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국토 면적의 0.28%에 불과하지만 국민 4명당 1명이 살아가는 복잡다단한 도시다. 지상 위로 9천킬로미터의 도로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지하에는 전동차가 다니는 철로부터 상·하수도관과 각종 전선·통신망이 빽빽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도시가스 배관은 400만 세대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동맥과 같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7일 서울시 전체 면적의 40%에 도시가스 배관을 연결하고 관리하는 서울도시가스를 찾았다.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위치한 본사 7층의 중앙상황실에 들어서자 리모콘 버튼 하나로 차단문이 열리면서 벽면 전체를 차지한 스크린이 나타났다.

“우와!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로봇이라도 등장할 것 같은데요.”
입이 쩍 벌어진 기자를 보고 황주석(47) 안전관리팀장은 “서울경찰청에서도 중앙상황실 설치를 위해 벤치마킹했다”고 귀띔했다.


“안전이 생명 … 천안함 사태 때도 비상대기”

벽면 스크린 한켠에는 서울시 지도가 있다. 배관위치를 표시한 녹색과 적색 실선이 핏줄처럼 엉켜 있다. 이곳 중앙상황실에서는 서울도시가스 공급시설의 실시간 현황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 황 팀장은 “도시가스는 거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지만 사고가 났다 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안전이 생명”이라며 “중앙상황실에는 지진이나 화재를 비롯한 모든 사고 가능성에 대비한 안전관리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부사고 발생시에 대응한 안전관리 데모프로그램을 가동해 보겠다”며 시범을 보였다.

서울시 여의도 한국거래소에 화재가 발생한 상황을 설정했다. 소방서의 화재신고는 핫라인을 통해 중앙상황실에 바로 접수된다. 중앙상황실은 곧바로 원격제어장치를 이용해 한국거래소 주변 3개 가스 정압소 밸브를 차단했다. 그러자 한국거래소 주변 12개 빌딩에 가스공급이 중단됐다. 스크린에는 1천750미터의 배관이 손상됐다고 나타나는 동시에, 324루베(Ru-가로·세로·높이 1미터의 공간에 들어가는 가스량)의 가스를 대기 중에 방출시켜야 한다는 경고가 떴다. 공기보다 가벼운 천연가스는 대기 중에서 산화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스크린의 화면을 바꾸자 초록색 자동차 모형이 30초 단위로 깜빡였다. GPS 추적장치를 통해 서울도시가스 안전관리원들의 실시간 위치가 표시됐다. 비상소집령이 발동되면 사고 위치와 가장 가까운 안전관리원이 현장에 도착해 배관밸브 차단상태를 확인한다. 이어 시설복구조와 피해복구조가 손상된 배관을 처리한다.
황 팀장은 “서울시에 화재가 나면 종종 소방차보다 우리 직원들이 더 먼저 도착하기도 한다”며 “화재경보가 울릴 경우 이곳 중앙상황실에서 원격으로 도시가스를 차단하는데, 버튼 하나로 20만 가구의 가스공급을 중단시킬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화재가 2차 폭발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중앙상황실에서는 금기가 있다. 절대 서두르며 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안전관리를 담당하는 중앙상황실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직원들이 금세 불안해해요. 그래서 상황실 근무자들은 절대 뛰지 않습니다. 이곳 중앙상황실은 국가통합지휘무선통신망에 연결돼 있어요. 지난달 천안함 사고가 터진 날에도 비상대기 명령이 떨어졌었죠.”

인니의 천연가스, 가스레인지에 공급되기까지

도시가스의 원료는 천연가스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자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도시가스 보급률은 65% 정도로 높은 편이다. 서울의 경우 95%에 달한다. 그렇다면 천연가스가 가정집 가스레인지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 것일까.

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60%는 러시아 땅 속에 있지만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조건 때문에 우리나라는 주로 카타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에서 액화(LNG) 형태로 배에 실어 수입한다. 천연가스 수입과 도매는 한국가스공사가 독점하고 있다.

