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대중에게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표로 직결된다. 정치인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우호적인 이미지를 만들려는 이유다. 대통령까지도 ‘서민적’이라는 이미지를 얻으려고 시장의 떡볶이집을 방문하는 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강기갑(58) 민주노동당 대표만큼 혜택을 받은 이도 없을 듯하다. 노력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해 왔던 대로 입고 행동하지만 그는 튄다. 누구나 단박에 그를 알아본다. 시청률 높은 지상파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그를 본뜬 코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정치에 무관심한 이들도 강 대표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인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지식검색에 ‘민주노동당 대표 있잖아요, 한복 입고 다니고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분요. 이분 청학동 출신인가요?’라는 질문이 심심찮게 오른다.

어느새 민주노동당도 ‘도포 두른 강기갑’으로 이미지화됐다. 강 대표가 부담스러워하는 대목이다. 촛불집회나 미디어법 반대투쟁 과정에서 언론에 비친 그의 과격한 모습이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이미지로 굳어질까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언론이 만든 과격하고, 고집불통 이미지 말이다. 강 대표가 최근 당 대표를 뽑는 최고위원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매일노동뉴스>가 취임 2년 만에 대표직을 내려놓는 강 대표를 지난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 지난 2008년 7월에 취임했으니, 2년이 다 돼 갑니다. 그간 사건이 많았네요.
“눈을 딱 두 번 감고 떴다 싶은데 시간이 훌쩍 지나갔네요. 2008년 4월9일 선거(국회의원) 끝나고 당선인사도 제대로 못했어요. 청와대 앞에서 농성하고, 단식하고, 촛불집회를 했죠. 이명박 대통령이 그때부터 사고를 많이 쳤거든요. 직불금 문제, MB악법, 감세법안 터지고 그 안에 미디어법이라든가 민주악법들, 감청법·금산분리완화법·집시법까지…. 지난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정국이 있었고, 같은해 4월에는 울산 재보궐선거에서 진보진영 단일화 문제가 터져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죠. 12·8 재보궐 선거에서도 홍역을 치렀고. 연말에는 4대강 예산안·노동법 날치기 통과가 있었으니까, 잠잠했던 때가 거의 없었네요.”
 

‘강달프’와 ‘호통기갑’
 
- 이른바 ‘국회 폭력’ 사건으로 재판도 받으셨죠?
“본의 아니게 국회 폭력의 대명사로 부각되는 바람에 부담스러웠어요. 당 대표가 투쟁성·폭력성·과격성을 너무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것 아니냐, 민주노동당에 대한 이미지나 분위기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을 정도니까요. 폭력 이미지를 털어내고 싶은 부담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이상하게 잊을 만하면 또 나오고 그래요.”
 
강 대표는 지난해 1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상정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한나라당과 국회 사무처에 의해 고발을 당했다. 그 유명한 ‘공중부양’ 사건이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국회법 개정 과정에서 매번 이를 언급했고, 올해 무죄판결을 받자 오히려 사법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강달프’라는 좋은 별명도 얻지 않았느냐고 묻자 강 대표는 ‘강달프’보다 ‘호통기갑’을 먼저 떠올렸다. 과격한 이미지에 대한 부담감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발언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호통치고 고함치는 그런 쪽으로 이미지를 많이 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참 인자하고 부드럽고 마음이 따뜻하다고 생각하는데.(웃음) 강기갑 하면 호통 치는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돼 버렸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이미지를 불식시킬 때가 오지 않겠어요.”

강 대표는 자신의 과격한 이미지가 민주노동당에 질곡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최근 최고위원 선거에 불출마하겠다고 밝히면서 그는 “다수 여당의 행패에 맞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저의 행동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과격성·폭력성·투쟁성과 경직성이라는 좋지 못한 인식으로 각인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강 대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한때 속세를 떠나 성직자 생활까지 했다. 폭력적이라고 비난받기에는 그의 이력이 만만찮다.
 
