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 금융기관 계열사 직원으로 근무하던 IT노동자 양아무개(34)씨는 지난해 1월 폐 일부를 잘라 내는 수술을 받았다. 매일 자정을 넘어 퇴근하고, 휴일에도 쉬지 못하면서 일하다 면역력 저하로 폐결핵을 얻었기 때문이다. 양씨는 "도저히 기한을 맞출 수 없는 일정을 주고 프로젝트를 끝내라고 하니,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이어지는 살인적인 노동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양씨는 2006년 금융기관 IT계열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적은 인력에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보니 일은 항상 넘쳐났다. 한 프로젝트를 끝내자마자 다른 프로젝트가 떨어졌다. 장시간노동에 시달리다 병에 결렸는데, 회사측은 산업재해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는 근거는 있지만, 회사 일을 한 것인지 다른 일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였다. 양씨는 "IT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들어 IT노동자들의 근무여건과 건강실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IT노동자들의 살인적인 노동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실태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는 달리 IT노동자들은 혼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청이나 재하청으로 내려가면 재택근무를 하는 노동자들도 많다.

우리나라는 수년간 IT산업 강국으로 불렸고, 지금도 핵심 성장동력 중 하나가 IT산업이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은 최근 <매일노동뉴스>에 보내온 기고문에서 IT노동자들의 고용 문제를 언급하며 "우리나라 IT산업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며 "IT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고는 산업발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연간 3천208시간, 6년간 변화 없어

진보신당과 한국IT산업노조가 IT노동자 1천665명을 대상으로 공동조사해 지난달 발표한 설문결과에 따르면 이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평균 61.7시간으로 조사됐다. 회사에서 평균 55.9시간을 일하고, 5.8시간을 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3천208시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1위인 우리나라 노동자 1인당 연간 평균노동시간(2천316시간)보다 900시간 가까이 길다. 프랑스나 독일의 연간 노동시간은 각각 1천533시간과 1천433시간에 불과하다.

조사결과, 야근과 휴일근무가 일상화돼 있음에도 수당을 받지 못한다고 답한 사람이 76.5%에 달했다. 편법을 통해 수당을 받는다는 경우는 18.7%, 법대로 수당을 지급하거나 대체휴가가 주어지는 경우는 각각 2.3%와 2.5%에 그쳤다.

IT노동자들은 이에 따라 대부분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82.2%가 만성피로를 호소했고, 근골격계질환(79.2%)이나 거북목 증후군(73.1%)에 시달리는 사람은 절반을 훌쩍 넘었다. '두통이 있으며 속이 더부룩하고 몸이 무겁다'는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도 69%(복수응답)로 조사됐다.

설문조사에 응한 사람들의 평균 나이는 31.8세로 매우 젊은 편에 속했다. 20대와 30대가 각각 39.1%와 58%를 차지했다. 장시간 격한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나이가 들면 IT업계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노조는 이에 앞서 2004년 한국기술교육대·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의뢰해 1천81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이와 비슷한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절반이 조금 넘는 43.4%가 주당 60시간 이상을 일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7.6%는 주 80시간 이상을 일하고 있다고 답했다. 조사 대상 절반 이상이 60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야근과 휴일근무를 반복하고 있지만 시간외수당(야근수당)을 받는 노동자는 8%에 불과했다. 올해 조사에서는 60시간을 넘게 일하는 노동자가 29.6%였고, 이 가운데 80시간 이상을 일하는 노동자는 5.4%였다.<그래프 참조>
 
 


당시 조사에서 34%의 노동자가 임금체불에 시달리고 있다고 답했다. 고용불안을 느끼는 노동자는 45%에 달했고, 장래전망을 불투명하게 보는 노동자는 79%였다. 수치만 놓고 살펴보면 지난 6년간 IT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나아지지 않았고, 일부는 오히려 악화했다.

열악한 노동조건, IT산업 근간 흔들어

특히 장시간 과노동으로 연륜 있는 IT노동자들이 IT산업을 떠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나라 IT산업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2004년 조사에 참여했던 김주일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회사가 초장시간 노동을 통해 노동력을 빼내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고 창의적인 개발에 초점을 두지 않고 있다"며 "하도급 구조에서 양산되는 열악한 노동조건은 IT노동자의 장애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IT산업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병권 새사연 부원장도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 부원장은 아이폰을 출시한 애플사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IT노동자의 고용불안 문제와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IT강국의 자리를 위협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컨대 글로벌 IT업계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삼성전자가 지난해 휴대폰을 2억대 이상 팔아 4조원의 이익을 낼 동안 애플사는 삼성의 4분의 1 정도만 판매하고도 그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는 것이다. 김 부원장은 그 비결을 모바일 기계라는 하드웨어 판매가 아니라 기계의 기능을 무한대로 확장해 주는 소프트웨어(애플리케이션)의 개발·판매에서 찾았다. 현재 삼성의 애플리케이션은 5천여개에 불과하지만, 애플사의 애플리케이션은 15만개 이상이다.

김 부원장은 "한국의 IT강국 지위는 반쪽짜리로 지탱돼 왔다"며 "한국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살인적인 근무환경과 열악한 고용구조에 시달리면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며 "결국 기업 경쟁력은 물론 산업경쟁력·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우리나라의 IT산업 경쟁력은 2007년 세계 3위에서 2008년 8위, 지난해에는 16위로 급락했다.

올해 조사에 참여했던 진보신당 관계자는 "노동시간이 길어지면 관련 사업에서 일자리 창출이 되지 않는다"며 "불법 야근과 과로 속에서 어떻게 창조적인 활동이 나올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스파트폰 열풍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 IT산업에서는 하드웨어 개발보다 소프트웨어 개발이 부각되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첨병인 IT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고서 IT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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