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제기

2009년 2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책자가 나온 후 주목할 만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연구원에서는 후속연구들이 진행됐다. 각 지역과 사회단체에서도 관심이 높아지면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됐다. 기존의 사회복지체제를 보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며 기본소득은 비현실적 급진론이라는 것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고용보험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각지대는 실업부조로 해결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현실적 접근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기본소득론자들은 일정한 반비판을 통해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했다. 몇 가지 난제에 대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판에 대해 해명했음에도 여전히 일각에선 거부되고 있다. 침묵의 카르텔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진보진영의 무기력을 초래하고 있는 원인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판단한다. 노동기본권이 제도적으로 학살당하고 있다. 빈곤층은 늘어가고 있으며 비정규직의 생활은 희망이 없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으며 사회적 문제는 커져 가고 있는데 왜 강력한 대중운동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 속에서 비판적 지지는 왜 이토록 모습을 바꿔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화려했던 촛불은 왜 속절없이 스러져 갔던가.

단언컨대 이것은 대중들이 이중의 질곡에 속박돼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로 대표되는 보수집단은 대중들을 탄압하지만 진보진영은 대중들을 대변하는 척하며 발목을 잡고 있다. 크게 봐서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미운 것’이 대중의 정서다. 시누이는 며누리를 대변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억압하는 존재다. ‘좋은 소리’는 다하지만 뭔가 설교나 ‘꼰대 말씀’처럼 실제 탄압받는 대중들과의 공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느낌의 정체를 드러내고 대안의 실마리를 풀어 보고 싶었다. 이런 심정은 재작년 촛불사태를 겪으면서 더 절실해졌고, 2009년 말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강행처리에 대응하는 노동진영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 느낌의 실체는 일종의 ‘무기력’이다. 탄압하는 상대는 분명하지만 그 상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려는 몸놀림은 생각만큼 가볍지 않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가. 무엇이 대중들이 급진적으로 진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가. 그것은 경찰의 방호벽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부에 있다. 

상황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압력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여러 층위에서 두터운 벽을 형성하고 있으며 눈에 보이는 부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권으로 상징되는 보수의 벽, 의식영역에서 저지선을 치고 있는 보수언론의 벽, 경찰을 포함한 물리력의 벽은 이중 장벽하에 보호받고 있다. 그것은 알려졌듯이 대중이 아니라 오히려 진보개혁진영의 근대주의적 이데올로기다. 즉 보수와 진보세력 그 중간에 대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개혁 대 대중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분노를 드러내 사회적 발언권을 갖게 하려면, 기본소득 담론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려면, 어떤 절차와 방식으로 보수와 진보개혁세력의 공모가 이뤄지고 있는지 밝혀내 해체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이것은 사실 위험한(!) 작업이다. 해체 대상은 하이에크 같은 자유주의 철학자에서부터 서양근대사를 형성했던 계몽주의적 인식론, 일반적으로 인류가 의존해 온 인식론적 기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최근 합리적 시장경제 경영기법 이론에 힘입어 물질화된 영역의 지배담론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기본소득의 보편성’이란 주제는 다소 읽기가 불편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근대주의적 인식의 한계를 넘으려면 기본소득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래 진리는 쉽게 깨우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사실 이 주제는 학제 간 연구가 필수적이다. 아쉽게도 기본소득과 관련한 인식론적 연구는 선행 연구자료를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실험적 시도에 머무는 한계가 있다.

만일 학문적 영역이라면 이 작업은 만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현실은 그 만용을 요구하고 있다. 대중의 절박한 현실이 강제하고 있는 시대적 요구를 직시한다면 어쩌면 이 작업이 너무 지체됐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다. 서구 근대사회를 하나의 모델로 삼고 있는 한국의 지적풍토하에서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현실이 불가피하게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기본소득의 보편성
一中一切太中一  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太卽一  일즉일체다즉일
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      
一切塵中亦?是  일체진중역여시
無量遠劫卽一念  무량원겁즉일념      
一念卽時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하나 가운데 일체 있고 많은 가운데 하나 있는지라,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은 것이 곧 하나일세.
하나의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일체의 티끌 무더기도 또한 이와 같네.
영겁의 시간이 곧 한순간이요, 한순간이 곧 영겁의 시간이라.
의상 『법성계』 
 
인간은 ‘개별’이자 ‘덩어리’
세상에 대한 인식론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뜬금없이 왜 한시인가”라고 하겠지만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 ‘티끌 하나에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불교적 성찰은 기본소득의 철학적 기초를 잘 설명해 준다. 인간은 개별로 존재하면서도 인류라는 하나의 덩어리에 존재하는 세포와 같은 존재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망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생존조차 불가능하다. 생물학적 개념으로 재해석하면 개별적 존재로 보이는 생명체라는 것이 사실은 하나의 연결된 장(場) 속에서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본소득을 이해하기 위한 인식론적 출발점일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돈을 주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정서적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단지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취지라면 도덕적 입장일 뿐 반드시 해야 할 필연적 정책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무위도식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사회적 부를 준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선택사항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무위도식하는 사람과 내가 무언가의 ‘끈’에 의해 연결돼 있다는 인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 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인간은 유적존재 혹은 사회적 존재라는 추상적 관념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관념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끈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실체로 인식하는 문제와 같다.
 
