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년 행사로 뜨거웠다. 6·2 지방선거와 맞물려 전국 각지에서 추모행사가 진행됐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 5월23일에는 약 10만명의 추모객이 봉화마을에 모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노무현 정권 당시의 인사에서부터 노동자까지도, 지방선거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부터 민주노동당·진보신당 후보까지도 ‘상록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부엉이바위 아래서는 모두가 하나였다. 지난해 노 전 대통령이 부엉위바위에서 투신했을 때도 그랬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 모두가 하나였다. 함께 ‘상록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고, 눈물을 흘렸다.

2. 그렇다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하나는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을 제외하고서 모두가 하나였다. 결국 시민들은 지난해와 올해 부엉이바위 아래에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 맞서 모두가 하나였던 것이다. 봉화마을과 시청광장에서 시민들의 노래와 눈물로 노무현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 맞서는 투사로 되살아났다. 시민들은 죽은 노무현을 불러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을 저주했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고 환경을 훼손하는 4대강 사업을 규탄했다. 죽은 권력자와 살아 있는 권력자의 투쟁을 시민들의 노래와 눈물로 주문했다. 그렇게 시민들은 노무현을 추도했다.

3. 그러나 노무현은 노무현일 뿐이다. 노무현은 이명박 정권에 맞서는 투사일 수 있어도 노동자의 투사일 수는 없다. 그래서 시민들이 노무현을 외치고 불러낼 때 당신이 노동자라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노무현을 불러내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그저 인간적으로 안타깝고 애통해서 그의 이름을 불러본 것이라면 당신은 정치행사장에서 노무현을 불러서는 아니된다. 서울광장 등 전국의 광장에서 노무현을 부를 때 그들은 노무현을 이명박 정권에 맞서는 민주당의 투사로서 6·2 지방선거의 선거운동원으로 되살렸다. 그들은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는 민주당 후보이거나 야권단일 후보, 또는 한나라당 후보가 아니면 아무나 당선돼도 관계없다는 정당후보이거나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이다. 그들은 과거 노무현이 갔던 길과 가고자 했던 길이 자신의 길이라고 추도사를 통해 말했다.

그러나 노무현 앞에서 노동자는 없었다. 노무현 정권이 갔던 길은 노동자에게는 너무도 혹독했다. 그것은 단순히 외환위기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시적으로 노동자에게 가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이 노동자에게 무언가 주고자 했지만 줄 것이 없어서, 노무현의 의지와는 달리 줄 수 없었다는 것은 올바른 진단이 아니다. 노무현은 노동자에게 줄 의지가 없었고 노동자에게 무엇을 줘야 하는지조차도 몰랐다.
노무현 정권에서 노사관계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노조법은 노동기본권을 제한했다. 전임자급여 지급금지와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 방안 마련에 관한 노조법은 그 시행이 유예되고 있었을 뿐 시행이 예정돼 있었다. 파업 등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의 행사가 노조법 위반 등을 이유로 기소돼 범죄행위로 처벌됐고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신청 등이 정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수많은 노동조합과 노조간부에게 가해졌다.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기구에서 노무현 정부에게 삭제를 권고한 전임자급여 지급금지와 파업에 대한 업무방해죄 등 형사처벌조항도 폐지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노동자를 말했지만 노무현은 노동자를 비난했다. 노무현이 말한 노동자는 비정규직을 차별대우하는 정규직이었고, 정규직노조는 귀족노조였고, 노무현은 이들을 비난했다. 노무현은 노동자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은 보지 않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에 관해 말했고, 그것은 정규직과 정규직노조의 책임으로 둔갑했다. 노무현은 비정규직 차별시정에 관해서는 노동의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파견근로와 기간제근로를 확대해 비정규직의 고용조건을 법률로써 악화시켰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노동정책의 주요과제로 정해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을 일반화시켰다. 노동자를 해고하고 저임금을 지급해서 보다 많은 이윤을 쥐어짠 사용자는 우수한 경영자로 평가됐고, 해고되고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는 패배자로 당연시됐다.

