는 있으나 적어도 12세 미만의 아동을 둔 모든 가정에 매월 10만~20만원 수준의 정액 지원금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는 이미 유럽 44개국 중 거의 모든 나라가 시행하고 있을 정도로 선진국에선 보편적인 제도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에 보편적 복지와 사회적 시민권을 포함하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부실한 탓이다.
아동수당이 현금으로 제공되는 복지제도라면 빈곤아동을 타깃으로 한 현물지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영국의 사례를 보자. 영국에서는 1997년부터 빈곤아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슈어 스타트(Sure Start)’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슈어 스타트(Sure Start)란 빈곤아동 가구를 돕기 위한 전 지역사회 차원의 종합적 부모 지원 프로그램을 말한다. 이 프로그램은 각 지역의 아동센터가 중심이 되고, 도서관·주민센터·병원·학교 등이 이에 협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슈어 스타트 타운으로 지정된 지역의 아동센터에는 5세까지의 빈곤층 자녀가 무료로 다닐 수 있는 탁아소·유치원이 설치된다. 이곳에선 그 부모들에게 직업알선과 직업훈련, 육아법 교육 등의 프로그램도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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