인간도 물질인 이상 물질세계에 작용하는 물리적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물리학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를 인정한다. 예를 들어 자석의 자장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그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자석은 분명히 제한된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에 지나지 않지만 그 자장까지 고려한다면, 자기장을 포함한 실체로 파악돼야 할 것이다. 이런 물리학을 확대하면 여러 가지 신비한 자연현상 역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적 힘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주 일반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비둘기들은 어떻게 자신의 둥지를 찾아오는 것일까. 제비들은 어떻게 그 먼 여행을 갔다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올 수 있을까. 새로 태어난 새들은 초행길인데도 이주 경험이 많은 새들의 안내도 받지 않고 본능적으로 조상 대대로 겨울을 난 둥지를 찾아갈 수 있다. 심지어 곤충들도 전에 가 본 적이 없는 먼 곳으로 이주할 수 있다. 일반적인 가설은 ‘별을 보고 방향을 정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또 ‘지구 자기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결과가 아닐까’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일 뿐이며 수년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행동유발 요인들을 차례로 제거했는데도 동물들은 비행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최근에 소개된 가설은 다음과 같다. 비둘기의 귀소 능력은 비둘기와 둥지를 이어 주는 어떤 보이지 않는 고무줄-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는 끈이라는 표현을 상기하기 바란다-같은 것이 있어 비둘기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역설1)에서 처음 거론됐다.
 
물리학과 생물학이 만나는 지점 -형태장이론
또 다른 흥미로운 실험사례는 흰개미 사회와 형태장 이론에 의한 것이다. 정교하게 설계된 흰개미의 집이 어떤 작동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느냐다. 하나의 개별존재로서 개미는 어떤 인식작용도 하지 못하는 듯하다. 뇌가 없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개미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면서 인간도 흉내 내기 힘든 멋진 집을 짓는다. 컴퓨터 운영체제 프로그램과 견줄 수 있는 실체가 개미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곤충집단의 영혼, 또는 집단지성이라고 한다. 이 개념은 오래전 생명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하지만 신비적이라는 이유로 기계론자들에 의해 배척됐다. 이것은 신경세포들이나 개별 곤충들의 기계적 상호작용으로부터 고도의 지성적인 활동이 나타난다는 가설2)인데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흰개미들의 전일적인 조직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새롭게 제기된 학설이 ‘장(field)’개념이다. 즉 개별 곤충들은 그 집단에 종합적인 건축 청사진을 제공하는 ‘사회적인 장’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 자석 주위에 쇳가루를 뿌렸을 때 생기는 모양이 자기장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집단을 이루고 있는 흰개미들 조직도 ‘집단장’의 영향을 받는다. 이 장이라는 용어를 처음 과학에 접목한 사람은 미카엘 페러데이다. 그는 에너지원 자체보다는 에너지원 주변의 공간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을 제기했다. 장 개념의 적용은 19세기에는 전자기와 빛에 국한됐으나 1920년대에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내세우면서 중력에까지 확장3)됐다.

장은 원래 전일적이다. 물리학에서는 이미 장 개념이 널리 이용되고 있지만 생물학은 아직 초기단계에 있다. 1920년대 몇몇 태생학자와 발생생물학자들이 동식물이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형태발생장이라는 가설을 세우면서 생물학의 변혁이 시작됐다. 성장하는 유기체의 형태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청사진이나 계획은 형태발생의 장에서 비롯된다는 가설이다. 예를 들어 팔이 절단된 사람이 여전히 없어진 부위에 통증을 느끼는 경우를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된다. 또한 팔과 다리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모양을 띠게 되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팔은 팔 형태발생장 영향 아래 자라고 다리는 다리 형태발생장 영향 아래 자라기 때문에 서로 다른 모양이 된다. 이 형태발생장 개념4)을 좀 더 밀고 나간 것이 형태장이라는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흰개미들은 자연 상태에서 완벽한 집을 짓는다. 그러나 개미들을 분산시키고 서로 완벽하게 차단한 상태에서 집을 짓게 한다면? 그럴 경우에도 이들은 서로 딱 들어맞게 집을 짓는다. 마치 이들의 활동은 전체를 통괄하는 어떤 기구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것 같다.