- 꽤 오랜 기간 성직자 생활을 하셨네요.
“성직자라기보다는 수도자 생활을 좀 했습니다. 한 6년. 도를 좀 닦고 내려왔지. 도 닦다가 하느님이 하산하라고 해서 하산했죠.(웃음) 옛날에 가톨릭농민회를 쭉 했는데, 5·18(광주민중항쟁)이 끝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나서 엄청난 탄압이 들어왔어요. 농민운동 하는 사람은 다 사상범·빨갱이로 몰렸습니다. 농민을 위해 농민운동을 하는데, 농민들이 몰라 주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내치고 하니까 농민들이 계속 미워지더라고. 젊었을 때였죠. 30대 초반인가, 20대 후반인가 그랬어요. 농민을 위하자고 농민운동을 하는 건데, 농민이 미워지면 농민운동 못하는 거잖아요. 그러던 차에 수도사제(수사)를 만나 수도생활을 시작했어요.”
 
- 6년간 수도생활하시고 농민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신 모양입니다. 다시 농민운동 하신 걸 보니.
“그렇게 오래 미워할 수 있나요. 수도생활하면서도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농민들을 초청해 강연도 하고, 나름대로 기도를 하면서 농민운동을 함께한 셈이죠. 수도생활이라는 게 육체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생활이거든요.”
 
털보 농민운동가
 
-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때도 그 즈음이라고 들었습니다. 농촌총각 결혼대책위 시절이었죠?
“가톨릭농민회 경남회장을 (수도원을) 나오자마자 바로 맡게 됐어요. 한 달 있다가 임원개편이 있었는데 우연찮게 됐어요. 80년대 말이었는데, 그때 농민들이 자살을 많이 했어요. 장가를 못 가서. 농촌총각 결혼 문제는 농업·농촌·농민 문제를 압축하는 사안이었습니다. 당시 (정부가) 기초농산물 수입개방을 선언했어요. 그래서 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초농산물 뿌리고 시위를 했는데, 연행돼 경찰서에 가 보니까 다 총각들만 왔더라고. 노태우 정권 때인가 그랬을 거요. 결혼 문제는 농업 문제의 총체적 결과이자 사회적 문제인데 왜 개인이 자살해야 하느냐. 그래서 우리가 사회적 문제로 들고 나오자 해서 유치장 안에서 준비위원회를 꾸렸지. 대전에서 준비위 모임을 가졌는데 준비위원장을 내가 맡았어요. 첫 쌍이 결혼하면 정식으로 출범하자, 성사되기 전에는 머리도 깎지 말고 수염도 깎지 말자, 이렇게 결의를 했어요. 첫 쌍을 성사시키려고 하는데 안 되더라고. 당시 가톨릭사목협의회 소속 여성노조를 많이 찾아갔어요. 온 지하철에 ‘농촌총각 도시처녀 만남의 자리’ 이런 스티커를 문마다 붙이고 다녔습니다. 노력을 많이 했지.”
 
첫 쌍이 나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모양이다. 첫 쌍을 결혼시키면 떼겠다던 ‘준비’자를 1년 넘게 못 떼고, 그 기간 동안 준비위원장을 맡았으니 말이다. 1년 넘게 자랐을 머리며, 수염으로 덥수룩해졌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얼마나 진기한 일이었는지 당시 행사를 하면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왔다고 한다. 첫 번째 결혼을 성사시킨 뒤 1년 반 만에 121쌍을 결혼시킨 데에는 방송의 힘도 컸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첫 쌍이 결혼할 때는 수염을 깎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 깎았어요. 2년 이상 기른 수염을 깎으니까 사람을 못 알아보더라고. 수염이 자연스럽게 내 얼굴이 돼 버린 거지.”
결혼대책위가 구성된 이듬해인 90년 우루과이라운도(UR) 협상을 시작으로 농업부문 수입개방 파고가 매년 높아졌다. 경남 사천시에서 농민회를 결성하는 등 전국농민회 활동에 주력했던 강 대표는 200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농민후보로 당선됐다. 이어 2008년 4월 총선에서 사천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이방호 전 의원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한나라당의 텃밭에서 권력 실세를 누른 셈인데, 당시 최대 이변으로 꼽혔다.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경선 등록마감을 불과 3일 앞두고 등록을 결정한 것이나, 사천에서 지역구 선거에 나선 것이나 모두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모험은 성공했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도 승부수를 던졌다. ‘반MB 연대’가 그것이다. 그는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강 대표는 “MB·한나라당 심판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는데, 아주 역동적인 결과를 냈으니 성공했다”며 “승리를 만들어 준 국민들에게 절을 100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인천과 울산에서 3명의 구청장을 배출했고, 사상 최대 규모의 광역의원 당선자를 냈으니, 성공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딴죽을 걸었다.
 
