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어머니·선생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에 충성하고 사업장에서 근면하고 성실한 국민이 됐다. 그리고 그 국민에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는 노동과 노동자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의 지위와 삶·권리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종종 TV에 출연하는 저명한 교수도, 뉴스 시간마다 등장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의원들도, 그리고 국민을 특별히 친애하시는 대통령도 말하지 않았다. 학교 선배로 늘 챙겨주시는 과장님, 지난 번 기술혁신 공로상을 수여하면서 칭찬해주시던 사장님도 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노예라고 말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지시하는 대로 성실하게 근무했다. 회사가 정해서 주는 대로 임금을 받았다. 회사가 발령한 전보와 전적, 휴직 명령과 처분에 따라 일해 왔다. 어떤 입사 동기가 노조에 가입하고 회사의 지시를 비난하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러한 말과 행동은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무언가 낯설고 이상한 말과 행동이었다. 그래서 회사가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노동자는 이번에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 회사에 사정해 보았다. 소용없었다. 노동사무소와 법률사무소를 찾아갔다. 서점에서 노동법책을 구입해서 밤을 새며 읽었다. 한결같이 회사가 부도날 정도가 아니라도 경영사정상 해고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법책에서 교수는 그렇게 말했다. 법원은 그렇게 판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갖 법률서적을 읽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아무도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노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사업장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버림받았다. 사업장에서 지시에 따라 일했을 뿐 한 번도 회사의 명령과 처분에 참여해 결정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열심히 일해서 몇십명이 일하던 사업장이 수백 명 규모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회사가 외주화를 추진하더니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노동자는 마침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노예다.

2.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노예라고 말할 수 없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없을까. 노동자는 노예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노예는 주인에게 신분적으로 종속돼 있고 노동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노예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고, 노동자는 계약에 의해 노동자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계약에 의해 노예가 된다면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란 말인가? 노예는 주인의 소유일 뿐이고 노동자는 계약에 따라 지시에 따라 일해 주는 것이어서 사용자의 소유는 아니기 때문에? 낮 시간에만 주인의 지시에 따라 일하였던 노예는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였다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결국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서 노무를 제공하고 언제든지 자유로이 계약의 해지 등 종료에 의해 노무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노동자라는 것이다. 자신의 노무는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 그 노동시간은 자신이 아닌 사용자의 것이다. 자신의 것임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시간의 종속이 노동이고 이 종속된 노동관계의 설정이 근로계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로계약에 의한 노동자의 노무는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근로계약에 의한 노동자의 시간은 사용자의 것이기 때문에 그 노무의 결과물은 사용자의 것이다. 결국 시간으로 계약된 노예, 이것이 노동자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정리해고 통보된 위 노동자와 같은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렇게 말해도 필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감히 노동자를 노예라고 말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국가법질서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에서 그렇게 말했을리 없다. 대한민국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10조 전문). 따라서 개인이 갖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 대한민국이(제10조 후문) 노예제를 용납할리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누구든지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경제적·사회적 생활 등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으며(제11조 제1항),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않고 이를 창설할 수 없다(제11조 제2항). 따라서 대한민국에서 노예제는 허용되지 않는다. 당신들은 필자에게 묻는다. 노예제가 아니라 시간으로 계약된 노예라면 어떤가. 그러면서 당신들은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것을 용납하고 있다. 그럴 리가?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가장 중요한 기본권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보장에 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감히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헌법재판관들과 판사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교수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국가에서 헌법을 해석하면서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당신들은 필자에게 말한다. 이것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경제질서의 기본원칙을 규정하고 있다(제119조 제1항). 이것이 바로 시간으로 계약된 노예인 노동자에 의한 경제관계질서를 규정한 것이라고 당신들은 주장한다. 그래도 필자는 당신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것은 아니다.

3. 시간으로 계약된 노예가 노동자라면 근로계약은 시간노예제의 설정계약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다. 근로계약은 노예계약일 수 없다. 노예와 노동자 모두 제공된 노무의 결과가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고 그것이 다시 자신을 노예와 노동자로서 노무를 강제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자가 노예일 수 없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고 따라서 소와 말처럼 주인의 재산일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사용자의 것이 아니다. 계약된 시간을 노무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노예로서 노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노예와 노동자의 노무는 모두 사용자와 주인의 지시에 따라 제공한다. 하지만 노무 제공의 조건과 복무 질서를 노동자는 노예와는 달리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참여해 결정한다. 근로계약을 체결해 노무 제공을 한다고 하여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정한 조건과 질서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면 그것은 시간노예제에 불과하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한 가장 중요한 기본권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에 반하는 것으로 용납될 수 없다. 만약 국가가 법률을 통해 이것을 강제하고 있거나 사용자에게 보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국가가 관리하는 노예제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헌법이 금지한 사회적 특수계급제도이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에서 법률은 헌법을 부정하고 있다. 근로계약의 내용은 취업규칙에 의해 갈음되고 취업규칙은 사용자가 작성과 변경의 권한을 갖는다(근로기준법 제94조). 사업장의 근로조건 및 복무규율에 관한 제반사항들은 모두 사용자가 권한을 갖고 정하게 되는 것이다. 법원은 노동자에게는 단지 기득권만 인정해줄 뿐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도 노동자의 지위와 권리를 말할 필요가 없었다. 사업장에서 노동과 노동자의 모든 것은 사용자가 결정한다. 사업장에서 노동자는 사용자의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법률은 노동자를 규정했다. 개별 노동자의 지위가 그렇다면 그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집단적인 노동자의 지위는 어떤가. 노동자에게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등 노동기본권을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제33조). 이 기본권의 행사가 제대로 보장된다면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시간노예가 아닐 수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헌법은 시간노예가 아님을 선언하고 이를 벗어날 수 있도록 노동자들에게 노동기본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노동기본권 중 단체행동권이라는 무기로 노동자들은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기본권은 법률에 의해 행사가 보장되지 않았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과 형법, 그리고 그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파업 등 단체행동권의 행사를 금지하고 처벌한다. 대한민국 법률은 노동자에게 시간노예에서 벗어날 무기를 주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의 권리와 기본권을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대한민국에서 노동자가 시간노예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법률이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를 시간노예로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노동자에게 시간노예에서 벗어날 노동기본권이라는 무기는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나 헌법은 기본권을 내재적으로, 성질상으로, 법률로서 금지하고 제한할 수 있으므로 노동기본권도 그렇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니 다소 제한이 많다고 말하고 개별 조항의 위헌을 말하지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자체가 위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그들은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의 지위는 그렇게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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