마라이스는 ‘단체정신’이라고 표현했지만 셀드레이크는 형태장(morphic field)라고 명명한다. 이 형태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토록 정교한 설계도를 뇌가 없는 곤충들이 만들어 내는 신비를 일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신비로운 현상에 대한 분석을 제시할 수 있지만 여기서 주요한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즉 물리학에서의 양자 물질장, 전자기장, 그리고 중력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물을 근원적으로 규정하거나 움직이는 힘의 실체로 존재한다. 이것을 생물학의 영역으로 발전시킨 것이 형태발생장, 형태장이다. 형태발생의 장에서 장의 개념은 자기장의 장과 같은 개념이다. 전기나 자기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공간 속에 분명히 존재한다. 자석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자장이라는 존재에 감싸여 있듯이 생물체도 어떤 형태발생의 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각주]
1)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에 내포돼 있는 비공간적 요소를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전에 하나였다가 두 개로 분리된 양자시스템들의 동시적인 연계성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벨의 법칙에 입각해 1982년 알랭 아스펙트가 행한 실험에서 양자의 비국소성이 입증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빛보다 빨리 신호를 주고받을 가능성을 제외하면, 이 결과는 한때 서로 상호작용을 해 오다 분리된 두 입자는 전혀 분리가 안 되는 동일한 시스템의 구성요소인 것처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비국소성 속에 굉장한 의미가 내포돼 있다. 우주 전체를 상호작용하는 입자들로 이뤄진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각각 서로 연결돼 있어 그 속에 참여하고 있는 입자들은 하나의 양자시스템으로 통합된다. 우주는 너무 복잡하고 거대해 아스팩트가 고안한 것과 같은 특별한 실험을 거치지 않고는 그 미묘한 연결을 알아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주를 양자이론으로 설명하는 데 어떤 강력하고 전일적인 맛이 있다. 둥지와 비둘기 간의 보이지 않는 연결! 그 연결은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루퍼트 셀드레이크, 「세상을 바꿀 일곱 가지 실험들」, 양문, 89쪽
2) 곤충사회의 놀라운 점은 그 사회의 개별적 구성요소가 개체라는 점, 그리고 그 사회는 중앙 통제적인 자아 또는 국부적인 자아 그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우리가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고 있으며 마치 전체의 중앙에서 조정하는 행위자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내가 ‘무아적 자아’라고 부르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중략-
   간단한 구성요소들의 협동적 활동이 빚어내는 창발적 특징을 복잡계가 어떻게 보여 주는가에 대한 모델의 수용은 인지적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모델은 이제껏 주류로 형성돼 온 계산주의자 전통에 명백한 대안을 제시한다. 계산주의자 전통은 외부세계에 대한 중앙통제적이고 내부적인 표상을  연속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감각입력이 연속적으로 처리된다고 가정한다. -중략-
   독자들이 계산주의가 오랫동안 주도한 주장을 넘어 인지적 자아를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상위 수준의 계산적 묘사로 개념화하는 계산주의적 경향에 대해 대처할 수 있도록 이러한 사실을 강조한다. 왜냐 하면 인지적 자아는 전혀 계산주의자가 주장하는것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지적 자아는 스스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것의 역사와 행위는 한 덩어리다. -프란체스코 .J. 바렐라, 「윤리적 노하우」, 88~89쪽
3)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물질을 부드럽게 감싸는 우주 중력이 우주 전체를 품고 있다. 또한 양자 물리학의 발전으로 모든 원자구조의 밑바탕에는 장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됐다. 모든 ‘미립자’를 일정한 장의 영향력 아래에서 진동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양자로 본다. 전자는 전자장 내의 진동이며 프르톤은 프로톤 장 내의 진동이라는 식이다. 양자 물질장, 전자기장, 그리고 중력장은 서로 종류는 다르지만 전형적인 공간 양식을 갖추고 내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장의 특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루퍼트 셀드레이크,  「세상을 바꿀 일곱 가지 실험들」, 양문, 122쪽
4)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물잠자리 알이 어느 정도 신체 각 부분의 특징을 갖췄을 때 머리 부분을 실로 묶는다. 얼마 후 물잠자리 알에서 머리가 사라진다. 머리가 없어진 물잠자리는 기형이 되거나 죽어야 하는데 물잠자리 신체의 다른 부분이 머리로 변하여 물잠자리는 완전한 개체가 된다. 즉 수정된 알에서 발생한 생물체는 그 알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의 물질적 성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알을 둘러싼 형태발생의 장에 의해 모양을 형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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