평택 등에 위치한 한국가스공사의 LNG 저장탱크에 있는 천연가스는 기화형태로 전환돼 지하배관으로 연결된 망을 타고 도심으로 공급된다. 이때 중요한 것이 기압이다. 전기의 경우 변압기가 저압으로 공급되는 열량을 고압으로 바꿔 주지만, 가스는 반대다. 도로 등에 설치된 정압기는 70킬로그램/제곱미터(700미터 높이로 쏠 수 있는 압력)의 고압가스를 8.5킬로그램/제곱미터(중압)로 전환한 뒤 각 가정에는 2.5킬로미터/제곱미터(저압)의 압력으로 공급한다. 휘파람 정도의 압력인데, 가스레인지 화력 수준이다.

전국에는 서울도시가스를 비롯해 총 33개의 도시가스 소매회사가 한국가스공사로부터 공급받는 도시가스를 각 가정으로 이어 주고 있다. 도심 지하에 실핏줄처럼 깔린 배관이나 정압기의 안전관리도 이들의 업무다.

서울도시가스에는 635명의 안전관리원과 940명의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날 오후 1시, 서울도시가스 남부지사에서 근무하는 성형기(40)·박용진(40) 안전공급과장의 차를 타고 배관 순찰에 나섰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육신묘공원 MOV(원격조작밸브)는 8차선 도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MOV는 중압가스관을 연결하고 있어 소홀히 다루다간 큰일이 날 수 있다. 담당자인 송신암(43) 과장이 중앙상황실에 무전을 치고 점검 사실을 알렸다. 그가 지름 60센티미터 맨홀 뚜껑을 열고 가스농도를 측정한 후 맨홀 속으로 들어갈 때 밖에서는 같은 팀 이상수(39) 계장이 차량을 통제하면서 송 과장의 작업을 예의주시했다.

“대로변에는 교통통제가 어려워 주로 야간에 점검을 합니다. 아직 시설이 노후한 것은 아니어서 크게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맨홀 뚜껑이 워낙 무거워요. 한눈 팔다 간 요통도 생기고 발등이 찍힐 수도 있지요.” 보통 지하에 매설된 가스배관은 중압가스가 지나가더라도 안전하게 고정돼 있기 때문에 특별히 점검할 사항은 없다. 관리가 어려운 것은 동작대교에 매달려 있는 중압 가스배관이다. 평상시에는 잠겨 있지만 동절기 가스사용량이 급증하거나 다른 중압 가스배관의 이설공사 같은 특수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가스공급 중단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설치한 예비용 배관이다.

“하루라도 가스공급이 중단되면 동네 전체가 난리가 날 걸요. 단수되더라도 물이야 받아 놓고 쓰면 되지만 가스는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예비용 배관들이 필요하지요.”

“땅 함부로 파지 말란 말이야”

사육신묘에서 차를 타고 신대방동 하수도관 매립공사 현장으로 이동했다. 도심의 공사현장은 누구에게나 불편하지만 특히 도시가스 노동자들은 굴착공사를 싫어한다. 성형기 과장은 “땅 파는 공사 현장에는 모두 출동한다”며 “굴착기나 삽으로 배관에 흠집을 내지 말도록 당부하는 게 업무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마침 관악구청에서 실시하는 신대방동 하수도관 매립공사 현장에서 이면도로 전체를 뜯어내 하수도관을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다. 속살이 드러난 지하에는 회색빛 하수도관과 노란색 도시가스 배관이 얽혀 있었다.

“하수도관을 옮기면서 도시가스 배관도 같이 옮기는 이설공사를 하고 있어요. 요즘에는 기술이 좋아서 폴리에틸렌(PE) 계열 파이프를 이용하기 때문에 간편해졌지요. 쇠는 절단하고 용접해야 하는데 PE 배관은 고무성질이라 열을 이용해 융착하면 됩니다.”
주길모(46) 과장이 배관 이설현장을 감독하고 있을 때 박희웅(40) 과장은 시공사 현장감독을 만나 한참을 설명했다.

