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가 타 업종에 비해 안정적이었던 금융권에 ‘타임오프 한도’(근로시간면제 한도)라는 핵폭탄이 떨어졌다. 노동부는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가 지난 1일 결정한 타임오프 한도를 14일 고시했다.
시중은행과 금융공기업 등 제1금융권에 소속 노조로 구성된 금융노조는 근면위 결정 직후 “한국노총을 탈퇴하겠다”며 타임오프 한도 결정에 반발했다. 노조는 19일 열린 지부대표자회의에서 해당 안건을 차기 중앙위원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금융노조의 한국노총 탈퇴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증권·보험·카드 등 제2금융권 노조로 구성된 사무금융연맹은 상대적으로 사업장 규모가 작은 곳이 많아 타임오프 충격이 크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노조 133.5명, 사무금융연맹 12명 감축

지난해 말 현재 금융노조 조합원은 34개 지부 9만6천536명으로, 전임자는 295명이다. 지부 전임자가 270명, 파견 전임자가 25명이다. 타임오프 한도에 따른 전임자수는 161.5명이기 때문에 감축인원이 133.5명이나 된다. 인원 감축률이 45%에 달해 고강도 구조조정이 예상된다.
사무금융연맹은 조합원이 4만4천904명으로, 115개 단위노조로 구성돼 있다. 전임자는 226명. 타임오프 한도에 따른 전임자는 214명으로 12명만 줄이면 된다. 규모가 작은 사업장이 많기 때문이다. 소규모 노조에서는 없던 전임자가 생길 수도 있다.<표1 참조>
 

반발하는 금융노조 대형지부들

근면위가 지난 1일 새벽 타임오프 한도를 결정하자, KB국민은행지부·농협중앙회지부·우리은행지부 등 대형지부를 중심으로 한 금융노조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노조는 본조·지부 전임자들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로 인식하고, 3~4일 한국노총 점거농성을 벌였다. 노조는 이에 앞서 3일 긴급 지부대표자회의를 열고 정책연대 파기와 한국노총 위원장 사퇴를 요구했다.  노조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한국노총을 탈퇴하기로 결의했다.

노동부는 타임오프 고시에서 “사업장 특성을 반영해 보완할 필요가 있으면 근면위에서 재논의할 수 있다”는 내용의 부칙을 삽입했다. 노사정이 11일 발표한 합의문에는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이 권고했던 ‘사업장 특성에 따른 가중치 부여’와 관련해 “근면위가 심의·의결한 대로 시행하되 노동부장관이 면제한도 시행상황을 점검하고 면제한도의 적정성 여부를 근면위에 심의·요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노조는 이에 대해 “노동부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심의·요청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고시 부칙에 근거해 전임자 증가를 기대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노조는 한국노총 탈퇴 안건을 상정한 이유로 “한국노총이 조합원수를 고려하지 않고 300인 이하 사업장이 85%인 것에 중점을 두고 교섭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중소기업노조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기업노조에 지나친 희생을 강요했고 결국 대기업노조가 많은 금융노조가 희생양이 됐다는 주장이다. 실제 KB국민은행지부는 전임자 38명에서 16명으로 22명을 줄여야 하고, 농협중앙회지부는 42명에서 14명으로 28명을 줄여야 한다. 우리은행지부도 39명에서 14명으로 25명을 감축해야 한다.
 
고민에 빠진 중소사업장노조

중소사업장노조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중소노조는 전임자 축소 인원만 놓고 보면 대형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타격이 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동부가 고시한 타임오프 한도에서 아슬아슬하게 하위구간에 포함된 중형사업장노조들의 고민은 깊다.
금융권 노조 중 조합원 1천명에 근소하게 미치지 못하는 노조 서너 곳이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타임오프 한도에 따르면 조합원 500~999명 구간에 포함된 노조의 경우 타임오프 최대 전임자는 3명이다. 그런데 1천명만 넘기면 전임자는 5명으로 늘어난다.<표2 참조>

예컨대 조합원이 953명인 생명보험노조 알리안츠생명지부는 현재 전임자 5명에서 2명을 줄여야 한다. 반면에 조합원을 47명만 늘리면 지금의 전임자수를 유지할 수 있다. 손해보험노조 서울보증보험지부는 조합원이 996명으로 4명만 늘리면 전임자 5명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금융노조 자산관리공사지부도 마찬가지다. 지부 조합원이 964명에 전임자가 3명인데, 조합원 6명만 늘리면 전임자가 5명으로 늘어난다. 규모가 더 큰 금융노조 한국씨티은행지부는 조합원이 2천934명으로 현 전임자 10명에서 절반인 5명을 줄여야 하는데, 조합원을 66명 늘리면 감축인원은 3명으로 줄어든다.
노동계 관계자는 “노동계가 타임오프 제도 자체를 비판하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는 어렵다”면서도 “고려는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2금융권, 과연 핵폭탄 피했을까

조합원 50명 이상의 소규모 노조라고 해서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다. 보통 5명 정도의 전임자로 유지됐던 노조의 경우 전임자 한 명이 조직·홍보·정책 등 여러 가지를 도맡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전임자 한 명의 빈자리가 그만큼 크게 느껴진다.

금융노조 농협중앙회지부와 사무금융연맹 NH농협중앙회노조와 같이 복수노조가 있는 사업장의 상항은 심각하다. 타임오프 한도에 복수노조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수노조로 전임자 대폭 축소가 예상되는 곳은 한국투자증권지부과 한국거래소노조 등이다.

반면 타임오프 한도로 ‘수혜 아닌 수혜’를 입는 것처럼 보이는 곳도 있다. 사무금융연맹 금융감독원노조는 조합원 1천95명으로 현재 전임자가 2명이다. 그런데 타임오프 한도를 적용하면 전임자는 최대 5명이다. 3명을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노조는 조합원이 1천100명인데, 전임자가 3명이다. 마찬가지로 2명을 더 확보할 수 있다.

기존에 전임자가 없던 조직에서 전임자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타임오프 한도만 놓고 본 전망이다. 이에 대해 연맹 관계자는 “타임오프는 전임자의 최대 인원을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노조에서 갑작스럽게 전임자가 늘기는 힘들다”며 “노사합의가 뒤따라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노조활동 위축, 정책 비판 약화로 이어질까

타임오프로 인해 안정적이었던 금융권 노사관계가 불안정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노조 우리은행지부 관계자는 “일부 학계와 전문가들의 전망대로 전임자임금 문제 때문에 원만한 노사관계를 유지했던 사업장 노조들이 강성노조로 변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인수합병과 정부 금융정책에 대한 건전한 견제의 목소리가 약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올 하반기로 예고된 대형 은행 간 인수합병이 잇따르고, 전임자가 축소될 경우 금융권 노조들이 방어적인 고용안정 투쟁에 매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주선 금융노조 정책홍보부 국장은 “지금까지 금융노조는 건전한 견제세력으로서 금융산업의 진로에 대해 목소리를 냈던 게 사실”이라며 “인수합병이나 공기업 문제에서 노조의 비판기능이 축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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