4. 노무현은 노동자대표가 아니었다. 노무현은 노동자의 이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지도 않았다. 노무현이 선거과정에서 노동자를 말할 때 그것은 노동자에게 표를 달라고 구걸한 것이지 노동자대표로서 권력을 행사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동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노무현을 비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노무현은 노무현일 뿐이다.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착한 바보 노무현이 ‘진보의 미래’를 말해도 노무현의 진보에는 사람이 있을 뿐 노동자는 없다. 노무현은 시민을 말할 뿐 노동자를 말하지 않았다. 시민권력을 주장하고 시민의 민주주의를 외칠 뿐 노동자의 권력 행사와 노동자의 민주주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사람·시민·국민과 인권, 그리고 국민주권을 말했지 노동자, 노동자의 권력 행사를 말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노동정책을 말할 때 막연히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인본주의의 노동정책을 말했을 뿐이다. 노무현은 ‘사람사는 세상’을 목청껏 노래했지만 ‘철의 노동자’를 대통령이 되어서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부엉이바위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는 다른 시민들과 함께 노무현을 불렀다. 당신이 노무현을 부를 때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었다. 당신이 노무현을 추도할 때 당신은 노무현이 그토록 대변하던 시민이었다. 당신이 시청광장 등 정치행사장에서 민주당후보와 함께 ‘상록수’를 부르며 노무현을 노래할 때 당신은 노동자가 아닌 노무현이 그토록 사랑하던 국민이었다.

5.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노동자를 부르지 않는다. 어쩌면 한 번도 노동자는 노동자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노동자의 노래는 노무현을 부르는 노래처럼 울려 퍼진 적이 없다. 노동자는 노동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어쩌면 한 번도 노동자는 노동자의 이름을 부르며 노동자의 권력과 민주주의와 미래를 위한 노동자의 이름 앞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언제 한번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기본권이 노동자의 이름과 노래와 눈물로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우리에게는 노동자가 노무현을 부르며 시청광장과 봉화마을에서 눈물을 흘려도 진보의 눈물로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가 정치행사장에서 노무현을 부르고 눈물을 흘린다면 노동자는 내일 다시 노무현을 보게 될 것이다. 시민과 국민이 불러온 노무현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때 다시 노동자는 권력이, 시민과 국민의 대표자들이 참여했다는 권력이 시민과 국민을 말하면서 노동자의 이름과 기본권을 외면당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시민과 국민의 대표자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노무현 앞에서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 자가 흘리는 눈물이 노동자대표가 아닌 시민과 국민의 대표로서 흘린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는 자신의 대표자를 찾아내 자신의 권리를 입법을 통해 법전에 담을 수 있다. 그 길이 멀고 멀다 해도 노동자의 길과 노무현의 길이 다르고 그래서 노동자는 자신의 길을 찾아야 노동자의 권리장전에 노동자의 이름을 새길 수 있다. 노동자의 길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이름 앞에 노무현의 이름 앞에서 흘린 눈물보다 수십 배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

6. 5월23일 봉화마을 부엉이바위 아래 추도식에서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추도사에서 맹세했다. “깨어나는 시민들의 마음 속에서 노무현이 부활하고 있다”며 “살아남은 우리는 분노도 슬픔도 눈물도 참고, 해야 할 일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부엉이바위 아래에서 노동자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추도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맹세해야 했다. “깨어나는 노동자의 마음 속에서 노동자의 길이 있다”며 “노동자는 분노도 슬픔도 눈물도 참고, 노동자의 내일을 향해 노동자의 길로 뚜벅뚜벅 나아가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바보 노무현의 죽음을 인간적으로 애도하면서도 노동자는 이렇게 맹세해야 했다.
노동자의 길과 노무현의 길이 다른 것이어서 슬프고 그래서 눈물이 흐르지만 그래도 노동자는 이해찬의 추도사가 노동자의 추도사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인간적으로 매몰차고 그래서 비정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분명히 알아야 한다. 봉화마을 부엉이바위는 노동자의 바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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