“굴착공사를 할 때 도시가스 배관을 건드리면 얼마나 위험해지는 지 알려드리고 상호협조하자는 내용의 협약을 맺어요.” 박 과장이 태블릿PC 화면에 뜨는 협약서를 내밀자 현장감독이 서명했다. 공사기간 내내 하루 두 번씩 이런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좋아졌지요. 시공사들도 많이 이해해 줘요. 예전에는 사인하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공사장 인부들이 삽 들고 쫓아오기도 했거든요.” 종이 협약서가 태블릿PC 속으로 들어간 사이, 도시가스 안전관리에 대한 인식도 높아진 것이다.


“비눗물, 원시적이지만 가장 정확”

차를 타고 봉천동에 위치한 아프트단지 내 정압소를 찾았다. 골목길 곳곳을 누비는 도시가스 안전관리원들에게 내비게이션은 필요가 없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내비게이션보다 더 정확하게 길을 찾는다. 차량에 설치된 GPS는 중앙상황실에 이동위치를 알리는 기능을 할 뿐이다.

“GPS가 어쩔 때는 족쇄지요. 30초마다 상황실에 위치가 통보되니까요. 30초 단위로 근태관리를 한다고 보시면 돼요.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경은 쓰이죠.”
정보통신의 발달로 업무가 점점 원격화·자동화되는 것이 도시가스 노동자에게 썩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중압가스를 저압가스로 바꿔 주는 역할을 하는 정압소는 보통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단지 내에 위치한다. 부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고처럼 생긴 정압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공중목욕탕 보일러실에서 나는 소리처럼 ‘쉬~’하는 소음이 끊임없이 들렸다. 올해로 15년째 일하고 있다는 박종일(41) 과장은 “처음 입사했을 때는 화장실 갔다 온 직후에도 이 ‘쉬~’ 소리만 들으면 또 화장실에 가고 싶더라고요. 중압가스가 흐르는 소리가 어찌나 사람을 긴장시키던지….”

입사 2년째인 막내 신입사원 박경운(33)씨는 “혼자 다니면 무서울 것 같은데 항상 2인1조로 움직이기 때문에 끄떡없다”며 분무기에 들어 있는 비눗물을 정압기 사이사이에 뿌렸다.
“가스누수를 점검하는 거예요. 비눗물이 원시적이지만 가장 정확하죠.”

땅 속과 교신하는 사람들

방배4동에서는 DCVG(직류전압을 이용한 배관 탐사)팀 6명이 한창 작업 중이었다. 지하에 매설된 배관 위치를 탐측해 지도와 땅 위에 도시가스 배관 매설을 알리는 표식을 다는 작업이다. 이들이 표시해 놓은 매설부위에서 배관 손상은 없는지 점검하는 업무도 동시에 진행됐다.

김용재(40) 과장이 배관탐사기를 들고 주파소를 이용해 배관 위치를 파악하면 옆에서 도면에 기록한다. 길을 걷다 보면 도로 곳곳에 지름 10센티미터 정도의 ‘도시가스’라고 써진 원형 표식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굴착공사를 하는 작업자들에게 도시가스 배관시설 여부를 알리는 표식이다.

이런 표식이 없는데도 배관이 발견되면 스프레이로 점을 찍은 후 이후에 표식을 넣는 작업을 한다. 김용호(40) 과장의 작업은 보다 정밀했다. 땅 속에 일정한 전율을 보내 배관의 피복이 손상됐는지 여부를 파악하는 일이다. 전류의 음과 양을 이용한 탐사방법인데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오류가 많이 발생한다.

땅 속 배관과 교신하는 이들은 또 있다. SUV를 개조해 만든 가스누수 감지(FID)차량을 운전하는 김백광(44)씨는 지하에 매설된 가스배관을 따라 시속 10킬로미터로 이동했다. 차량 헤드라이트 아래에는 깔때기가 달린 호스가 6개 연결돼 있어 대기를 빨아들인다. 가스 누수점검기는 이를 분석해 일정 정도의 가스가 검출되면 낮은 부저음을 울린다.

