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10월 국회에 한 통의 입법청원서가 접수됐다. 고용형태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근로기준법에 명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때만 해도 비정규직법이 훗날 한국사회에 무수한 논쟁과 갈등을, 눈물과 처절한 투쟁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입법청원을 접수한 곳은 26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비정규 노동자 기본권 보장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였다. 그 핵심에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있었다.
 
‘비정규직’ 용어조차 낯설던 그때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비정규직 규모는 외환위기 직후인 99년 전체 노동자의 51.7%를 차지하며 이미 절반을 넘어섰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한국사회의 어젠다로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비정규직이라는 용어나 개념조차 낯설던 2000년 5월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공식 출범했다. 당시 정규직 중심이던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어느 곳도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았지만, 비정규직은 ‘우리를 살게 해 달라’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못살겠다 50만원! 먹고살자 70만원!”
2000년 6월 이랜드 부곡물류센터에서 3명의 계약직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정규직 조합원들이 동참하면서 장장 265일을 싸웠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동조합 인정하라!”

2000년 4월 파업에 돌입한 레미콘 노동자들이 그해 연말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노숙농성을 벌였다. 2천여명의 경찰이 휘두르는 해머와 도끼에 공포를 느꼈지만, 참고 투쟁했다. 그러나 구속자만 여럿 나왔을 뿐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형님! 우리 같이 삽시다.”

2001년 노동절 전남 광주 캐리어 에어콘공장에서 쇠파이프로 무장한 구사대와 정규직 조합원들이 점거농성 중이던 8명의 하청노동자를 공장 밖으로 끌어냈다. 하청노동자들은 피범벅이 된 채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불과 석 달 전만 하더라도 하청노조 가입서를 같이 돌렸던 정규직노조는 자신들의 동료를 끝내 외면했다.
 

이런 가운데 99년부터 임시사무소를 마련하고 활동에 들어간 센터는 비정규직 목소리를 한국사회에 전달하고 담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인 박승흡(48) 초대 소장(전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이 대입학원 논술강사로 번 재산을 출연했고, 조진원(50) 사무국장(현 보건복지자원연구원 부원장)과 박영삼(41) 정책국장(현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 이정희(39) 워킹보이스 취재편집팀장(현 매일노동뉴스 기자, 휴직) 등이 참여했다.
 
당시 이렇다 할 인터넷 매체가 없는 상황에서 센터는 비정규직의 처절한 현실과 투쟁을 생생하게 취재해 알렸다. 비정규직에 대한 실태파악은 물론 개념 정의조차 이뤄진 적이 없었던 그때, 비정규직 규모와 노동조건을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담은 정책과제를 내놓았다. 센터는 2002년 부설기관으로 민주노무법인을 설립해 비정규직 상담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법적 쟁점을 쏟아 냈다.

2004년 김성희 소장이 취임할 즈음, 노동부가 만든 비정규직법이 공개되면서 비정규 노동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비정규직법은 2년간 무수한 논란 끝에 2006년 국회를 통과했지만, 지난해 여야 간 재개정 논쟁에서 나타나듯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뒤흔드는 메가톤급 이슈다. 노사정 간의 첨예한 입장대립뿐만 아니라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진영에서도 비정규직법 처리를 둘러싸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였다.

비정규직법 논쟁 과정에서 센터의 입장은 확고했다. 기간제한이나 차별시정 조치가 실익이 없고,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에 대한 규제가 빠져 있어 ‘비정규직 확산법’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일각에서 ‘근본주의’라거나 ‘원칙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비정규직법은 국회를 통과했고, 2007년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센터의 우려는 틀리지 않았다. 센터가 올 3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 규모는 10년 만에 50% 이하로 줄었다. 반면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비율은 46.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파견근로와 시간제가 대폭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고, 공공부문 비정규직도 증가세로 반전됐다. 외형만 놓고 보면 비정규직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고용의 질이 전반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공공부문까지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것은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비정규 노동운동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산별노조 전환이 대세를 이루면서 비정규직 조직들은 흩어졌다. 2006년 3.2%였던 비정규직노조 조직률은 2008년 2.8%로 떨어졌다. 전국비정규노조대표자연대회의 같은 비정규직노조 네트워크도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는 지금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센터는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다음달 1일 서울 용산구 철도웨딩홀에서 열리는 10주년 기념식과 토론회 준비에 한창이다. 이번 10주년 기념식의 의미는 각별하다. 센터는 지난 10년의 활동을 결산하면서 소폭의 구조개편을 단행했다. 지난해 말 부설 연구기관이던 산업정책연구소가 분리되면서 센터는 앞으로 오롯이 비정규직 분야 정책생산에만 집중하게 된다. 연구사업이 다소 축소되는 대신 회원구조는 대폭 강화할 예정이다.