“이 정권이 보통 정권입니까”
 
- MB심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선거공학적으로 이합집산한 거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아무리 주고받기를 하더라도 자기 후보를 희생시키지 않으면 그게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민주노동당은 후보를 내서 사퇴시킨 적이 없었어요. 이마가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발이 부르트는 한이 있더라도 후보를 내면 끝까지 갔습니다. 이번에 팔다리를 자르는 아픔을, 진통을 겪으면서 단일후보라는 옥동자를 탄생시켰습니다. 바로 국민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당리당략으로 보면 도지사 후보로 출마시켰다가 사퇴하면 당의 존재감을 포기하는 겁니다.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죠. MB심판을 위해서는 야당이 단일화하는 성의와 희생의 제물을 제단에 바치라는 게 국민의 요구였잖아요. 그걸 거부할 수 없었죠. 특히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민중의 피울음이 담긴 요구를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 다른 면에서 보면 진보정당의 역사는 어려운 상황에서 독자생존해 온 역사로 볼 수 있는데요. 이를 약화시킨 것은 아닌가요.
이 질문에 강 대표는 인도의 원숭이 사냥법을 예로 들며 의견을 피력했다. 상자에 원숭이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놓고 상자 안에 과일을 넣어두면 과일을 움켜쥔 원숭이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욕심을 버려야 살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다. 
 
“지금 이 정권이 보통 정권입니까. 한나라당 정권이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서민경제를 몰락시키고 이렇게 사고를 안 쳤으면 후보단일화를 할 수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국민 중에서도 가장 서민들, 민중들이 이명박 정권을 엄중하게 심판하라고 염원하는데 진보정당이 자기 정체성이나 존재감, 명분을 잃지 않기 위해 응답을 않는다면 그야말로 당리당략적인 발상 아닙니까. 자기가 가진 것은 놓지 않으려고 움켜쥐고,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자기 자리 지키려고 하는 것이 보수라고 그러잖아요. 진보는 뭡니까. 더 많은 민중의 생존권을 위해서, 그 사람들의 공동의 선을 위해서,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손에 쥐고 있던 것마저 버리고 자기 집도 깨고 부수고 더 앞으로 전진하는 것 아닙니까. 진보정당의 존재감·명분·정체성, 대단히 소중하죠. 민주노동당 지금까지 그런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습니까. 그러나 전체 민중의 피울음을 토하게 하는 이명박 정권하에서 민중이 요구하는 바를 향해 떨쳐 나가는 것이 진보의 자세이자, 진보정당이 취해야 할 행보라고 생각합니다. 명확한 명분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반MB 연대’를 할 수 있었던 거죠. 도지사 후보가 죽고(사퇴하고) 나면 당이 안 보이는데 그게 쉽게 되는 게 아니에요.”
 
- 다른 정당과 연합의 정치랄까, 연대의 정치가 얼마나 진행되리라고 보십니까.
“단순히 선거공학적 선거연대를 한 게 아니라 정책연대를 했어요. 100개 가까운 정책이 있습니다. 후보는 사퇴했지만,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6·2 지방선거를 통해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졌거든요. 친환경 무상급식은 민주노동당의 창당공약이잖아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민주당의 모당인 열린우리당과 얼마나 싸웠습니까. 이런 것들을 다 채택한 겁니다. 어린이 무료예방접종, 이거 17대 국회 때 현애자 전 의원이 발의한 내용입니다. 정권이 예산확보를 안 해서 실시하지 못했거든요. 뉴타운 재개발 문제도 있죠. 이런 정책들이 지방선거에서 국민들에게 제안됐고, 당선된 지역의 인수위에서 어떻게 시행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진보대통합 바로 진행”
 