차가 이동한 지 얼마 안 돼 갑자기 ‘삐~’ 하는 소리가 울렸다. 오토바이가 옆을 지나갔다. 기계가 배기가스를 맡은 것이다. 유독가스를 내뿜는 하수관이 매설됐을 경우에도 부저가 울린다.

“차량 이동속도가 워낙 느린 탓에 성격이 어느 정도 느긋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전 9시에 출근하면서부터 운전대를 잡기 때문에 졸음이 가장 큰 적이지요. 이렇게 느릿느릿 순찰하지만 가스누수가 발견되면 그야말로 전 직원이 긴급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어요.”

정부, 도시가스 규제완화로 ‘몸살’

도시가스 안전관리가 이처럼 꼼꼼하게 이뤄지는 곳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94년 서울 아현동 가스폭발사고와 95년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사고를 거치며 규제가 대폭 강화됐기 때문이다.

현행 도시가스사업법에서는 배관 길이 15킬로미터당 1명의 안전관리원을 두도록 하고 있다. 안전점검원과 안전관리원를 따로 둔다. 그런데 지식경제부가 지난달 초 도시가스 배관 안전점검원과 안전관리원의 업무를 통합하고, 현행 가스배관 길이 60킬로미터 이내에 안전점검원을 배치하도록 한 규정을 삭제하는 내용의 도시가스사업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김지희 서울도시가스노조 위원장은 “안전점검원과 안전관리원의 업무통합은 배관 안전점검원의 고유업무인 배관순찰을 소홀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해 가스사고 발생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도시가스 안전점검 규제완화 조치가 지속적으로 추진될 경우 배관 15킬로미터당 1명의 안전관리원을 두도록 한 현행 규정마저 완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인력 구조조정도 우려된다.

전국도시가스노조협의회(의장 손일진·경동도시가스노조 위원장)와 한국도시가스협회(회장 이만득)는 최근 ‘도시가스 안전점검원 선임기준 규제완화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노사합의문을 작성해 지경부에 제출했다. 도시가스 노동자들은 “정부의 규제완화 조치는 안전은 등한시한 채 도시가스업체들의 이익만 극대화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협의회는 지난달 8일 ‘도시가스 안전관리 규제완화 저지 투쟁본부’를 발족하고, 정부의 ‘도시가스 안전관리 규제완화 로드맵’ 폐지에 대한 전 국민 서명운동에 돌입한 상태다.

“도시가스 사고는 분명 과거보다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철저히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사고가 줄어든 겁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사고가 줄었으니 규제를 완화하자고 합니다. 집에서 간편하게 도시가스를 사용하기까지 불철주야 땀 흘리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 위원장의 마지막 당부였다.


“안전관리 규제는 만들기 어려워도 풀기는 쉽습니다. 한번 완화된 규제는 다시 되돌리려면 그만한 희생이 필요합니다. 지금 지식경제부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어요.”
김지희(40·사진) 서울도시가스노조 위원장은 “가스사고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줄어든 것일 뿐”이라며 지식경제부가 추진 중인 도시가스 규제완화 조치를 비판했다.
천연가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석유보다 저렴하고 공급도 용이해 가정에서 손쉽게 사용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가족의 생명을 앗아갈지 모르는 위험한 물질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은 “도시가스 규제완화 조치는 재정이 불안정한 중소도시 소매업체들이 인력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면 에너지 재벌기업들의 독과점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국 33개 도시가스업체 가운데 절반 가량이 SK 등 에너지 대기업들의 자회사다. 더구나 정부가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가스 선진화정책은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가스 수입·공급사업마저 이들 기업에 넘겨 주는 것이라는 비판이 높다.
“정부는 ‘가스 공급에 경쟁체제를 도입해 가스요금을 낮추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외국사례를 보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가스 민영화 이후 요금이 두 배 가까이 뛰었습니다.”
지난해 9월 지경부가 국회에 제출해 현재 지식경제위원회에 계류 중인 도시가스사업법 개정안은 발전용 가스 수입·공급사업에 민간이 진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가스요금체제는 산업용과 가정용 교차보조 방식이다. 발전용 가스 공급이 시장에 넘겨질 경우 교차보조를 유지하기 힘들다. 자연 도시가스 요금이 인상될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은 “현재 지역 분할독점 형태로 공급되고 있는 소매 분야(도시가스)도 완전 경쟁시장이 될 수 있다”며 “결국은 정유시장처럼 에너지 재벌기업들의 담합으로 소비자가격만 인상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미영 기자