특히 김성희 소장이 떠나고 이남신 부소장이 다음달부터 소장직을 맡는다. 사실상 3기 체제로 접어드는 센터의 각오는 남다르다. 이남신 부소장은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비정규 노동운동도 분산·쇠퇴의 길을 걸었다”며 “센터가 지금까지 비정규직 사회여론화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면, 앞으로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터미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다수의 비정규 노동자들은 센터가 대변하고 있는 정책적 요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센터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연구프로젝트 사업에 치중하다 보니 전문적이고 현학적인 의제로 접근했던 측면이 있었다. 이 부소장은 “비정규직에게 센터의 문턱을 낮춰 비정규 노동자들이 언제든지 오고갈 수 있도록 하겠다”며 “앞으로의 비정규 노동운동은 비정규 노동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당사자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집권 당시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비정규직법 논쟁의 한가운데 김성희(47∙사진)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이 있었다. 정부가‘비정규직 보호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일각에서‘없는 것보다 낫다’고 했을 때 김 소장은“비정규직 확산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랬던 그가 이달을 끝으로 센터를 떠난다.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구 센터 사무실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난 김 소장은“나의 역할은 비정규직 법∙제도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출하는 것까지였다”며“비정규직법 논쟁 과정에서 센터가 제대로 중심을 잡았다고 지금이라도 인정해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평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통계상 비정규직 규모는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 곪아 가고 있는 문제들이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 라는 게 김 소장의 분석이다.
“최근 보건의료노조와 간접고용 비정규직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보건의료 종사자의 13.8%가 간접고용인 것으로 파악됐어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는 0.1%도 안 나오는데 말이죠.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직접고용 비중은 12%에서 10% 이하로 줄어든 반면에 간접고용 확산 흐름은 거세지고 있어요. 공공부문에서 심각하죠. 비정규직-정규직 간의 임금격차도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볼수 있는 건데….”
말끝을 흐리던 김 소장은 불과 3년 만에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 의제에서 배제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머지않아 노동운동 진영은 물론 한국사회가 중요한 때를 놓쳤다고 가슴을 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06년 말 비정규직법 통과 당시 무수한 논쟁 속에서 김 소장은“뒷문을 열어놓은 채 비정규직 고용을 제도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간접고용 문제와 특수고용직에 대해 어떠한 해결의 열쇠도 없이 기간제한을 명시 할 경우 직접고용 비정규직이 더 나쁜 일자리로 이동하게 되는 이른바 ‘풍선효과’에 대한 우려였다. 그의 우려는 지금 현실이 됐다.
비정규직법 시행 3년째를 맞이하는 올해 7월, 센터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소장도 바뀌고 역할도 바뀐다. “비정규노동센터는 창립 당시부터 정책과 연대라는 양 날개로 움직여 왔어요. 앞으로는 정책적 과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하면서 비정규직 스스로 투쟁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연대의 틀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비정규직 투쟁은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이에요. 문제가 해결되면 비정규 노동자들은 투쟁전선에서 이탈합니다. 물론 대부분은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되면서 이름 없이 쓰러져 가는 경우가 많아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지향과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김 소장의 화두는 사회연대적 노동운동이다.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4년동안 붙잡고만 있는 책 번역작업도 마무리하고, 대안적 고용모델에 대한 고민도 차분히 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노동운동 진영) 모두에 날 선 비판을 던졌던 그는‘과연 설 자리가 있을까’고민도 했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노동운동 가까이에서 비정규 노동운동이 활력을 되찾는 데, 새로운 노동운동의 길을 찾고 논의가 깊어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비정규직은 자기 이름으로 자기를 불러내지 못합니다. 타자지향적이고 상대화된 운동이죠. 이들이 주체적인 지향점을 찾는 것이 새로운 노동운동이고, 사회연대적 노조주의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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