- 다음 총선에도 선거연대나 정책연대가 계속될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일단 지방선거 때만 연대한 겁니다. 계속 추진할지 말지를 결정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당장 7·28 재보궐선거가 닥쳐왔어요. 정치는 정당을 보고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보고 해야 합니다. 국민들은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자기희생과 노력을 통해 단일화를 하니까 지지를 했어요. 그래서 승리를 만들어 줬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사분오열되는 모습을 보이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또 이명박 정권이 지방선거 결과를 안 받아들이잖아요. 4대강 사업은 오히려 속도를 내고 있고 남북관계도 그렇고. 서민경제도 최저임금 결정구조를 보면 눈도 꿈쩍하지 않잖아요. 이 정권은 선거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아요. 따라서 이후에도 MB심판에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진보신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고전했습니다. 선거를 치르는 방식도, 결과도 민주노동당과 달랐는데요. 진보대통합이 어려워진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보진영이 힘을 결집시켜야 합니다. 진보진영 대통합을 전제로 해야 진보진영 간 후보단일화나 이런 게 잘되거든요. 사실 이번에 국민들이 야당에게 준 표에는 진보적 가치와 내용으로 야당이 변화해야 한다는 주문이 담겨 있습니다. MB심판에 못지않게 진보진영의 대통합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이 있습니다. 진보진영이 하나로 힘을 모아 그 힘으로 야권단일후보 협상에 들어가야, 결과를 진보적 내용으로 끌어올 수 있어요. 진보신당에 계속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보신당이 6·2 지방선거 이전에는 통합의 ‘ㅌ자’도 꺼내기 힘들다는 뜻을 밝혔어요. 이제 지방선거가 끝났으니까, 다시 대통합을 논의해야죠. 얼마 전에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와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식사하면서 신나게 웃고 손잡고 이제 진보진영 대통합의 행보를 빨리 가자, 마음이 급하다, 그렇게 다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통합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 요새 정치권에서 세대교체가 화두입니다. 민주노동당도 이런 흐름에 영향을 받는 건가요.
“수염이 많아서 그렇지, 세대로 따지만 수염 깎고 나면 30대 후반 정도뿐이 안 되는데.(웃음) 세대교체라기보다는 내가 할 역할은 다 했잖아요. 양놈말로 카리스마라고 할까, 특성과 기질 그런 걸로 할 만큼 했고. 아까 얘기했듯이 내가 가지고 있는 당에 대한 과격성·경직성·투쟁성·폭력성을, 오해도 있지만, 국민들에게 너무 깊게 각인을 시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대표 자리를 내놓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이 몸부림치고 발버둥치고 해도 국민들이 안 알아주셨지만, 이번 선거결과로 보면 MB가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아시는 거잖아요. 이제 진정성을 넘어 대안과 정책, 실천을 통해 국민에게 증명하는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도자는 ‘조금 더 했으면 좋겠다’ 싶을 때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대, 새로운 물결이 들어올 수 있어요.”
 
강 대표의 바람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진보, 혁신적이고 믿을 수 있는 진보가 좋아서 기쁘게 표를 던질 수 있는 야당을 만드는 일’이다. 진보진영의 숙원이기도 하다. 오랜 숙제를 실천하는 그의 방식은 “순간에 꼴아박아라”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과거도 현재를 통해서 흘러간 것이고, 미래도 현재를 통해서 다가올 겁니다. 현재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나간 과거나 다가올 미래에 너무 집착하거나 마음을 쏟지 말고 닥친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죠.”
강 대표가 다음달 7일 선출될 민주노동당의 새로운 대표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강기갑 대표는]
195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71년 사천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젖소를 키우고, 과수 농사를 지었다. 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에 들어가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82년 농민운동에 대한 고민으로 천주교 수사가 됐다. 87년에 수도자의 길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89년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91년 당시 결혼대책위 간사였던 박영옥씨에게 청혼, 결혼에 성공했다. 90년대 초반 가톨릭농민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98년에는 새로 결성된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활동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고, 2008년 사천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18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후반기에는 국토해양수산위원회에 배정돼 4대강 사업 등 현안을 다룰 예정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