[현장분석] 정부 ‘묻지마’ 가스산업 경쟁체제 도입 … KDI마저 ‘신중론’ 제기
우리나라 가스산업은 100%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특수성으로 생산기능이 전혀 없는 유통사업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도·소매가 이원화된 형태다. 한국가스공사가 수입·도매 사업을 독점하면서 주배관망을 통해 한국전력공사와 민자 발전소·도시가스사에 가스를 공급한다. 소매 가스사업자인 각 도시가스회사는 공급받은 천연가스를 권역별로 운영하는 자체 배관망을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한다.

한편 가정용과 산업용 수요를 담당하는 소매 도시가스 부문의 경우 대략 가정용 65%, 산업용·공업용 35%로 구성된다. 전국 33개로 나뉘어 있는 도시가스회사가 특정 지역을 독점한다. 도매와 소매, 소매 간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소매부문의 경우 일반적으로 네트워크 산업의 특성상 지역을 둘러싼 경쟁이 있을 경우 오히려 효율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지역 독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송유나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원은 “만약 경쟁을 시작하더라도 특정 기업을 선택할 기준은 오로지 가격밖에 없다”며 “가스의 특성상 품질과 성능 등 모든 면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좌우하는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소매부문에 경쟁이 도입됐을 경우 오로지 도입 가격 여부에 따라 경쟁력이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스시장 노리는 에너지 대기업


정부의 가스산업 정책은 그동안 기업체의 수출 경쟁력 확보를 이유로 저가의 에너지를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에너지 정책을 산업발전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간주하고, 저가의 에너지 공급을 위해 정부의 가격 통제가 쉬운 대규모 중앙집중식 공급구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정부는 ‘가스 선진화정책’을 통해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여당은 물론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신중론을 제기하고 있다. 지난달 16일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김정훈 한나라당 의원이 공개한 KDI의 ‘중장기 가스산업 발전방향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가스산업에 경쟁체제가 도입된다 해도 천연가스 생산국(공급자)이 소수에 불과해 신규 민간사업자들끼리의 경쟁은 오히려 도입가격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가스산업에 민간기업을 진입시켜 도입가를 떨어뜨림으로써 소비자 가격 인하로 연결시키겠다는 정부의 구상에 배치되는 것이다. KDI는 “경쟁시장이 열리면 포스코·SK·GS와 외국의 천연가스 생산·수출회사 등이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경쟁체제 도입을 단계적으로 검증한 후 확대 여부를 결정하는 접근법을 채택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

한편 33개 가스 소매업체 가운데는 SK 계열사가 9개, GS 계열사 및 지분 투자회사가 6개다. 수도권에 있는 7개 기업이 전체 매출의 57%를 차지하고 있다. SK·GS 계열 에너지기업들은 천연가스와 석유 등 탐사와 발굴을 하는 에너지 해외사업을 확대하는 동시에 소매 도시가스부문을 지속적으로 인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에너지부문 노동계는 “정부의 선진화 방침의 핵심은 포스코와 SK·GS 등 특정 기업이 도입부문에서 직도입을 확장하는 것을 전제로 소매 경쟁을 허용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가스 선진화정책을 반대하고 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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